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시간은 세 분.
회사에서 세 분이면 복사기 앞에 줄을 서기도 빠듯하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는 여덟 개 경로가 한 사람의 신원으로 병합되려 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는 건 맞았다. 그렇다고 구태형이 원하는 대로 아무나 하나를 고를 수는 없었다.
"모두를 한 사람으로 합친다고요?"
진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거울 너머에 있었지만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렸다.
"기억과 행동을 한꺼번에 묶으면 서로 다른 사람의 의사라는 증거가 사라져.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 전부를 차도겸이라는 한 명이 동의한 거래로 만들 수 있어."
구태형이 짧게 웃었다.
"서아 씨. 그렇게 설명하면 제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려는 줄 알겠습니다."
"이미 저질렀잖아요." 내가 대답했다.
서기관은 급히 서류철을 넘겼다. 일괄 병합은 최초 계약의 허용 범위를 벗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운영 장치가 여전히 살아 있어 사람의 의사를 묻는 절차를 건너뛸 수 있었다. 법이 바뀌었다고 기계가 자동으로 바뀌는 건 아니었다.
"장치를 멈추는 방법은요?" 내가 물었다.
강문석의 목소리가 단말기에서 들렸다. 그는 복도 바깥에서 연결 상태를 지키고 있었다.
"주체별 서명을 분리해야 합니다. 접속 경로마다 실제 소유자가 누구인지 표기되면 한꺼번에 병합할 수 없어요."
"그럼 여덟 명을 다 찾아야 합니까?"
"아뇨. 지금 우리가 이미 확인한 것부터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 기록이 유효해지면 자동 병합 절차에 중지 사유가 생깁니다."
우편함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원본 차도겸이 안쪽에서 말했다. "도겸, 병합을 막는 데 내 서명도 필요할 거야."
나는 잠깐 망설였다. 지금까지 원본이라는 말을 들으면 늘 누가 사라질지 두려웠다. 하지만 원본은 더 이상 나를 가짜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겪은 시간을 자기 이름으로 설명하려 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내가 겪은 일을 네 기억에 덮어쓰지 않는 거. 그리고 나를 여기서 꺼내 주는 거. 둘 다 원해."
나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 적겠습니다. 이름이 같다고 한 사람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서기관은 그 문장 역시 별도 진술로 접수했다. 그러나 기록 숫자에는 아직 포함되지 않았다. 통로가 중복되어 있었다. 강문석이 말했다. "같은 경로에 여러 주체가 있다는 증거예요. 여덟 개 경로가 여덟 명과 같지 않다는 걸 보여 주죠."
나는 단말기에 원본의 목소리를 별도의 첨부로 저장했다. 지금의 나를 위해 원본을 지우거나, 원본을 위해 지금의 나를 없애서는 안 됐다. 그 두 문장을 구분해서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기혁 형사는 정지 이전에 예약해 둔 메시지에서 또 하나를 당부했다. '자료가 많을수록 사건 설명을 짧게 쓰십시오. 각각의 출처가 분명해야 나중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웃었다. 형사님은 세상이 멈춰 있는 동안에도 보고서 품질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틀리지 않았다. 수천 명의 기억을 하나로 합쳐 놓는 범죄에 맞서려면, 우리는 한 사람의 말을 한 사람의 말로 남기는 것부터 지켜야 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증거를 펼쳤다. 부산의 권수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여성, 이름도 없이 기다리던 0번 보관실의 아이, 자신의 키로 증언하고 싶다는 서아. 모두가 한 사람의 이름에 묶여 있으면 안 되는 이유였다.
내가 단말기에 기록을 하나씩 올리자 각 경로의 색이 바뀌었다. 첫 번째는 부산에서 확보한 직접 진술. 두 번째는 권수진 두 사람의 상호 인지. 세 번째는 현실의 어머니가 남긴 한정 동의. 네 번째는 남기혁 형사가 보존한 원본 자료.
[개별 의사 확인: 4건.]
구태형이 서류철을 집어 던졌다.
"고작 네 건으로 여덟 경로 전체를 막겠다고요?"
"네 건의 사람을 다른 사람 하나로 합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머지 네 건을 승인했다는 증거도 없고요."
서기관이 고개를 들었다.
"동의 미확인 경로는 병합 보류가 원칙입니다."
"기계가 그렇게 판단하지 않을 텐데." 구태형이 말했다.
그가 빨간 버튼을 눌렀다. 0번 보관실 벽이 흔들리고, 거울 속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내 얼굴과 닮아 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손목시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강제 병합 개시.]
갑자기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이번엔 내가 도와줄게."
복도 끝에서 나무문이 열렸다. 0번 보관실 안에 있던 아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대신 문틈으로 작은 손이 나타나 내게 종이를 건넸다. 서명도 이름도 없는 백지였다.
"이게 뭐야?"
"나도 선택할 수 있다고 했잖아."
아이는 종이 아래에 글자를 썼다.
'나는 지금 나가고 싶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문장을 읽었다. 손끝이 떨렸다. 왜 이것이 중요한지 이제 알았다. 보관국이 장부를 만든 이래, 이 아이는 언제나 다른 사람 중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을 받았다. 지금 처음으로 자신의 말로 선택하고 있었다.
"네가 한 말이야?" 내가 물었다.
"응. 내가 말했어."
서기관의 도장이 떨어졌다.
[0번 보관실 미귀환 주체. 본인 의사 최초 확인.]
장치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칫했다. 내가 가진 네 건의 진술이 다섯 건이 됐다. 이름이 없는 사람의 말도 그 사람에게 속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장부에 기록됐다.
구태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 말을 증거라고요?"
"이름을 말하면 위험하다고 만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걸 핑계로 말을 무시할 수는 없죠."
그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유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검은 우산을 들지 않았다. 빈 손으로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나는 차도겸의 보호자도 소유자도 아니다. 내 이름은 오유나. 나는 오늘의 선택을 스스로 한다.'
진서아도 거울 너머에서 목소리를 냈다.
"나 진서아. 내 로그의 원소유자는 나야. 사용을 허락하지 않은 자료는 이 장부에 넣지 마. 대신 오늘 내가 한 진술은 증거로 남겨."
일곱 번째 기록이 채워졌다. 마지막 하나는 나였다. 이름을 계속 빼앗겨 온 사람, 여섯 번 실패하고 일곱 번째에 다시 돌아온 사람.
나는 단말기 앞에 섰다.
"차도겸. 지금 여기 있는 저는 다른 사람의 의사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제가 무엇에 서명했더라도 오늘의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지 마세요."
[개별 의사 확인: 8건.]
[동일 신원 일괄 병합: 중단.]
장부 전체에 푸른 글씨가 번졌다. 구태형은 의자를 걷어차고 뒤로 물러났다. 거울 속 사람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벽에 붙었던 그림자는 다시 하나가 됐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을 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그런데 손목시계에는 여전히 정지 종료까지 41초가 남아 있었다.
"끝난 겁니까?" 내가 물었다.
서기관이 고개를 저었다.
"강제 병합만 중단됐습니다. 다른 경로에 남은 사람들의 귀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기억의 소유권 심사도 계속됩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고작 한 번의 승리로 모두를 구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숫자 여덟은 사람이 아니라 연결 경로였고, 우리는 오늘 그 경로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는 가능성을 지켰을 뿐이었다.
진서아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조금 밝아졌다. 그녀가 웃었다.
"기억해? 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다가 실패했어."
"그럼 이번에는 뭐가 달랐나요?"
"전에는 네가 혼자 영웅이 되려고 했지. 오늘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자기 말을 했어."
나는 그녀가 잘 보이도록 고개를 들었다. 잊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것보다 중요한 현재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이해했다.
원본 차도겸이 있던 우편함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겸. 오늘은 잘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야 해. 구태형이 원본 심사를 건 이유는 너를 지우려는 것만이 아니야."
"뭔데요?"
"네 아버지가 남긴 진짜 로그가 곧 열리거든. 그 안에 1998년의 두 아이가 왜 같은 집에 있었는지 나와 있어."
유나가 나무문을 통해 심리장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건너편 사람들의 진술을 보관한 봉투를 들고 있었다. 누구도 강제로 떠나보내지 않았으며, 몇 사람은 여전히 본인의 기록을 보존한 채 있었다고 했다.
"오늘 다 구한 건 아니네." 내가 말했다.
"그래도 오늘 없어진 사람은 없도록 막았잖아."
"우리가 모르는 사람은요?"
"그래서 내일도 조사해야지."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일도 여섯 시가 온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처음처럼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다. 내일의 일을 혼자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어났다. 아직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두 아이의 비밀을 알면 다시 누군가를 가짜라고 부르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단어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열면 어떤 대가가 있습니까?"
"이번에는 기억을 가져가지는 않아." 원본이 말했다. "대신 지금까지 네가 믿어 온 가족의 순서를 다시 봐야 해."
00:03.
00:02.
00:01.
정지가 풀렸다. 거리에는 자동차 소리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형사에게 오늘 모은 진술의 목록을 보냈다. 어머니에게는 조금 늦는다고 문자했다.
정지의 끝에서 머릿속이 잠시 비어 있었다. 나는 방금 겪은 사건 중 하나를 또 잊었을지 몰라 수첩을 펼쳤다. 오늘 누구를 만났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선명했다. 다만 오래전 여름 방학의 풍경 하나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징수는 일단 중단됐지만 예전 빚의 흔적은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공백도 기록했다. 모르는 사실을 아는 척하지 않는 일. 오늘 우리가 지킨 규칙이었다. 어머니가 차려 둔 밥이 식기 전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저장장치는 지금 재생하지 않으면 또 누구에게 빼앗길지 몰랐다. 나는 파일의 출처와 해시값을 먼저 확인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때 저장장치에서 조용한 기계음이 났다.
[차정수. 원본 관측 로그 복구 완료.]
화면에 오래된 병원 복도가 나타났다. 수술실 앞에는 젊은 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혜정아, 미안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집에 처음 온 아이는 도겸이가 아니었어."
그리고 카메라가 반대편 침대를 비췄다. 그 위에 누운 어린아이의 손목에는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표가 걸려 있었다.
이름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시우 / 1998년 6월 13일 / 최초 귀환자]
나는 수첩을 떨어뜨렸다. 그 이름은 낯설었다. 하지만 병원 영상 한쪽에 흐릿하게 찍힌 보호자 이름은 너무도 익숙했다.
[기록 인계 책임자: 진서아.]
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 진서아가 왜 그 시절 병원 기록에 등장하는지, 그 질문만큼은 아직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제4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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