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진.
나는 그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권수진, 부산 물류회사, 회색 작업복, '차도겸이라는 이름을 처음 빌린 사람'. 문제는 어떤 부분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 이름을 빌려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조만간 상표 등록이라도 해야겠어요."
기혁 형사가 말했다.
"그보다 먼저 신원도용 사건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게 현실적인 걱정이긴 하죠."
영상이 끊긴 뒤 부산 현장에 있던 경찰은 권수진이라는 여성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카메라에는 찍혔지만 현장에는 없었다. 실제 사람의 원격 출현인지, 보관국이 만든 영상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기혁 형사는 권수진에 대한 개인정보 조회를 서두르지 않았다. 실종 신고와 현장 자료에 등장한 사람을 먼저 대조했다.
그렇게 확인된 사실은 두 가지였다. 권수진이라는 이름으로 출입증을 발급받은 직원이 오래전에 있었고, 그 사람은 일곱 달 전 이미 퇴사 처리됐다는 것. 그런데 급여 기록에는 그 뒤로도 매달 '퇴직 보류 수당'이 지급되고 있었다.
"회사에서 퇴사한 직원에게 돈을 계속 주는 경우가 있긴 하죠." 내가 말했다.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좌는 수령자가 매달 바뀝니다."
형사는 거래내역 일부를 출력했다. 담당 은행과 절차를 거쳐 확인한 자료였다. 계좌를 완전히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보관국이 사람의 신원을 단순한 이름표로 사용해 왔다는 정황은 쌓이고 있었다.
유나가 권수진이 남긴 문장을 중얼거렸다.
"당신 이름을 처음 빌린 사람."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빌렸다는 말인가요?"
"아닐 거야. '처음'은 보관국의 첫 등록을 의미할 수도 있어."
형사는 그 사이 회사 외부 솔루션 담당자에게서 납품 계약서를 받아 왔다. 문서에는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입퇴실 기록 통합, 다중 사업장 직원 신원 연동, 퇴근 시간 오류 자동 보정.' 각각은 합법적인 기능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회사의 직원이 다른 회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접속할 수 있게 만드는 잘못된 설계가 숨어 있었다.
"이런 기능이 필요했을까요?" 내가 물었다.
강문석은 계약서의 한 줄을 가리켰다. '관리자 편의를 위한 동명이인 통합.'
"처음에는 관리자들이 각 지점의 자료를 빨리 합치고 싶어 했을 겁니다. 서로 다른 직원이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없애면 보기에는 편하니까요."
"그러다가 사람도 지워졌군요."
"맞습니다. 데이터가 편리해질수록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은 더 불편해졌어요."
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 역시 개발자로서 '편의'라는 단어를 수없이 사용했다. 로그인을 간편하게, 결제를 간단하게, 통계를 한눈에. 하지만 절차를 줄일 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사람의 권한까지 없애 버리면 편리한 도구는 위험한 도구가 된다.
형사는 구태형과 계약한 책임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한 회사를 공격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그동안 시스템을 구매한 사람들 역시 무슨 기능을 사용했는지 알아야 했다. 일부는 속았을 것이고, 일부는 알고도 편의라는 이유로 외면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사람들한테 죄를 물을 생각보다 기록을 먼저 보존합시다." 기혁 형사가 말했다.
나도 동의했다. 분노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되찾으려면 증거가 필요했다.
강문석이 신원 키의 생성 기록을 확인했다. 오래된 단말기에 녹색 글씨가 나타났다.
[차도겸 / 식별키 0613 / 최초 운영 계정 등록: 7개월 전.]
"생년월일도 주민등록번호도 아니네요." 나는 말했다.
"처음 이름을 만든 날짜가 6월 13일입니다." 강문석이 대답했다. "당신의 사번과도 일치하죠.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나는 예전의 내가 6월 13일을 기억하지 못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진서아가 남긴 날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보관국이 신원 키를 만든 날일지도 몰랐다. 이름을 잊게 만들고 같은 이름으로 다른 기록을 이어 붙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삶을 빼앗겼을까.
점심시간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그분은 집에 두고 간 보온병을 가져가겠냐고 물었다. 나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굳이 회사 앞까지 나왔다.
"어제 빈 밥그릇에 누가 앉았는지 생각났어요?"
"아직요."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그녀가 보온병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젊은 시절 아버지가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 나는 다섯 살쯤 됐고 옆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사진 귀퉁이에 펜으로 적힌 문장이 보였다.
'차도겸이라는 이름은 이 아이에게만 쓰기로 함.'
나는 글씨를 읽었다. 어머니는 기억이 불분명한 상태에서도 그 문장을 소중하게 보관했다. 사진 뒷면에는 낯익은 아버지의 필체로 다른 문구가 있었다.
'이름을 공유시키면 두 사람의 선택을 구분하지 못한다.'
강문석에게 사진을 보여 주자 그는 눈을 감았다.
"차정수 씨는 알고 있었군요."
"뭘요?"
"처음에는 두 아이의 이름을 다르게 등록했습니다. 구태형이 나중에 그 기록을 하나로 합쳤어요. 그러면 보관국은 여러 사람의 선택을 한 명의 선택으로 처리할 수 있거든요."
"그럼 권수진은요?"
"제 추측입니다만 초기 실험 참가자였을 수 있습니다. 첫 신원 공유 테스트가 그녀에게서 시작됐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똑같은 화면을 두 번 읽었다. 같은 이름을 쓰면 기억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다는 기술. 사람들이 원했던 건 시간을 조금 더 갖는 일이었는데 누군가는 그 틈에서 신분 자체를 유통하고 있었다.
권수진이 보내 온 첫 번째 자료는 오래된 급여 명세서였다. 거기에는 이상한 항목이 있었다. '정지시간 사용료 공제'. 원래 급여에서 빠져나가야 할 돈이 아니었다. 회사는 매달 소액을 뗐고, 그 금액이 모여 누군가의 시간을 사는 데 쓰였다고 했다.
"왜 그때 바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기혁 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화면 너머에서 손을 만지작거렸다. "신고했어요. 담당자가 그런 시스템은 없다고 했고, 다음 날에는 제가 무슨 신고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어요. 통장에 돈이 줄어든 것만 남아 있었죠."
남 형사는 단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의 신고 접수 기록이 있는지, 회사 서버의 감사 로그가 남아 있는지, 은행 자료와 맞는지 순서대로 확인하겠다고 했다. 권수진은 처음에는 그 태도가 차갑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조금 뒤 표정이 풀렸다.
"제 말을 거짓말이라고 안 하시네요."
"확인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사가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도 급여 명세서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였다. 나도 수첩 없이는 하루를 이어 갈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긴 기록을 누군가 위조 계약서로 바꿔 버렸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처음부터 다 기억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말했다. "확인할 수 있는 것부터 모으죠. 저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권수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그때 한 명만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요."
그 대답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녀가 보내 준 자료의 날짜와 출처를 확인했다. 자료의 공백은 남아 있었지만, 공백이 있다는 이유로 그녀가 겪은 일을 지워 버리지는 않았다.
오후 네 시, 권수진에게서 통화가 왔다. 이번에는 화면에 사람이 선명하게 보였다. 배경은 어느 집의 작은 거실이었다.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아까 본 영상은 제 기억에서 뽑힌 거예요. 지금 저는 부산에 없어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물류회사에서 회계 프로그램을 관리했어요. 시스템이 직원의 퇴사 의사를 삭제한다는 걸 알게 됐죠. 회사는 그런 시스템을 써 본 적 없다고 했고요."
"왜 제 이름으로 기록을 남겼습니까?"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원래 제 이름으로 접속했어요. 근데 제 기록을 없애겠다고 협박하더군요. 그래서 구태형이 제안했어요. 다른 사람의 신원 키로 잠깐 접속하면 살려 주겠다고."
"당신은 그걸 받아들였고요."
"네. 무서웠으니까요. 하지만 나중에 알았어요. 제가 그 키로 접속한 순간 그 사람의 기억에서도 무언가 사라졌다는 걸."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제가 처음이었어요. 차도겸이라는 사람의 기억을 대신 담보로 써 버린 첫 번째 사람."
나는 숨을 들이켰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기억 상실의 첫 원인이 한 사람의 두려운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이 여자가 모든 걸 설계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잘못은 위협받은 사람에게 타인의 삶을 담보로 내놓으라고 강요한 쪽에 있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뭔데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인이 직접 증언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기록을 되찾을 방법도 같이 찾읍시다."
권수진이 한참 침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가지 약속해 주세요. 밖에 있는 저를 구하러 올 때, 그 사무실에 남은 제 선택도 없애지 말아 주세요. 저 사람도 끝까지 그만두겠다고 말했잖아요."
"네. 한 사람인 척 묶어 놓은 기록들을 구별하겠습니다."
권수진의 진술 뒤에는 작은 요청이 하나 더 남았다. 그녀는 부산에 있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언젠가 직접 듣고 싶다고 했다. 기억을 모두 한꺼번에 돌려받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그대로 적었다.
"시간 정지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면 이제라도 모든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줄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유나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람은 천천히 알고 싶어 해. 네가 모든 기억을 한꺼번에 되찾는 게 무서운 것처럼."
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모든 비밀을 지금 풀지 않아도 된다면, 오늘 우리가 할 일은 한 사람의 내일을 빼앗지 않는 것이었다.
통화가 끝나자 화면에 새 안내가 떴다.
[경로 03. 신원 공유 피해 인정.]
[전국 제6시 연결망: 7개 경로 활성.]
강문석은 표정을 밝힐 틈도 없이 다음 창을 열었다. 서울 경로가 검게 변하고 있었다. 그 위에는 곧바로 구태형의 서명이 나타났다.
[경로 01. 금일 18:00, 현실 차도겸에 대한 원본 우선권 심사.]
나는 낯익은 문구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고르라는 소리였다.
바로 그때 진서아에게 메시지가 왔다.
'도겸, 부산은 시작이야. 나한테 남은 시간은 이제 열일곱 분뿐이야.'
제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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