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하나 기억해 버렸다고요?"
나는 휴대전화를 조금 멀리했다가 다시 귀에 댔다. 어느 날부터인가 중요한 전화를 받는 순간 손목이 먼저 차가워졌다. 상대의 말을 잊을까 두려워서였다. 이번에는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록을 남긴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허락 없이 보관하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화기 너머의 진서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기다렸다. 마치 그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계산하는 사람 같았다.
"네가 아닌 사람의 기억을."
"그게 뭡니까?"
"다른 사람 목소리로 네 이름을 처음 들은 날."
평범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목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었다. 누군가 처음 불렀다는 사실이 이렇게 중요한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다.
"서아 씨, 지금 어디에 있어요?"
"오재민 옆.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아이를 다시 데려갈 거야."
"재민이는 아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정지 세계에서 시간이 흘렀다고 하던데."
"알아. 그래서 더 조심하는 거야. 멈췄던 시간만큼 사람을 어린애 취급하면, 그건 다른 방식의 감금이니까."
그 대답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진서아를 조금 알게 해 주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말로 그 사람의 선택을 빼앗지 않았다.
"서아 씨.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준비해. 지금 만나는 순간 네 기억에서 또 하나가 지워질 거야."
"무엇이요?"
"그건 나도 몰라. 보관국이 우리 둘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고 매번 다른 걸 골라 갔거든."
나는 수첩에 적었다. '서아와 만나면 기억 징수 가능성. 재민은 보호 대상이지만 결정권 있음.' 적고 나니 우스웠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출입 절차와 위험 분석까지 해야 하는 연애라는 게 존재할까. 우리는 과거에 어떤 사이였을까.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조차 그녀에게 실례 같았다.
"열어선 안 되는 로그가 있다고 했죠?"
"응. 정확히는 읽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어. 그 장치에는 기록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기록으로 바꾸는 구형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
나는 손에 든 금속 장치를 내려다봤다. 구멍 두 개에서 빛이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면 문석 선임이 왜 줬겠습니까?"
"그 사람은 원본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어. 하지만 누구를 희생하지 않고 읽는 법은 모를 거야."
유나가 전화를 받아 들었다.
"서아. 문석 씨를 어디까지 믿어도 돼?"
"네가 그를 믿는 한, 그 사람은 절대 너한테 모든 걸 말하지 않을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유나도 한동안 침묵했다.
통화는 그걸로 끝났다. 차를 세운 남기혁 형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직접 만나는 건 보류하죠. 위험하다고 스스로 말했으니까요."
"대신 로그를 확인하겠습니다. 읽지 않고 검증할 방법이 있어요."
나는 노트북을 껐다. 구형 저장장치의 구멍에 저전력 센서를 연결했다. 장치에 저장된 내용을 복원하지 않고, 언제 신호가 발생하는지와 주기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회사에서 디버깅할 때도 간혹 이런 짓을 했다. 원인이 되는 데이터에 직접 접근하면 장애가 더 커지는 시스템이 있었으니까.
장치는 여섯 번, 일곱 번 빛났다가 13초 동안 멈췄다.
새로운 주기였다. 수첩에 점멸 시간을 기록한 나는 낡은 인쇄소의 청사진을 펼쳤다. 37번 우편함이 있던 통로와 비상 퇴근 버튼의 위치가 겹쳐졌다. 두 곳 모두 현실의 건물 도면에는 표시되지 않은 자투리 공간이었다.
"이곳은 장치의 주소가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손잡이예요."
형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람을 선택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집에 초인종을 누를 때 초인종 자체가 사람을 데려오는 건 아니잖아요. 신호를 듣는 사람이 문을 열어 주죠. 이 장치도 내용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특정 기억을 가진 사람에게 반응하는 거예요."
"그럼 누구의 기억을요?"
나는 대답 대신 장치를 어머니의 사진 가까이 가져갔다. 아무 변화도 없었다. 아버지의 낡은 시계를 찍은 사진에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수첩에 적힌 한 문장 앞에서 빛이 바뀌었다.
'선택하지 마. 둘 다 거짓말이야.'
장치가 짧게 두 번 울렸다.
"서아의 글씨에 반응하네요." 유나가 중얼거렸다.
"아뇨. 글씨가 아니라 제 기억과 연결된 무언가에 반응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펜으로 종이에 같은 문장을 다시 썼다. 아무 변화가 없었다. 복사기로 원래 문장을 복사해도 반응이 없었다. 종이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서아가 직접 쓴 순간이 남아 있군요." 형사가 말했다.
그는 원본 수첩을 흔들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만약 감정이나 기억의 흔적이 데이터라면, 그 기록을 열지 않아도 사건이 있었다는 증거는 되겠네요."
나는 웃었다.
"형사님, 이쪽에 소질 있으십니다."
나는 수첩에 남은 여백을 펼쳐 지금까지 확인한 사실과 가설을 나눠 적었다. 확인된 것은 네 가지였다. 시간 정지가 있었고,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관됐고, 구태형의 조항에는 문제가 있었고, 현장에 남은 물증 일부가 현실에서도 확인됐다. 반면 강문석의 의도, 최초 개설자의 정체, 사진 속 다른 아이에 대해서는 아직 추측뿐이었다.
이렇게 쓰고 나니 조금 안정이 되었다. 공포는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취급할 때 더 커진다. 나는 모른다고 적는 순간 비로소 다음 질문을 할 수 있었다.
"형사님, 기록이 사람을 바꾸는 상황에서도 증거가 될 만한 건 뭡니까?"
기혁은 한참 생각했다.
"서로 독립된 경로의 기록이겠죠.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는 것보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남겨진 정보가 맞아떨어지는 게 중요할 겁니다."
"그러면 제 수첩만 복사한다고 해결되지 않겠네요."
"맞아요. 당신이 모든 기록의 출처라면 한 번만 속아도 나머지가 전부 흔들립니다."
나는 그 말에 마음이 걸렸다. 매번 기억을 잃을 때마다 미래의 나에게 남기는 수첩을 가장 믿어 왔다. 그런데 처음에 적힌 내용이 거짓이라면? 내 필체라고 믿는 글씨가 누군가의 손에서 나왔다면? 증거를 저장하는 것과 증거를 믿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유나가 책상 구석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예전에 내가 맡겨 놓은 것이라고 했다. 안에는 마트 영수증, 버스표, 다 쓴 건전지가 있었다. 아무 관련 없는 잡동사니 같았다.
"왜 이런 걸 모았죠?"
"네가 처음 정지 시간에서 돌아왔을 때 그러더라. 거대한 비밀은 위조하기 쉬워도 사소한 생활은 위조하기 어렵다고. 사람들이 오늘 무슨 말을 했고 어디서 밥을 먹었는지 남겨 놓으라고."
나는 버스표를 들여다봤다. 뒷면에 작게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검증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과거의 나는 이미 자신을 믿지 말라는 경고를 남겼던 것이다.
"이거 누가 줬는지 기억해요?"
"너. 다만 어느 번째 너였는지는 모르겠어."
나는 봉투를 다시 봉인했다. 앞으로는 내 말조차 사실과 가설로 분리해야 한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기억이 가장 정확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생사가 달린 사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모두 움찔했다. 문밖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컴퓨터 수리 맡긴 사람입니다. 불 좀 켜 주시겠어요?"
그는 작업실의 주인이었다. 형사가 문을 조금 열었다. 남자는 안을 들여다보고 나를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어? 아까 그 직원 아닙니까?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청구가 집행된 흔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주머니에서 종이 영수증을 꺼냈다.
"아까 여기에 적어 뒀어요. 당신이 소중한 물건 잃어버릴까 봐."
영수증에는 차도겸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잠시 후에도 잉크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종이를 만져 봤다. 보관국이 건드리지 않은 보통 영수증이었다.
"제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데, 왜 이걸 남겼습니까?"
"아까 그 여자가 부탁했거든. 자기가 멀리 가면 당신이 혼자 있을 거라고."
"어느 여자요?"
"저기, 목에 은색 열쇠를 매달고 있던 사람."
유나가 자신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열쇠 37번. 그녀는 여기 들어오면서 목걸이를 안 했다. 그런데 작업실 주인은 다른 여자를 보았다고 했다.
"그 여자 얼굴을 설명해 주세요."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이름을 잊어버렸는데도, 아주 오래 아는 사람 같더군요. 검은 우산을 접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산 손잡이가 반대로 꺾여 있었습니다."
서아가 전화에서 경고한 것이 떠올랐다. 직접 만나는 순간 기억이 지워진다고. 하지만 그녀는 내게 접근한 적이 없었다. 접근한 사람은 다른 존재였다.
기혁이 창밖을 살폈다. 맞은편 편의점의 CCTV 화면에 검은 코트의 사람이 어른거렸다.
"구태형입니까?"
"아뇨." 유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구태형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수금자야."
작업실 주인은 자신이 쓴 글씨를 멀뚱히 바라봤다. 몇 분 전 누구에게 부탁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종이 안의 글자는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자기 글씨가 맞다고 했다. 나는 날짜와 시각, 종이의 접힌 모서리까지 촬영해 두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에게 기억을 강요하지 않는 일이었다. 영수증 한 장을 썼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때 그가 친절하게 행동했다는 사실까지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그는 우리에게 캔커피 세 개를 내밀었다. 감사하다는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 작은 일상적인 친절에 나는 한동안 마음을 놓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름을 되찾는 일보다 지금 이 순간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믿어 주는 사람이 먼저 필요했다.
나는 영수증을 뒤집었다. 뒷면에는 여자가 남긴 글씨가 있었다.
'너를 잊는 사람을 탓하지 마. 그들이 잊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네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야.'
그리고 그 밑.
'0번 보관실을 처음 연 사람은 오늘 밤 너를 만나러 온다.'
작업실 전등이 한 번 깜빡였다. 저녁 8시 13분이었다.
손목의 멈춘 시계가 느닷없이 움직였다.
[초대장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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