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을 얻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세계 평화? 로또 번호 확인? 회사 대표실 금고 구경?
나는 화요일 오전 9시 12분에 인터넷 검색창에 이렇게 쳤다.
‘어머니 목소리가 갑자기 기억 안 날 때 병원’.
검색 결과는 모두 친절했고, 하나같이 내가 원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스트레스, 수면 부족, 신경학적 이상, 정신적 충격. 어느 항목에도 ‘저녁 6시에 세계가 멈췄다가 기억을 떼어 간다’는 설명은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어제 회식 때문에 조금 피곤했어. 생신인 건 알고 있었지.”
사실은 몰랐다. 통화가 끝난 뒤 달력에 표시된 ‘엄마 생신’을 보고 알았다.
선물을 주문하고, 사과 문자를 보내고, 화장실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거울 속의 나는 평소보다 피곤해 보였다.
“차도겸, 침착하자.”
거울이 말했다. 당연히 내가 한 말이었다.
나는 수첩을 샀다. 표지에 크게 적었다.
《오후 6시 사용 설명서》.
첫 장에는 확인된 사실을 적었다.
1. 오후 6시 정각에 바깥세상이 정지한다.
2. 나는 약 60분 동안 움직일 수 있다.
3. 정지가 끝난 뒤 현실 시간은 1초만 지난다.
4. 사람은 움직일 수 없지만 사물은 움직일 수 있다.
5. 사용하는 대가로 기억이 하나 지워진다.
6. 누군가 이 현상을 알고 있으며 메시지를 보낸다.
여섯 번째 줄에 밑줄을 세 번 그었다.
‘누군가’라니. 알림을 보낸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런 사람이 좋은 쪽에 속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적어?”
팀장 목소리에 나는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바로 다시 펼쳤다. 조금 전의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적지 않으면 언젠가 그 사람이 나라는 사실도 의심하게 될 것 같았다. 지워진 기억에는 제목을 붙일 수 없지만, 내가 지워진 기억을 잃었다는 날짜와 장소만은 남길 수 있었다. 내 인생을 정리하는 방법이 장애 보고서와 같아지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
“자기 계발입니다.”
“좋아. 그럼 이 개발도 좀 자기가 해 줘.”
이 사람의 모든 문장을 코드 리뷰에서 반려할 방법은 없을까.
점심에는 회사 근처 분식집에서 매운 떡볶이를 먹었다. 매운맛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려 할수록 어제의 목소리가 빈자리를 만들었다. 사람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게 아니라, 익숙함만 도려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찍은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속에서는 웃고 있었다. 저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했다. 하지만 목소리만 없었다. 영화에서 음성 트랙 하나를 제거한 것처럼.
퇴근 전에는 병원에도 들렀다. 의사는 내 눈동자 반응을 살피고, 몇 가지 단어를 외우게 했다. 사과, 기차, 파란색. 십 분 뒤 세 단어를 모두 말했더니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력 자체가 크게 떨어진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다만 특정 기억의 감각이 사라지는 경험이군요.”
나는 질문을 하나 골랐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만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까?”
“드물지만 특정 감각과 연결된 기억에 문제가 생길 수는 있죠. 정밀 검사가 필요합니다.”
차트에 적힌 ‘스트레스 관련 증상 의심’이라는 문구를 보며 나는 억울했다. 스트레스가 있다는 데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스트레스가 커피를 공중에 매달아 놓는 데까지 진화했다면 의료계가 그 사실을 알아야 했다.
병원에서 나오며 어머니에게 음성 메시지를 부탁했다. 별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어릴 때 불러 주던 노래를 녹음해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잠시 웃으시더니 오래된 동요를 불러 주셨다. 음정은 약간 흔들렸다. 나는 익숙하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음악 파일을 저장했다. 기억은 사라져도 기록이 남는다면 언젠가 감각을 다시 배울 수 있을지 몰랐다.
기억의 상실을 기록하는 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라진 것만 적으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지워졌다는 사실을 쓰는 데에도 기준이 필요했다. 어머니의 말을 알아듣고,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다. 친숙함이라는 감각만 비었다. 종이 위에서는 그 차이를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는 심리학 용어를 검색하다가 그만뒀다. 중요한 건 진단명이 아니라 변화의 경계였다. 앞으로 무엇을 잃는지 알아야 누군가가 내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추적할 수 있었다.
수첩의 두 번째 장에 표를 만들었다. 날짜, 정지 시작 시각, 종료 시각, 잃은 기억, 목격한 존재, 남은 물건. 나는 개발 프로젝트의 장애 이력서를 작성하는 것처럼 꼼꼼히 썼다.
그리고 맨 아래 이렇게 적었다.
‘기억을 찾으려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 것.’
이 규칙은 어떤 상황에도 수정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뒤 휴대전화 연락처를 따로 백업했다. 다이어리에서 가족 생일을 베껴 적고, 오래된 사진 몇 장을 인쇄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름과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한 줄씩 썼다.
‘엄마: 화나면 걱정부터 하시는 사람. 내가 못 먹고 다니는 걸 가장 싫어하신다.’
‘아버지: 돌아가심. 마지막으로 같이 걸었던 길은 집 앞 은행나무길.’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항목에서 펜이 오래 멈췄다. 기억에 가장 깊은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더듬는 기분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 나에게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오후 5시 58분, 나는 회사 앞 카페에 들어갔다.
작은 테이블에 수첩, 아날로그 주방 타이머, 손전등, 초콜릿 두 개를 올려놓았다. 직원이 괴상하게 쳐다봤다.
“캠핑 가세요?”
“비슷합니다. 생존 캠핑이요.”
5시 59분 59초.
나는 주방 타이머를 1분에 맞췄다. 딸깍.
6시.
또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굳었고, 스팀 노즐에서 뿜어져 나오던 흰 김이 안개 조각처럼 멈췄다. 주방 타이머도 정지했다. 손목에는 어제와 같은 낡은 시계가 돌아와 있었다.
59:59.
“좋아. 우선 기록.”
나는 수첩에 시계 숫자를 베껴 적었다. 잉크는 종이에 묻었고, 펜은 멀쩡했다. 정지 공간에서도 단순한 기계와 화학 반응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직원 뒤편에 보관된 현금은 손대지 않았다. 범죄자가 되는 게 내 꿈은 아니었다.
대신 카페 벽면의 포스터로 걸어갔다. 전날에는 없었던 전단이었다.
실종자를 찾습니다.
서른두 살 남성. 마지막 확인 시각 오후 6시 정각. 장소 강남역 인근. CCTV 이상으로 정확한 동선 확인 불가.
이상한 문구였다.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시각이 '오후 6시 정각'이라고 특정될 수 있을까. 나는 전단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휴대전화는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전단 아래에 있는 연락처까지 옮겼다. 실종자 가족이 직접 붙인 것인지 손으로 오려 붙인 테이프가 삐뚤었다. 누군가가 이 종이를 붙이며 얼마나 오래 주위를 살폈을지 생각했다. 시간이 멈추는 일이 내게는 실험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을 잃어버린 사건이었다.
종이를 만지자 전단 모서리가 나풀거렸다. 단순한 종이는 움직일 수 있다. 그걸 알고도 원래 자리로 꼼꼼히 붙였다. 실종 전단을 훼손하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수첩에 이름을 적었다.
‘김태오, 32세, 6시 실종.’
뒤를 돌다가 굳었다.
카페 유리문 안쪽에 손가락으로 쓴 듯한 글씨가 있었다. 성에가 낀 것도 아닌데, 맑은 유리 위로 하얀 문장이 또렷했다.
『오늘은 뒤돌아보지 마.』
방금 내가 들어올 때에는 없었다.
“누가 장난질이지?”
나는 본능적으로 뒤를 봤다.
뒷골목 끝, 검은 우산을 든 사람이 서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우산 끝에서 검은 액체 같은 것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무엇보다 그 사람은 멈춘 사람들과 다르게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저기요!”
검은 우산이 골목으로 사라졌다.
달렸다. 얼어붙은 오토바이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을 때 발목이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바닥에 줄 하나가 있었다. 검은 우산에서 흘러나온 듯한 먹빛 실이었다. 손끝으로 집으니 물도 천도 아닌 감촉이었다.
실이 내 손목에 감겼다.
순간 시계 숫자가 43:12에서 40:12로 뚝 떨어졌다.
“뭐야, 내 시간!”
나는 실을 끊어 던졌다. 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먼지처럼 풀렸다.
그때 골목 벽에 또 글씨가 나타났다.
『뒤돌아보지 말랬잖아.』
나는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네모난 거울 간판에 뒤가 비쳤기 때문이다. 카페에 있어야 할 흰색 앞치마의 직원이 내 등 뒤에서 손을 뻗고 있었다. 손가락들이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얼굴은 여전히 카페를 향한 채였다.
나는 엎드렸다.
손끝이 내 머리카락을 스쳤다. 등 뒤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스르륵, 스르륵.
“뭔데!”
수첩을 던졌다. 수첩은 그것의 얼굴 없는 목 부분에 부딪혀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길가의 주차된 차에 기대었다. 시계는 25분을 가리켰다.
그 순간 저 멀리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딱. 딱. 딱.
세 번. 누군가가 내가 멈춰 선 방향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소리가 난 곳에는 작은 지하철 출입구가 있었다. 입구 유리벽에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살고 싶으면 움직이지 말고 숨을 세 번 쉬어.]
손글씨였다.
나는 그대로 했다. 하나, 둘, 셋.
위쪽에서 바람이 스쳤다. 아까 그 긴 손가락이 내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걷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움직임을 감지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메모지 뒷면을 확인했다.
[기억은 머릿속에만 두지 마. 누군가는 네가 무엇을 잃는지 보고 있어.]
소름이 돋았다.
남은 시간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가 0이 되자 골목은 다시 사람들의 발소리로 가득 찼다.
수첩을 펼쳤다. 마지막 줄에는 아까까지 없던 내 필체가 적혀 있었다.
‘내가 어제 산 수첩의 비밀번호: 0613.’
나는 수첩에 비밀번호를 설정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무엇의 비밀번호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워졌다.
이번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갔던 바닷가의 기억이었다. 차가운 물, 손에 쥔 조개, 웃던 사람들. 존재했던 사실만 남고 장면 전체가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수첩 맨 뒤쪽 빈 페이지에 낯선 글씨가 쓰여 있었다.
『0613은 네가 정한 숫자가 아니야. 진서아가 남긴 날짜야.』
진서아.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그 이름을 읽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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