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아침, 나는 내 이름으로 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보낸 사람은 나였다. 발송일은 정확히 7개월 전이었다.
제목: 여섯 시에 누가 말을 걸면 믿지 마.
메일 본문에는 딱 한 줄이 있었다.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진서아를 찾아.’
대단했다. 나는 미래를 예측하는 초능력자이면서 동시에 문맥을 생략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메일의 발송 기록을 열었지만 서버에는 이상한 흔적만 있었다. 내 계정으로 발송됐는데 보낸 편지함에는 없었다. 메일 헤더의 마지막 경유지는 사내 네트워크가 아니라 폐쇄된 시설의 도메인이었다.
SIX-ARCHIVE.LOCAL.
로컬 도메인. 개발자에게는 안 좋은 냄새가 났다. 누군가 시스템 내부에서 메일이 흘러나오도록 만든 것이다.
나는 팀장에게 반차를 신청했다.
“갑자기?”
“제 인생의 치명적인 버그를 고쳐야 해서요.”
“그건 반차로 안 되겠다. 퇴사해야지.”
생각해 보니 그 말이 가장 정확한 조언이었다.
나는 메일을 먼저 분석했다. 평소라면 악성 메일로 의심할 헤더였다. SPF 검증을 건너뛴 흔적, 수신 서버의 비정상적으로 짧은 처리 시간, 존재하지 않는 내부 주소. 하지만 아무리 자세히 살펴도 메일 본문을 수정한 흔적은 없었다.
메일이 조작된 게 아니라, 원래 존재하면 안 되는 경로를 통해 온 것 같았다.
노트북 저장소에서 오래된 프로젝트를 찾았다. 7개월 전에는 일반적인 ERP 연동 업무를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런데 프로젝트 폴더 크기가 1.2GB나 됐다. 소스는 대부분 지워졌고 남은 파일에는 주석 하나가 있었다.
// 사용자가 떠나기 전에 사용자를 기억시켜야 한다.
누가 이런 주석을 쓰는가. 코드만 보면 무슨 철학 강연이라도 준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래쪽의 함수 이름은 섬뜩할 만큼 구체적이었다.
restore_identity(anchor_id)
나는 함수를 열었다. 반환값이 없는 빈 함수였다. 대신 종료 조건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if (memory_owner !== original_owner) return false;
기억을 소유권으로 다루는 프로그램. 어제 받은 알림과 정확히 같은 발상이었다. 그건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도대체 나는 어떤 개발을 했던 걸까.
문서 속 회사명도 찾아봤다. 시간기록보존연구소. 등기 기록에는 이름이 있었지만 폐업 신고가 돼 있었다. 대표자 항목은 지워져 있었고, 폐업일은 내 메일이 발송된 날과 같았다.
나는 그날 밤 회사에서 야근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출입 기록에는 내가 사내 건물에 들어간 흔적이 없었다. 일곱 달 전의 내 기억은 하루를 통째로 놓치고 있었다.
오후에는 진서아를 검색했다. 동명이인이 많았다. 의사, 번역가, 대학교 연구원. 내가 아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예전 사진 앨범에서 찾은 것은 흐릿한 대학 축제 사진 한 장이었다. 내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던 자리만 어색하게 비어 있었다. 사진이 잘린 건 아닌데, 그 사람의 얼굴이 있던 부분이 번져 있었다.
파일 정보에는 수정일이 어제 오후 6시 00분 01초로 남아 있었다.
외장 하드에도 백업한 오래된 사진인데.
나는 손목을 문질렀다. 오늘은 무슨 기억을 떼어 갈까.
5시 47분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수첩과 작은 손전등, 생수, 젖지 않도록 지퍼백에 넣은 휴대전화를 들고 강남역 근처 육교 아래에 섰다. 카페의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라면 이곳에서도 마주칠 수 있을지 모른다.
5시 59분.
세상은 미친 듯이 움직였다. 우산이 부딪히고, 차들이 물을 튀겼다. 오토바이 배달 기사가 신호를 무시하다 욕을 먹었다.
6시.
모든 것이 멈췄다.
비가 공중에 걸렸다.
수천만 개의 물방울이 빌딩 사이의 공간을 점령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작은 유리 구슬처럼 반짝였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물방울들이 피부에 닿아 터졌고, 그 물은 손을 타고 흘렀다.
멈춘 비를 지나 걷는 기분은 아름다웠다.
적어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차도겸.”
여자 목소리였다.
멈춘 세계에서는 목소리란 것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육교의 가운데에 여자가 서 있었다. 짙은 남색 코트에 젖은 운동화. 검은 머리는 어깨 아래로 내려왔고, 손에는 노란 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 위에 쌓여 있던 빗방울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구슬처럼 튕겨 나갔다.
나는 먼저 그녀의 발 아래를 봤다. 빗방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걷는 발목에 부딪히면서 물로 변했다. 유나 주변에서는 내 주위와 같은 물리 법칙이 작동했다. 내 착각도, 동영상 속 합성도 아니었다.
그녀의 구두 밑창에는 아주 작은 종잇조각이 붙어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으려 하자 그녀가 발을 옮겨 가렸다.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 두려움이 지나갔다.
이 사람도 무서워하고 있었다. 나보다 많이 알고 있지만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휴대전화부터 꺼냈다. 정지된 화면에는 어머니가 보내 주신 동요 녹음 파일 제목이 남아 있었다. 유나가 그 화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가족부터 기록했구나.”
“그게 잘못입니까?”
“아니. 예전엔 그런 것도 놓쳤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오래전에 친했던 사람을 보는 듯한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첫 질문은 ‘누구세요’겠지?”
“누구세요?”
“보면 알겠지만 당신보다 이 상황에 적응을 좀 더 했어.”
“초능력자 동호회라도 있습니까?”
“있었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오유나야.”
오유나.
그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 어디에도 얼굴을 연결할 수 없었다.
“우릴 알고 지냈습니까?”
“오래전부터. 그리고 당신은 여섯 번이나 나를 잊었어.”
나는 웃음을 지으려다가 실패했다.
“우리가 그 정도 사이였다고요?”
“그래. 매번 첫인상은 최악이었어.”
“일곱 번째면 서로에 대한 평가가 개선될 시점인데요.”
“걱정 마. 당신은 일관되게 별로였어.”
이 여자는 사람의 자존심을 찌르는 데 능력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내게 이름을 한 번 더 말해 보라고 했다.
“차도겸. 나이는 서른셋. 개발자.”
“생일은?”
“11월 19일.”
“정말?”
나는 당황했다. 그 날짜는 내 주민등록증에 적힌 생일이었다. 왜 의심하는 걸까.
“기억과 서류가 늘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마. 종이에 남긴 것도 바뀔 수 있어. 그래도 사람의 선택은 흔적을 남겨.”
그녀는 내 신발 끈을 가리켰다. 왼쪽 끈은 두 번 매듭지어 있었다.
“네가 긴장할 때마다 그렇게 묶어. 예전에도 그랬어.”
나는 발을 내려다봤다. 적어도 몸은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나는 한 걸음 다가와 내 손목을 가리켰다.
“시계 보여 줘.”
숫자는 52:17.
그녀의 손목에도 같은 시계가 있었다. 그녀 것은 숫자 대신 얇은 붉은 선 셋이 그어져 있었다.
“시계는 정지 구역 안에서만 나타나. 사용자에게 배분된 시간을 표시하는 장치야. 네가 쓸 수 있는 건 하루 60분. 시간이 끝나면 현실로 복귀해.”
“그래서 기억이 사라진다?”
“정확히는 움직인 대가로 네 과거의 일부가 분리돼. 누군가가 그걸 가져가고.”
“누가요?”
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걸 말해 줄 자격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해.”
“자격시험도 봅니까? 이력서 내면 됩니까?”
그녀가 우산을 접었다.
“어제 네가 검은 우산을 봤지?”
내 목 뒤가 차가워졌다.
“봤어요.”
“그것들은 ‘징수자’야. 시간 밖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을 추적해. 직접 사람을 데려가는 것보다 기억을 수거하는 일이 우선이지.”
“좋은 단어는 하나도 없네요. 징수, 수거, 추적.”
“좋은 조직이 아니거든.”
“그럼 경찰에……”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어. 정지가 풀리면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내 수첩을 흘끗 보았다.
“적고 있구나. 이번엔 잘했네.”
“이번엔?”
유나의 얼굴에 잠깐 슬픔 같은 것이 지나갔다.
“지난번에는 기록도 안 남겼거든. 당신은 용감해질수록 더 빨리 사라지는 사람이었어.”
“도대체 저는 누구입니까?”
“그게 우리가 찾아야 할 질문이야.”
멀리서 금속 소리가 났다.
딱. 딱. 딱.
유나가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내가 들었던 그 소리였다.
“찾아왔네.”
“저 소리 알아요?”
“우리 쪽 신호였어. 지금은 함정으로도 써.”
유나는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움직였지만 발아래 물웅덩이에 꽂힌 신발이 빠지지 않아 비틀거렸다. 그 짧은 틈에 육교 아래 그림자에서 사람 하나가 올라왔다.
검은 우산. 얼굴이 안 보이는 검은 코트.
우산 끝에서 새까만 실이 흘러내렸다. 실 끝마다 작고 흰 종잇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종이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나는 주머니에서 분필 한 토막을 꺼내 바닥에 원을 그렸다.
“원 안으로 들어와.”
“이거 오컬트입니까?”
“경고문이야. 놈들은 표시된 경계 안으로 바로 못 들어와.”
검은 우산이 멈췄다. 그러더니 종이쪽지를 하나 펼쳤다.
유나의 얼굴이 하얘졌다.
“왜요?”
“저건 네 이름이야.”
우산 아래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사람 목소리라기보다 오래된 녹음 파일을 재생하는 듯했다.
“차도겸. 미납된 기억 일곱 건. 회수 명령 확인.”
“기억을 잃기만 했는데 미납이라니. 세금도 이렇게 걷진 않습니다.”
“차도겸. 보관 대상. 귀환 대상 아님.”
유나가 내 손을 잡았다.
“도망쳐.”
우리는 원을 빠져나와 육교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공중의 빗방울이 몸에 맞을 때마다 손가락만 한 얼음처럼 따가웠다. 뒤에서는 종이 찢기는 소리가 계속 따라왔다.
나는 문득 질문했다.
“우리 예전에도 이렇게 도망쳤어요?”
유나는 앞만 보았다.
“아니.”
“그럼 이번이 처음이네요.”
“예전에는,” 유나가 숨을 골랐다. “네가 날 두고 도망쳤어.”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계가 00:00에 도달하기 직전, 유나는 내 손바닥에 열쇠 하나를 얹었다. 은색 열쇠에 숫자 37이 찍혀 있었다.
“내일 낮에 이 주소로 와. 시간이 멈추지 않았을 때.”
그녀가 주소를 속삭였다.
그리고 모든 소리가 돌아왔다. 빗소리와 경적과 사람들의 웅성거림.
육교 위에는 나 혼자였다.
손바닥에 은색 열쇠가 있었다.
그 열쇠의 끝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진서아의 것.’
그날 밤, 나는 내 열여섯 번째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수첩에는 다른 글씨가 한 줄 늘어 있었다.
『유나를 믿되, 그 여자가 널 지키려는 이유는 믿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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