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형의 옛 출입증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무슨 장난인지 알 수 없었다. 구태형이라는 남자의 얼굴, 차도겸이라는 이름. 그 아래에는 지금 내 사번과 같은 숫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신분을 도용한 겁니까?”
구태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누구 이름을 빌린 건지는 조사가 끝나야 알겠지.”
“당신 이름이 구태형이라는 증거는 있습니까?”
“많죠.”
“그럼 제 이름이 차도겸이라는 증거도 많습니다. 이름표 하나로 사람을 지울 수는 없어요.”
그는 웃음을 멈췄다.
나는 출입증의 사진을 한 번 더 봤다. 기묘하게도 카드 모서리에는 마모된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오랜 시간 사원증 목걸이에 매달고 다녔던 물건처럼. 그렇다면 그냥 구태형이 내 이름을 위조해 넣은 종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 이름을 처음 쓴 사람이 당신인지, 원본인지, 저인지는 나중에 따지겠습니다.”
나는 카드를 수첩 속에 끼워 넣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문제에 카드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유나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아마도 원래 내가 이런 말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지금에 와서 달라진 건지 판단하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모르겠다. 기억이 없어져서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이제 나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구태형은 내 수첩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 37번 우편함 너머에서 원본이 말했다.
“그걸 알아야 했어. 네가 이름을 증명하려 들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남는다는 걸.”
나는 그의 목소리에 화가 났다.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말해 주지 그랬어요!”
“말해도 소용없었어. 이전 여섯 번은 네가 다른 차도겸이라는 주장에 매달렸거든. 네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어떤 서류를 갖고 있는지 증명하다가, 결국 구태형이 가진 원본 서명에 졌지.”
일순간 머리가 차가워졌다.
지금까지 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데 집착했다. 그 기억들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잊어도 우리는 여전히 모자였고, 남하린이 남편을 잊어도 기혁 형사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름과 기억만으로 사람의 권리가 결정될 수는 없었다.
“서기관.”
나는 그를 불렀다.
“이 감사의 대상이 계약서 내용입니까, 아니면 계약을 핑계로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한 행위입니까?”
그는 잠시 침묵했다.
“둘 다 심리 대상입니다.”
“그럼 저 출입증은 상관없습니다. 구태형이 무슨 이름을 썼든, 김태오 씨가 원치 않는 보관을 당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서기관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주장을 계속하십시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주워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인식자 전원’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구태형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제 어머니를 지웠고, 남 형사의 아내를 가뒀고, 오유나 씨 동생의 기억을 안전장치로 썼어요. 그리고 지금 감사 중에 증인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구태형이 금속판을 들어 올렸다.
“그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네.”
나는 남기혁 형사를 돌아봤다.
“형사님. 전부 기록하셨죠?”
“물론입니다.”
남 형사의 손목 숫자가 01:49를 가리켰다. 그는 종이 수첩을 펼쳤다. 김태오의 진술, 남하린의 귀환 의사, 오재민이 안전장치로 사용된 정황. 전부 형사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운영 승인자 구태형, 심리 도중 비상 회수 장치 사용.’
그가 문장을 읽자 서기관 앞의 책상에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감사 증거 접수 완료.]
[운영권 회수 시도, 심리 방해로 판정.]
[별첨 계약의 효력 잠정 정지.]
금속판이 구태형의 손에서 떨어졌다. 검은 실이 거칠게 흩어졌다.
“잠정?”
나는 서기관에게 물었다.
“영원히 정지시키는 건 아니군요.”
“최종 감사가 완료되어야 합니다. 현재는 긴급 보호 명령만 가능합니다.”
나는 처음 보관실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수백 개의 서랍, 사람의 이름, 영수증처럼 적힌 기억. 그때 나는 자기 이름이 적힌 서랍만 찾았다. 내게 중요한 건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뿐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김태오의 말, 남하린의 떨리는 목소리, 오재민의 ‘나가고 싶다’는 한마디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구해도 내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들이 자신의 다음 하루를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장부에 적힌 세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서기관은 김태오의 병을 가리켰다.
“피해자 본인의 귀환 의사가 확인된 세 항목은 원칙적으로 회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다만 몸과 기억의 위치가 분리된 경우, 현실 귀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 절차를 누가 승인하죠?”
“신청자와 본인입니다.”
나는 구태형을 바라봤다. 그는 처음으로 피곤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두려운 듯했다.
“당신 서명은 필요 없다네요.”
유나가 재민의 그림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림자 안쪽에서 작은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방 한쪽 벽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귀환 대상 보관실 연결.]
그 안에는 병원 침대처럼 생긴 장치들이 줄지어 있었다. 오래된 유리관과 가느다란 전선.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숨이 막혔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 있는 몸인지, 기억의 흔적인지 당장 구별할 수 없었다.
유나는 세 번째 침대를 향해 달려갔다.
“재민아!”
침대에는 청년이 누워 있었다. 유나의 기억에 남은 어린 소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두 눈은 감겨 있었지만 심장 쪽 장치에는 일정한 파형이 흐르고 있었다.
“재민이 맞아?”
그녀가 물었다.
청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힘겹게 입술이 벌어졌다.
“누나…….”
유나가 무너져 울었다.
나는 그들을 잠시 내버려 두었다. 사람을 되찾는 순간에는 구경꾼이 필요 없다.
반대편 침대에서는 김태오가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출입문이 어디냐고 물었다. 일곱 달 동안 갇혔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거였을 것이다.
남 형사는 네 번째 침대에서 아내를 찾았다.
“하린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혁이……?”
그의 눈이 커졌다.
“기억나?”
“얼굴은 잘 모르겠어.”
여자가 힘겹게 웃었다.
“근데 그 이름을 불러 보니까, 자꾸 울고 싶어.”
남 형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 한쪽이 아팠다. 사람을 돌려보냈다고 해서 잃어버린 시간이 모두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구해 낸 사람들 역시 살아남은 뒤의 삶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때 서기관이 말했다.
“보관실의 귀환 문은 현실과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정지 종료 시 외부에서 확보된 의료 지원 지점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귀환 승인자는 이름과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김태오, 남하린, 오재민. 세 사람을 본인 의사에 따라 현실로 돌려보냅니다.”
세 침대 아래에 하얀 선이 생겼다. 유나가 재민의 손을 꼭 쥐었다.
“잠깐.”
남 형사가 말했다.
“나 이 안에 얼마나 더 있을 수 있죠?”
손목 숫자는 00:49.
나는 서기관에게 물었다.
“증인도 같이 보낼 수 있죠?”
“증인 입장권은 본인이 귀환 의사를 표시하면 즉시 종료됩니다.”
“그럼 형사님부터.”
남 형사가 아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밖에서 기다릴게.”
그는 문을 향해 걸었다. 문턱을 넘기 직전 나를 돌아봤다.
“차 씨, 당신도 나와요.”
“저는 확인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남 형사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꼭 사건 보고서 마지막에 이름이 올라갑니다.”
“살아서 보고서 읽으러 갈게요.”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이 흰 문 너머로 사라졌다. 손목의 검은 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유나와 나만 감사실에 남았다. 김태오와 다른 두 사람의 귀환 절차가 시작됐고, 세 침대는 빛이 점점 밝아지는 통로를 따라 사라졌다. 구태형은 그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나는 서기관을 바라봤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정지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통과하는 사람이 세 명이나 생겼으니, 밖에 있는 사람에게 안전한 인계 장소가 필요했다. 나는 남 형사의 수첩에 적힌 연락처를 확인했다. 이미 그가 응급 의료 지원을 준비해 뒀다는 메모가 있었다. 형사가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움직였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서기관. 현실 귀환이 완료되면 누가 인수합니까?”
“외부에 등록된 수신자가 인수합니다.”
“등록된 수신자가 없으면요?”
“귀환 절차가 대기 상태로 전환됩니다.”
나는 서류에 기혁 형사의 이름을 적었다. 김태오에게는 법적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공적 보호를 요청하고, 남하린은 기혁 형사를, 오재민은 유나가 직접 인계하기로 했다. 서기관은 본인 동의 기록을 확인한 뒤 각 항목에 작은 도장을 찍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서류가 사람을 지키는 도구가 되는 걸 보았다.
나는 세 침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유나는 재민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어떤 시간을 잃었든, 밖에서는 다시 아침을 맞고 비 오는 날을 걷고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건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갈 시간을 돌려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원본도 구할 수 있습니까?”
“현재 감사에는 원본의 강제 말소 금지 명령이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본을 현실로 돌려보낼 권한은 별도입니다.”
“그 권한이 누가 있죠?”
서기관이 37번 우편함을 가리켰다.
“0번 보관실의 최초 개설자.”
“구태형이요?”
“아닙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 순간 우편함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낡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6월 13일의 내가, 진서아가, 강문석이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사람.
얼굴이 지워져 있었다.
사진 뒷면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제6시 보관국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진서아가 아니다.’
나는 사진을 뒤집었다. 문장은 한 줄 더 있었다.
‘발견자의 신원은 여덟 번째 기억 징수에 동의한 뒤 열람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손목시계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정지 종료 예정까지 42분 11초.]
[감사 긴급 보호 종료. 잔여 시간은 신청자의 자율 선택.]
[다음 청구서가 발행되었습니다.]
청구서에는 돈 대신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차도겸.
그리고 그 아래.
[청구 대상: 당신이 차도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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