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은 언제나 공평했다.
돈이 많은 사람도,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는 사람도, 갑자기 전화를 걸어 일을 시키는 팀장도 오후 여섯 시가 되면 멈췄다. 적어도 이전까지는 그랬다.
오늘은 아니었다.
사무실 창밖의 차량이 멈추자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움직였다. 그 옆에서도 다른 사람이 걸었다.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다섯, 여섯, 일곱. 내 시계에 표시된 경로 숫자가 함께 늘었다.
[제1정지 활성.]
[제2정지 대기.]
원래의 정지 세계와 달라진 점은 소리였다. 평소 여섯 시에는 내가 움직이는 발소리와 손으로 만진 물건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오늘은 차도와 인도 경계에서 바람 같은 웅성거림이 났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했다.
나는 호기심에 멈춘 자전거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자전거 바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에 세워진 전단지에는 방금 전 없던 글씨가 나타났다. '경로 연결 승인 대기.' 거기에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건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보관국이 새로운 동의로 처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함부로 실험해서는 안 됐다.
유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은 아무 문이나 열지 마. 우산도 쓰지 말고. 새로운 화면이 나온다고 확인 버튼을 눌러서는 안 돼."
"제가 그런 건 잘 지킵니다. 개발하면서 약관을 제대로 안 읽는 사람이 얼마나 큰 사고를 내는지 많이 봤거든요."
"너 예전에 읽지도 않고 동의한 적 있잖아."
"그 얘기는 기억을 잃어서 반박할 수가 없군요."
우리는 가로등 아래에 임시 집합 장소를 만들었다. 정지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시각과 자기 의사를 적을 종이를 나눠 줬다. 누가 진짜 사람인지 판별하는 시험은 하지 않았다. 간단한 테스트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인격을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물었다. "이 종이에 쓰면 진짜 집에 갈 수 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당신이 여기 있었다는 건 남습니다."
그 사람은 긴 숨을 내쉬더니 이름 대신 '집에 가서 딸 생일상을 차려 주고 싶다'고 적었다. 나는 그 문장이 조금 더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할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집에 돌려보내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바라봤다. 편의점 앞에 서 있던 여성은 무언가를 찾는 듯 손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말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방금 부산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은 회색 작업복을 입고 나타났던 권수진과 달랐다. 나는 섣불리 이름을 묻지 않았다.
"당신이 어디에 있고 싶은지부터 알려 주실래요?"
여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이요. 원래 집에 가려 했어요."
"알겠습니다. 현재 몸이 부산에 있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때 그녀의 손가방 안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화면에는 다른 여성의 얼굴이 비쳤다. 그 여자는 정지 세계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방금 내 앞의 여성과 눈, 코, 입이 똑같았다.
"이건 뭐예요?"
유나가 다가왔다.
"과거 행동을 실시간으로 불러오고 있어. 실제 사람이 순간 이동한 게 아니야. 오늘의 몸과 그때 남긴 선택이 분리된 거야."
편의점 앞의 여성은 자기 얼굴이 나타난 화면을 보고 무릎을 꿇었다.
"저 사람, 집에 갔네요?"
"아마도요." 내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었나요?"
"나도 집에 가고 싶었어요. 계속 버스표를 사려고 했는데 결제가 안 돼서. 일곱 달째 똑같이요."
나는 그녀의 말을 기록했다. 시간 속에 남은 행동이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수준까지 독립된 존재로 보아야 할지 당장 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도와 달라는 말을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강문석은 작은 단말기를 들고 우리가 있는 자리로 왔다. 그의 장치는 정지 세계에서 작동하는 오래된 계산기처럼 생겼다. 버튼은 세 개뿐이었다. 읽기, 확인, 거부.
"세 번째 버튼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요."
"맞아요. 원소유자가 원하지 않는 결정을 거부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편의점 여성에게 화면의 내용을 보여 주고 설명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신의 의사가 글자로 나타났다.
[경로 02. 귀가 의사 확인. 기록 보존 요청.]
그때 먼 거리에서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주변 건물의 유리창이 일제히 흐릿해졌다. 구태형의 목소리가 도로 위에 울렸다.
"신원 확인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건 아무 쓸모 없는 잔상이에요."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목소리의 출처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거리 한복판에서 검은 서류가방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서류가방이 열리며 종이가 비처럼 쏟아졌다.
[연결망 안정화 지시.]
[동의 없는 경로는 정리 대상.]
"정리라니요?" 편의점 여성이 물었다.
"그 사람이 당신을 지우겠다는 뜻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편의점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말할지 망설였다. 나는 억지로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각각 다른 시각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누구는 여섯 시 직전에 퇴근을 통보받았고, 누구는 병원에서 가족의 수술 동의서를 쓰던 순간이었다. 서로 전혀 관련 없어 보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누군가에게 선택을 빨리 하라는 말을 들은 뒤 그 순간에 멈췄다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누가 했나요?" 내가 물었다.
편의점 여성이 말했다. "검은 옷 입은 직원이요. 지금 서명하지 않으면 다시는 집에 못 간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저도요. 지금 결정하면 가족을 살릴 수 있다더군요."
나는 종이에 적었다. '강요된 마감시간'. 우리가 받은 계약서마다 똑같은 문장이 숨어 있었다. 누군가가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겁을 주고 대안을 생각할 시간을 빼앗았다.
유나가 옆에서 말했다. "도겸, 지금 이 사람들이 하루만 살아온 기억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우리보다 오래 기다렸을 수 있어. 빨리 답을 요구하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정지의 무서움은 시계가 멈추는 데 있지 않았다. 밖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안의 사람들은 같은 선택 앞에서 기다리게 된다는 데 있었다. 나는 내 한 시간이 끝나면 밖으로 돌아갔지만, 이 사람들은 돌아갈 권리조차 빌려야 했다.
그때 작은 남자아이가 인도 끝에 나타났다. 그는 실종된 아이가 아니라, 평범한 초등학생처럼 보였다. 이름을 말하라는 요구 대신 어디에 있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집에 가고 싶은 게 아니에요. 엄마가 저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답을 몰랐다. 다만 그 말은 다른 사람의 귀환 의사와 다르므로 별도의 기록이 필요했다. 아이가 적은 글씨를 접어 보관했다. 아무도 그 종이를 '귀가 희망자'라는 한 항목으로 합치지 않게 하려고.
나는 단말기의 거부 버튼을 그녀에게 보여 줬다. 다만 지금 누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내가 뭘 거부할 수 있죠?"
"당신 허락 없이 누군가 당신의 마지막 선택을 삭제하는 걸요."
버튼이 눌리자 화면이 푸르게 바뀌었다.
[경로 02. 임의 삭제 금지. 이의 제기 접수.]
주변의 종이비가 잠깐 멎었다. 구태형의 목소리가 불쾌하게 떨렸다.
"어리석군요. 당신이 서 있는 시간은 원본이 아니에요. 정리를 거부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자가 대답했다.
"그래도 저는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 말까지 당신이 없애게 할 순 없어요."
나는 그 문장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법적 지위가 무엇이든, 지금 들은 대답은 분명 누군가의 의사였다. 우리는 그 사실부터 지키기로 했다.
남기혁 형사가 정지 경계에서 연락을 보내왔다. 현실의 그는 움직이지 못하지만 보관국으로 연결된 증거 수신기에는 짧은 문장을 넣을 수 있었다. 그는 정지 직전에 자료를 예약 송신해 놓았다고 했다.
'경로별 실존 확인 전, 임의 삭제 금지 요청 접수. 현장 증언은 독립 보존.'
나는 형사의 답장을 주변 사람들에게 읽어 주었다. 두 사람이 더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지만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누구도 자신의 남은 시간을 타인의 선택에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여섯 시의 20분이 흘렀다. 그때 모든 사람의 그림자가 동시에 길어졌다. 건물 벽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손목시계의 동심원 중 안쪽 고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제2정지 준비. 기준 시각 18:00 재적용.]
유나가 나를 잡아끌었다.
"도겸, 이제 진짜 위험해. 여기 있는 사람과 기록이 뒤바뀔 수 있어."
"어떻게 막습니까?"
"두 번째 여섯 시가 오기 전에 누가 현실의 몸이고 누가 기록인지 서로 확인해야 해. 하지만 이름으로 하면 안 돼."
나는 길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누구든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꺼냈다.
"모두 들으세요.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싶었는지, 무엇을 거부했는지 말해 주세요. 그게 오늘 우리가 남길 첫 기록입니다."
하나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집, 회사 밖, 병원, 버스 정류장. 어떤 사람은 그냥 쉬고 싶다고 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았다.
모인 사람들의 진술을 다 받아 적을 수는 없었다. 나는 빈 종이를 더 꺼내 작은 묶음을 만들고, 각자가 적은 문장은 그 사람에게 한 번 더 읽어 줬다. 누군가는 자신이 한 말을 고쳤고, 누군가는 끝까지 이름을 적지 않았다. 그것도 모두 그 사람의 권리였다.
잠깐 뒤 단말기에 저장된 응답 수가 늘었다. 강문석은 그중 일부가 같은 경로로 들어온 중복 응답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람이 열 명 말을 했다고 경로가 열 개라는 뜻은 아니었다. 반대로 경로 하나 아래 한 사람만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는 숫자 옆에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응답 수는 사람 수와 다를 수 있음.' 오늘 하루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 되어 버린 문장이었다.
그리고 시계가 새로운 숫자를 표시했다.
18:00:00.
같은 날짜의 여섯 시가 두 번째로 시작됐다.
제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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