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남은 시간은 이제 열일곱 분뿐이야.'
진서아의 문장을 읽자마자 시계를 봤다. 오후 5시 43분. 계산은 지나치게 정확했다. 오후 여섯 시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의 연결음 뒤에 서아가 받았다.
"살아 있어요?"
"그게 첫 질문이야?"
"제가 아는 비상 연락 절차가 많지 않거든요."
그녀가 짧게 웃었다. 며칠 동안 들었던 목소리와 달랐다. 이제 와서 깨달았지만 나는 그녀가 웃는 소리를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잃어버린 기억 속에는 그런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도겸,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자격이 만료돼. 그러면 구태형은 내가 남긴 모든 로그를 조작된 자료라고 주장할 수 있어."
"그 자격은 어디 있죠?"
"신원 증명 키. 일곱 달 전에 네가 나한테 맡긴 거야. 네가 여섯 번 실패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지."
나는 노트북 앞의 강문석을 바라봤다. 그는 통화 내용을 듣고 손을 멈췄다.
"서아 씨. 그 키가 만료되면 우리가 확보한 증거도 무효가 됩니까?"
"자료는 남아. 하지만 보관국 법정에서 누가 생성했는지 인정받을 방법이 없어져."
기혁 형사가 말했다.
"현실 수사에서 자료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원본 생성 과정과 보관 경위를 지금 진술로 남기세요. 보관국 판정은 별개로 다퉈야 합니다."
서아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대답했다.
"좋아요. 지금부터 녹음해 주세요. 다만 내가 동의한 내용만 공개해 주세요."
나는 그 말에 가슴 한쪽이 따끔했다. 기억을 증거로 써야 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삶을 또 마음대로 공개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정리하고 동의한 범위를 구분해 기록했다.
남 형사는 녹음 장치의 시간을 확인하고 본인에게 허락을 구한 뒤 질문을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서아는 7개월 전 병원 별관에서 실종자의 가족들을 처음 만났다고 했다. 기록이 사라질수록 가족은 두 번 상처받았다. 한 번은 사람을 잃고, 또 한 번은 잃었다는 사실조차 설명할 수 없게 될 때였다.
"우리가 만들려던 건 기억을 되돌리는 도구만은 아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누구를 잊었다는 사실이 남아 있어야 나중에라도 찾으러 올 수 있잖아요. 그래서 빈칸에 서명을 남기는 방식을 생각했어요."
나는 오래된 수첩 속 비어 있는 페이지들을 떠올렸다. 왜 중요한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문장만 남아 있었는지 이제 이해했다.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떠올리는 대신, 분명히 존재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적어 둔 것이다.
"진서아 씨. 이 증언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형사가 말했다. "누가 열람할 수 있는지 범위를 정해 주세요."
"실종자 구조에 필요한 부분만요. 제 개인적인 과거와 차도겸의 관계는 수사 공개 자료에 넣지 말아 주세요."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서아가 덧붙였다. "도겸, 기분 나빠하지 마. 우리가 예전에 어떤 사이였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어."
"네. 맞습니다."
형사는 그녀의 요청을 기록했다. 보관국 직원이 들었다면 놀랐을 것이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자기 자료의 공개 범위를 직접 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갑자기 작게 웃었다. "옛날에 너는 이런 일이 귀찮다면서 입력 양식을 줄이자고 했어. 그러다 사고 날 뻔했지."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응. 하지만 그날 밤 다시 와서는 이렇게 말했어. 양식이 길어서 사람이 다치면 고쳐야 하지만, 사람이 다친다고 양식을 없애면 안 된다고."
내가 했다는 말치고는 꽤 그럴듯했다. 나는 그 문장을 수첩에 적으려다 멈췄다. 기억나지 않는 말을 내 주장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대신 '진서아의 증언'이라고 출처를 표시했다.
서아가 설명한 것은 단순한 열쇠가 아니었다. 제6시 연결망은 특정 사람의 이름으로 여러 시설을 묶는 프로그램이었다. 진짜 사람의 의사와 보관국의 행정 기록이 서로 충돌하면 후자를 우선했다. 그녀와 예전의 내가 만든 것은 그 우선순위를 뒤집을 수 있는 감사 로그였다.
"사용자 스스로 남긴 말을 관리자가 고칠 수 없게 하려고 했어."
"그걸 왜 아예 전부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어느 위치에 누가 숨어 있는지까지 공개되면 실종자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네가 나눠 맡기자고 했어. 나는 생성 증거, 유나는 접근 경로, 강문석 씨는 검증 장치, 넌 당사자 동의."
나는 웃음이 나왔다.
"저요? 제가 제일 많이 잊는데요."
"그래서 네가 중요했어. 네 기억으로 증명하면 실패할 테니까, 매번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자고 했잖아."
남은 시간 십이 분. 강문석이 장치를 연결하고 검증 화면을 열었다. 화면에는 전자 서명을 확인하는 칸이 있었다.
'생성자: 진서아. 재발급 권한: 본인에게만 있음.'
"저희가 대신 갱신하면 안 됩니까?" 내가 물었다.
"안 돼. 다시 다른 사람이 그녀의 신분을 대신 갖는 방식이잖아요." 형사가 대답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좋은 지적이었다. 급하다고 해서 같은 범죄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서아는 자신의 목소리로 갱신 요청을 남겼다. 하지만 시스템은 곧바로 거부했다.
[재발급 불가. 동일 신원 다중 연결 상태.]
구태형이 그녀의 신원 키까지 내 이름 아래 묶어 놓았던 것이다. 내가 기억을 잃을 때마다 서아의 로그가 한 단계씩 약해졌다. 그가 그녀를 '데리고 있다'고 했던 말은 법적 자격을 인질로 잡았다는 뜻이었다.
"서아 씨. 그럼 제 신원 키에서 떨어져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럴 수 있다면 벌써 했지. 시스템은 네가 동의했다고 주장해."
"저는 동의한 적 없어요."
"기억 못 하는 동의서를 내밀 거야."
나는 수첩을 넘겼다. 여기까지 오며 지운 기억도 많았지만 하나만큼은 남아 있었다. 29화에서 어머니가 남긴 기록.
[반환 원칙: 소유자 확인 우선. 제삼자 기억 대체 금지.]
"어머니가 이의를 제기한 이후 보관국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대신 담보로 쓸 수 없습니다. 신원 키도 결국 그 규칙에 따라야 하지 않나요?"
강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관국 서기관에게 재심 요청을 보낼 수 있는 긴급 통로를 열었다. 직권으로 키를 갱신해 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서아의 소유권을 심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강문석은 작은 테스트를 진행했다. 외부 보관 매체에 저장된 진서아의 공개 검증키는 일치했다. 원본 로그의 내용 역시 손상되지 않았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법적 인정이었다. 시스템은 신원 키가 만료되는 순간 모든 진술을 '검증 불가'로 처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자료가 없어지는 건 아닌데 유효한 증거가 아니게 만드는군요." 내가 말했다.
"맞아요. 보관국 내부에서는 서류가 남아 있어도 아무도 열람할 수 없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재발급을 본인이 하는 것도 막는 겁니까?"
강문석이 답했다. "동일 신원을 사용한 모든 사람의 승인을 받으라고 하니까요. 그중 누가 실제 사람이었는지 모르니 승인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겨 있는 문을 열려고 열쇠를 찾는데 열쇠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려면 문부터 열라고 하는 셈이었다. 내가 개발했다면 테스트 단계에서 반려했을 기능이었다. 구태형은 정확히 그 모순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면 모순을 기록하세요." 남 형사가 말했다. "모순이 있다는 게 지금 우리가 가진 사실입니다. 그 사실부터 제출하면 됩니다."
우리는 '소유권 확인을 위해 요구되는 승인 자체가 중복 신원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라는 문장을 작성했다. 문장 하나를 완성하는 데 삼 분이 걸렸다. 보관국의 제도에 맞게 쓰기보다는 실제 벌어진 일을 정확히 설명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유나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둘이 만나면 대화가 너무 길어져."
"어쩔 수 없어요. 오류 메시지는 길어도 정확한 게 낫습니다."
"그럴 거면 내일 야근은 하지 말자."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잠깐 웃었다. 내일이라는 말이 그렇게 평화롭게 들린 날도 드물었다.
남은 시간 여덟 분. 서기관의 답장은 냉정했다.
[해당 신원 키의 원소유자 대면 확인 필요.]
"서아 씨, 지금 어디예요?"
"정확한 위치는 말할 수 없어. 누가 듣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럼 대신 만날 방법을 찾아야죠."
서아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도겸, 너 나를 여섯 번 잊었는데도 일곱 번째에 또 찾았지. 왜 그런 것 같아?"
"모릅니다. 제 기억은 삭제가 너무 잦아서 사용자 후기 신뢰도가 낮거든요."
"예전의 넌 네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어."
가슴이 멎는 듯했다. 하지만 서아는 곧 덧붙였다.
"난 그 대답이 싫었어. 내가 사랑받는다고 해서 내 대신 선택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럼 이번에는 당신 선택을 먼저 듣겠습니다."
"나는 내 이름을 찾고 싶어. 그리고 네 이름 밑에 숨은 사람들도 자기 이름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나는 그 진술을 기록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는 데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 사 분. 화면에 [원소유자 직접 진술 접수]가 떴다. 하지만 확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구태형의 이의 제기가 먼저 도착했다.
[신원 중복 충돌. 제2정지에서 심리 재개.]
진서아의 작은 웃음이 들렸다.
"역시 막으려고 하네."
"걱정 마세요. 재심 접수됐잖아요."
"도겸, 하나만 더 부탁해."
"말하세요."
"두 번째 여섯 시가 왔을 때, 나를 구한다는 이유로 다른 일곱 경로를 닫지 마. 어쩌면 거기에 아직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대답했다.
"그런 선택은 안 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포기한다는 뜻도 아니에요."
나는 진서아의 직접 진술 파일에 임의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파일 제목에는 접수 시각과 검증 순번만 기록했다. 누군가 훗날 다시 찾을 때 그녀의 말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있도록 했다.
유나가 내 옆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서아가 왜 네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만 기록을 남겼는지 이제 알겠지? 그 애는 네가 언젠가 기억을 잃을 거라는 걸 알고도 돌아오기를 기다렸어."
"기다리는 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죠."
"응. 이제 아무도 혼자 기다리게 하지 말자."
나는 수첩을 접었다. 누구에게나 시간을 약속하는 일은 쉬웠다. 지키기 어려운 건 그 약속을 잊지 않는 일이었다. 이번만큼은 내 머릿속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기록에 남아 있었다.
통화가 끊겼다. 오후 5시 59분. 창밖에서 자동차 경적이 길게 울렸다. 나는 형사가 남긴 서류와 어머니의 기록을 가방에 챙겼다.
실제 여섯 시가 되기 일 초 전, 서아의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첫 번째 여섯 시에는 사람을 찾고, 두 번째 여섯 시에는 기록을 믿지 마.'
그 말을 읽는 동안 초침이 멈췄다.
제3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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