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남긴 메시지는 여덟 글자보다 훨씬 무거웠다.
'문을 처음 연 사람은 나 아니다.'
나는 0호 병실의 벽을 오래 바라봤다. 관측 책임자 차정수, 기록 보호자 윤혜정. 두 사람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최초 개설자'라는 자리는 비어 있었다. 누군가 모든 서류에서 그 이름을 지운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왜 살아 있는 것처럼 메시지를 보냈을까요?" 내가 물었다.
유나가 머뭇거렸다.
"보관국 안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이 남긴 순간이 움직일 수 있어. 네가 봤던 어린 시절의 어머니처럼."
"그러면 이걸 아버지가 방금 보냈다고 볼 수는 없겠군요."
"응. 누가 남겨 놓은 기록이 오늘 열렸을 수도 있어."
기혁은 병실을 촬영하고 우리가 본 장치를 원상태로 뒀다. 현실 수사에 남길 수 있는 것은 현장의 상태와 사람들의 진술이었다. 이상한 장치를 마음대로 떼어 가는 순간 오히려 증거를 망칠지도 몰랐다.
우리가 별관 밖으로 나왔을 때 밤 열 시가 넘었다. 병원 옆 벽면에는 작은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아이가 어른의 손을 잡고 걷는 그림이었다. 낙서로 보였지만 그림 아래에는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기억하지 않아도 놓지 않는다.'
나는 저 글을 왜 익숙하게 느끼는지 생각했다. 내 어머니가 기억을 잃은 채 내 손을 놓지 않았던 오후가 떠올랐다.
"형사님. 어머니한테 가 봐야겠습니다."
"동행하죠. 오늘은 쉬지 못할 것 같군요."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기혁은 오재민의 의료 기록을 잠깐 설명했다. 개인적인 내용은 상세히 말하지 않았다. 다만 몸의 상태와 공적 서류의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해 주었다. 이 사건이 해결되더라도 남은 생활은 쉽게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피해자들이 보관국을 떠나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말했다.
"돌아오고 나서 시작되는 일이 많죠." 형사가 대답했다. "주민등록 기록을 확인해야 하고, 실종 기간 동안 생긴 채무나 계약도 살펴야 합니다. 가족이 만나 주길 원해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기다려야 하고요."
그는 남하린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병원 복도에서 여전히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낯선 남자가 자기 곁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보았다고 했다. 그녀는 형사에게 예전 사진을 강제로 보여 주지 말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기혁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형사님은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요. 하지만 제 아내가 돌아왔다고 해서 예전 아내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그는 잠깐 앞유리를 바라봤다.
"다만 그 사람을 이렇게 만든 쪽에는 책임을 묻겠습니다."
나는 수첩을 펼쳤다. 귀환 완료라는 상태를 표시해 둔 항목들 옆에 '지속 지원 필요'라고 적었다. 소프트웨어에서는 완료 버튼 하나로 일이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의 삶에서는 그런 버튼이 없다. 사건이 끝나도 수십 개의 작은 문제가 남는다. 그 문제를 다룰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귀환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유나는 재민과 통화했다. 그는 누나에게 병원에서 제공한 식사가 맛없다고 불평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던 떡볶이집이 아직 있는지 물었다. 유나는 당연히 있다고 답하려다가 멈췄다. 십 년이 넘는 동안 가게가 그대로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없으면 새로 찾아보자." 유나가 말했다. "네 입맛에 맞는 집은 많을 거야."
"누나, 그 말 좋다. 자꾸 옛날로 돌려놓으려고 하지 마. 나는 지금 여기 있으니까."
통화가 끊기자 유나는 눈물을 닦았다. 나는 모르는 척 창밖을 바라봤다. 도로 위의 신호등은 평범한 간격으로 바뀌고 있었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누군가에게는 다음 걸음을 내딛을 기회가 생긴다. 너무 오랫동안 정지된 세계를 다녀서 그런 단순한 사실조차 새로웠다.
그리고 집 앞에서 나는 유나에게 부탁했다.
"엄마가 절 알아보지 못해도 서운한 티 내지 않을게요. 대신 어머니한테 위험한 계약서를 보여 주고 강제로 선택시키는 사람을 찾으면, 그땐 참지 않겠습니다."
"나도 같이할게." 그녀가 말했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 밥을 두 공기 차려 놓았다. 내가 문을 열자 그녀는 잠시 낯선 표정을 지었다.
"누구세요?"
"도겸이에요. 오늘 낮에 왔던 사람이요."
"아…… 경찰이란 분이랑 같이 오셨죠."
어머니는 옆 사람을 바라봤다. 기혁은 신분증을 보여 줬다.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먹었어요?"
그 물음에 목이 메었다. 이름과 얼굴을 잊어도 밥을 묻는 말은 남았다. 나는 '먹었다'고 거짓말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요."
"그럼 앉아요. 모르는 사람한테 밥을 주는 건 좀 이상하지만, 이상하게 당신은 굶기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는 된장국을 데워 내왔다. 내 앞에 국그릇을 놓는 손짓이 익숙했다. 내가 왼손잡이가 아닌 걸 알고 숟가락을 오른쪽에 두었다. 그 사실을 기억이 아니라 습관으로 아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해 여쭤봐도 돼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편 얘기요?"
"네. 차정수라는 사람."
어머니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모르면서도 그 이름에는 분명 반응했다.
"정수 씨는 시계를 좋아했어요."
"시계요?"
"고장 나면 버리지 않고 뜯어 봤죠. 어느 날은 병원에서 일하고 돌아와서 하루 종일 손을 씻었어요. 손에 묻은 게 없어졌는데도 계속 씻었죠."
"그게 언제였어요?"
어머니는 벽을 바라봤다.
"오래전 6월. 비가 엄청나게 왔던 날이에요."
나는 조심스럽게 6월 13일이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오른쪽 손목을 잡았다. 시계줄 자국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네 손목은 왜 이렇게 차갑니?"
낯선 남자에게 하는 말치고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기혁이 거실에서 형광등 스위치를 살폈다. 전등은 세 번 깜빡였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장치는 없는데도 집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손등에는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어릴 때 부엌에서 데인 것 같은 작은 흉터였다. 나는 그 흉터에 얽힌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손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수없이 나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 사실은 어떤 문서보다도 오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록보다 더 필요한 건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손을 꽉 쥐는 대신 그분이 먼저 놓을 수 있도록 조금 힘을 풀었다. 지킨다는 이유로 붙잡아 두지 않는 법을 요즘은 뒤늦게 배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 손을 빤히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손목의 시계 자국을 보고 다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에게도 기억의 빈칸이 아팠을 것이다. 내 기억을 되찾겠다고 그분에게 자꾸 고통스러운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멈추고 국을 한 숟갈 먹었다. 식탁에서는 한동안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오랜만에 마음이 조용했다.
그분이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따뜻한 손은 그대로였다. 나는 지금 기억나는 사실과 모르는 사실을 구분하려 애썼다. 어머니의 생일도, 좋아하는 노래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분명했다. 당장 모든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욕심을 내려놓자 오히려 그분의 표정을 오래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손을 빼지 않은 채 말했다.
"어릴 때 우리 아이도 여기 흉터가 있었어요. 비 오는 날 병원에서 데려왔을 때."
나는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병원에서 데려왔다고요?"
"아니, 이상하네. 집에서 태어났는데…… 아니 병원에서…… 나는 왜 자꾸 둘 다 맞는 것 같지?"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기억이 삭제된 사람이 모순된 사실에 부딪힐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기억을 강제로 꺼내려다 고통을 주면 구태형과 다를 게 없다.
"괜찮아요. 오늘은 여기까지요."
어머니는 손목을 만지던 손을 멈췄다.
"아니다. 하나 기억나요."
나는 숨을 죽였다.
"그날 정수 씨가 내게 무슨 말을 했어요. 아이를 데려오면 원래 있던 아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그러니 이름부터 부르지 말라고."
"왜요?"
"모르겠어요.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가만히 앉았다. 그러니까 이 시스템은 내 이름을 지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위치가 확인되고, 그 위치로 추심이 도착한다. 오래전 아버지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대전화에 문자가 들어왔다. 남하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감사합니다. 형사님이 저를 기억하게 하려고 애쓰지 않기로 하셨어요. 대신 같이 사진을 보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어요.'
나는 문자를 어머니에게 보여 줬다. 어머니는 그 내용을 천천히 읽더니 웃었다.
"그 사람들 잘하네요. 지나간 걸 억지로 잡지 않고 같이 살아가는 거잖아요."
갑자기 거실 벽시계의 초침이 멈췄다. 오후 열 시 십칠 분이었다. 창밖의 차들은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정지된 건 우리 집 벽시계 하나뿐이었다.
그 아래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종이 봉투가 붙어 있었다.
'당신이 차도겸이라고 증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 아이가 누구였는지는 확인해야 한다.'
서명은 차정수.
나는 봉투를 열었다. 안쪽에는 오래된 가족사진 두 장이 있었다. 첫 번째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어린 내가 보였다. 두 번째에는 같은 날, 같은 자리, 같은 옷을 입은 가족이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사진 속 아이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내 옷을 입고 웃고 있었다. 눈 밑에 조그만 흉터가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낡은 필체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돌아온 아이에게 진실을 말하지 마.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가 남아 있다.'
어머니는 내가 쥔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내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당신을 어디서 봤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어디에서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꿈에서 매일 문을 열어 줬던, 그 아이와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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