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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44화
PAYLUA ORIGINAL · 제44화

44화. 아홉 번째 경로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204자

오프라인 책장
나는 통화가 연결된 상태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않았다. "한시우 씨, 저를 왜 찾으셨습니까?" 상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서류를 펼치는 바스락거림도 들렸다. "오래전부터 제 이름이 적힌 문을 찾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그 문이 열렸다는 말을 들었어요." "누구한테요?" "제가 물려받은 회사의 서버에서요." "구태형과 관계가 있습니까?" "계약 관계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위해 일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위탁한 보존 장치를 정리하는 동안 제 어린 시절 기록을 발견했어요." 나는 질문을 삼켰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은 진실이었고 어떤 부분은 설명이 필요했다. 상대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반대로 누군가와 계약한 사실만으로 가해자라고 단정해서도 안 됐다. "어디서 만나면 될까요?" "지금은 만나지 않겠습니다. 회사 건물의 출입 상황이 안전하지 않아서요. 대신 경찰에게 자료를 먼저 제출하겠습니다. 그분을 통해 확인하세요." 신뢰할 만한 대답이었다. 나는 뜻밖에 조금 실망했다. 문이 열리고 검은 우산이 나타나는 일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또 한 번의 비밀 만남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자료였다. "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1998년 6월 13일을 기억합니까?" 긴 침묵. "그날 이전은 기억해요. 그날 이후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유리문 앞에서 누군가가 제 손을 잡던 순간만 비어 있어요." 나는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내려다봤다. 어머니 무릎에 앉은 어린 내가 소년 손목을 붙잡고 있던 장면. "그 손, 제가 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차 씨." 남자가 낮게 말했다. "기억 속의 소년을 저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지 마세요. 저는 그 아이가 오늘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릅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자신에게 속한 과거를 되찾고 싶어 하면서도 과거의 자신이 한 말을 함부로 가져오지 않겠다는 태도. 보관국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오후 여섯 시가 되었다. 회사 공조기 소리가 사라졌고, 창밖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날개를 편 채 멈췄다. 일반적인 정지였다. 두 번째 여섯 시를 거친 뒤라 그런지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은 나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유나가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옆에는 강문석이 있었다. 그는 검은 단말기를 꺼내 보였다. "어제 여덟 경로를 병합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런데 경로 하나가 새로 생겼어요." [접속 경로: 09] [등록인: 없음] [소유권: 미정] [생성 시각: 1998.06.13 18:00] "아홉 번째 사람입니까?" 내가 물었다. 강문석은 고개를 저었다. "경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번에도 그 둘을 혼동해서 위험해졌죠. 이번엔 먼저 그 경로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정지 세계에서 강문석의 단말기가 갑자기 진동했다. 평소 그 장치는 불필요한 경고음을 내지 않았다. 조그만 진동에도 그의 얼굴이 굳었다. [인증되지 않은 접속 요청: 경로 09] [요청 작업: 현재 주체의 기록을 과거의 사건 전체에 연결] "누군가 지금 도겸 씨를 열쇠로 쓰려고 합니다." "또 제 이름을 빌리겠다고요?" 강문석은 화면을 돌렸다. 요청한 키가 `차도겸`인 건 맞았다. 하지만 발신 주소는 그가 전혀 모르는 장치였다. 이름이 같아도 실제 사용자라는 뜻은 아니었다. 우리는 전에 그 함정에 빠졌다. "거부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요청 자체는 거부할 수 있어요. 다만 원본 키의 이전 소유자가 누구였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삭제하면 출처까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업무 시간이었다면 관리 콘솔에서 '모든 접속 종료'를 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마지막 행적이 연결 정보 안에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요청을 격리했다. 들어오는 신호가 더는 어느 사람의 기록도 변경하지 못하도록 읽기 전용 공간에 보존한 뒤 경로 09와 분리했다. 그 순간 가로등 아래 정지된 비둘기들이 일제히 날개를 퍼덕였다. 실제 비둘기가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유리창에 비친 비둘기의 모습만 반복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과거의 정지 시각이 현재 화면 위에 겹쳐진 것이다. "이게 제2정지랑 같은 원리군요." "네. 공간을 통째로 복사하지 않아도 사건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생 화면에 누가 끼어들 수 있는지 철저히 봐야 합니다." 나는 회사 회의실에 놓인 의자 열 개를 세었다. 실제 의자는 열 개였지만 유리창에는 열한 개가 비쳤다. 열한 번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흰 장갑만 보였다. "저건 누구죠?" 유나가 거울 쪽을 가렸다. "보지 마. 네가 그쪽을 보면 관측했다는 사실이 승인으로 기록될 수 있어." 나는 급히 시선을 뗐다. 유리 속 장갑이 책상을 두드렸다. 세 번. 그리고 모니터에 낯선 팝업이 떠올랐다. '누구든 1998년의 사건을 열어 볼 권리가 있다.' "그럴 리가요. 환자들 기록도 함께 있는데." 나는 거부 버튼을 누르는 대신 동의되지 않은 요청임을 표시해 보존했다. '누구든'이라는 말처럼 달콤한 명분 뒤에 숨기기 좋은 건 타인의 사생활이었다. 구태형의 사업이 언제나 그렇게 시작됐다. 사람을 돕겠다는 말로 사람들의 시간을 수집했다. 유나는 열한 번째 의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더 이상 사람은 없었다. 바닥에는 낡은 병원 슬리퍼 한 짝만 남아 있었다. 강문석이 그것을 만지려다 멈췄다. 원본 물건인지 재생된 영상인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 문 뒤에 누가 있어도 섣불리 꺼내 올 수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네. 오늘은 우선 말부터 들어 보죠." 그의 말이 끝나자 회사 회의실 벽에 나무문이 생겼다. 평소에는 화이트보드가 걸린 벽이었다. 문틈으로 오래된 소독약 냄새가 흘러나왔다. "우리 회사가 병원이었던 적은 없는데요." "연결 경로가 공간을 복사한 겁니다. 실제 병원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나는 우선 문에 걸린 표지를 읽었다. '환자 확인 후 입실.' 내가 손잡이를 잡으려 하자 문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부터 묻지 마세요." 작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0번 보관실에서 들었던 그 아이의 목소리와 닮았다. 그러나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들어가도 될까?" 내가 물었다. "혼자 오면 안 돼. 예전에 아저씨가 혼자 들어왔다가 문이 닫혔어." 나는 손을 놓았다. 유나와 강문석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원본 차도겸일 수도, 차정수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문 앞에서 목소리만 들었다. 어린아이는 문 안에 시계가 두 개 있다고 말했다. 한 시계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시간, 다른 시계는 자신이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시간. 첫 번째는 오래전에 멈췄고 두 번째는 누군가 계속 시작 버튼을 누른다고 했다. "누가 누르는데?" "관리자들이요. 맨날 엄마 흉내를 내면서 기다리라고 해요." 유나의 턱이 굳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지금 여기서 원하는 게 뭔지 말해 줄래?" "내가 한 말을 그 사람한테 돌려주기 싫어요. 내 말은 내가 했어요." "누구한테?" "나랑 똑같이 생긴 어른." 나는 2026년 한시우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남자 역시 똑같은 말을 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허락 없이 통째로 가져오지 말라고. 강문석이 단말기를 조작했다. 경로 09에는 기존처럼 '귀환'과 '보관' 두 버튼이 있었다. 그런데 아래에 작은 검은 문장이 숨겨져 있었다. [대상 범위: 개인 선택이 아닌 최초 정지 사건 전체.] "이게 왜 중요하죠?" "사람 한 명의 기억이 아니라 그날 병원에서 멈춘 한 시간 전체를 저장했다는 뜻입니다. 누가 그 시간을 열람하면 당시의 환자들, 직원들, 보호자들 행동까지 함께 보게 돼요." 나는 등줄기가 식었다. 누가 소년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싶어도, 다른 환자들의 가장 사적인 순간까지 함부로 열어 볼 권리는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계속 사람 하나의 이름으로 이 사건을 감쌌군요." "맞아요. 시간 전체를 한 사람의 '자산'으로 포장하면, 그 한 사람이 동의했다는 서명으로 모든 기록을 팔 수 있으니까." 회의실 벽에 붙어 있던 명판이 떨어졌다. 그 아래로 먼지 쌓인 게시판이 나타났다. 1998년 병원 직원들의 근무표였다. 이름은 희미했고 한 칸만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야간 원무과 임시 기록 담당 — 한정호.' "어머니 사진첩에서 본 그 이름이네요." "어느 문서에서요?" 유나가 물었다. "동행인 서명. 한시우 옆에 적혀 있던 사람입니다." 강문석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람이 최초 정지 사고를 보고한 직원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아직 어떤 역할인지 모릅니다." 나는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독약 냄새가 진해지고 복도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현실의 회사 바닥은 따뜻했는데 나무문 바로 앞 타일만 차가웠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 공간에 겹친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누군가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단순히 화면을 보는 것과 다를 것이다. 유나가 내 손목을 잡았다. "네가 저 안으로 들어가면 경로가 닫힐 수도 있어. 지금까지는 밖에서 말하는 건 허용됐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영웅이 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회사 회의실 한쪽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아이가 원한다면 질문을 적어 들려줄 수 있게 했다. 아이는 자기 이름을 적지 말고 '지금은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라고 써 달라고 했다. 나는 그 말만 적었다. 방 안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세 번, 쉬었다가 두 번. 내가 똑같이 두드리자 안쪽에서도 다시 소리가 났다. 언어를 몰라도 대화를 이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위로가 됐다. 문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는 우리 말에 응답하고 있었다. 문 안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구두가 급하게 달리는 소리, 금속 침대가 바닥을 긁는 소리. 누군가가 외쳤다. "여기 아이가 둘입니다! 둘 다 움직입니다!" 나는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누구 목소리죠?" 서랍 모양의 작은 창이 열렸다. 오래된 직원증 사진이 안쪽에 붙어 있었다. 한정호. 사진 속 남자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옆의 출입 기록에 오늘 날짜가 추가되고 있었다. [2026.10.26 / 경로 09 재접속 / 접속자: 한정호] 이미 종료된 과거가 아니라, 누군가 현재에서 접속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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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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