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민이라고 적힌 유리병이 깨지자, 감사실의 바닥이 새까맣게 변했다.
검은 실들은 물처럼 흘렀지만 물은 아니었다. 실 끝마다 손톱보다 작은 종이 조각이 매달려 있었고, 거기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익숙한 이름을 몇 개 보았다. 김태오, 남하린, 그리고 이름조차 흐릿해진 사람들.
감사실 천장에서는 무언가 미세하게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쥐가 뛰어다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소리의 간격이 사람이 종이를 넘기는 리듬과 같다는 걸 알아챘다. 기록이 움직이고 있었다. 방에 있는 물건들은 우리를 포획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원래 사람의 기억을 분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였다.
그 장치에 잘못된 명령이 입력되면 기록은 사람을 찾는 사냥개가 된다. 나는 소프트웨어를 잘 아는 대신 초자연적인 것을 전혀 몰랐지만, 잘못된 명령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위험해지는 상황은 지나치게 익숙했다.
“저 실 끝에 붙은 이름표를 잘라 내면 안 됩니까?”
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떼면 기억의 주인을 찾을 수 없어. 그럼 진짜로 돌아가지 못해.”
“그러면 함부로 지우는 것보다 묶인 사람을 먼저 확인해야겠군요.”
유나가 허리를 낮춰 달려갈 준비를 했다. 검은 우산을 펼쳐 실을 막았다. 우산 안쪽에 매달린 이름표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도겸, 남 형사님 데리고 문 쪽으로 가!”
“그럼 유나 씨는요?”
“재민이가 아직 저 안에 있어!”
그녀가 깨진 병을 가리켰다. 실이 쏟아지는 바닥 한가운데 어린 남자아이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나이를 먹은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나.”
그림자가 불렀다.
“나한테 오지 마.”
유나의 발이 멈췄다.
“왜?”
“나는 여기 갇힌 게 아니야.”
그 말에 구태형이 웃었다.
“이제야 말을 듣는군. 오재민 씨는 우리 시설의 핵심 안전장치입니다. 보관국이 무너지면 저 아이부터 사라져요.”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미성년자를 안전장치로 썼다는 말입니까?”
“우리 시스템이 무너질 상황이었습니다.”
구태형은 여전히 정중하게 말하려 애썼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가 회사의 위기 대응 회의를 진행하는 임원처럼 보였을 것이다. 다만 회의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검은 실이 너무 많아서 누구도 그를 평범한 임원으로 착각할 수 없었다.
“그 아이 덕분에 많은 사람이 구조됐습니다.”
“어떤 사람이요?”
“사고 직전에 시간을 되찾은 사람들. 마지막 한순간을 다시 선택한 사람들. 그런 사례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 사례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다만 선택권도 없는 아이 한 사람을 붙잡아 두는 게 그 사람들을 돕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묻는 거예요.”
구태형이 대답하지 못했다.
오재민의 그림자는 우리 말을 듣고 있었다. 소년은 한참 뒤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내가 하겠다고 했어.”
유나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누나가 돌아오는 동안 잠깐 기다리는 줄 알았어. 두세 시간 정도면 된다고 했거든.”
그 말에 유나는 무릎을 꿇었다.
“재민아. 그땐 네가 어렸잖아.”
“응. 그래서 내가 무슨 일에 동의하는지도 몰랐어.”
소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뒤에 나가고 싶다고 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어.”
나는 그제야 아이가 보호받아야 할 이유를 이해했다. 처음에 잠깐 돕겠다고 말한 것과 영원히 갇히는 데 동의한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리고 설령 성인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오재민 씨. 이제 직접 말해요.”
내가 말했다.
“나가고 싶다고요. 다른 사람한테 허락받을 필요 없습니다.”
소년은 검은 실이 움직이는 바닥을 보았다.
“나가고 싶어.”
그 말과 함께 실 몇 가닥이 흩어졌다.
“그때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 소리 좋아하시네요. 어른들이 아이한테 못 할 짓을 할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이죠.”
구태형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들도 저 시설 덕분에 목숨을 구했잖아요!”
“누구 목숨을요?”
나는 물었다.
“지금 여기서 김태오 씨는 여섯 번이나 구해 달라고 했대요. 남하린 씨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고요. 그 사람들을 시설 부품으로 만들면서 누구를 구했다는 겁니까?”
구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실이 우리의 발목까지 밀려왔다. 남 형사가 내 팔을 붙잡았다.
“차 씨, 저 녀석이랑 말싸움할 때가 아닙니다.”
나는 장부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방 안은 정신없이 흔들렸지만, 구태형은 아직 서류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 사람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회계 장부를 지키는 종류의 관리자였다. 불이 꺼지자 종이 위의 이름표들이 더 밝게 보였다. 실들은 생명체라기보다 서류에서 떨어진 판정 결과 같았다.
“형사님, 오른쪽에 김태오 씨 이름이 적힌 실이 있어요.”
남 형사가 고개를 숙였다. 실 하나가 그의 구두에 붙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종이가 손가락에 들러붙었다.
“제 아내 이름도 있군요.”
“그걸 억지로 뜯지 마세요. 아까 유나 씨가 말했잖아요. 기억까지 찢길 수 있다고.”
“그럼 어떻게 하죠?”
나는 서기관을 돌아봤다.
“자기 의사 확인 절차가 있다고 했죠? 이 사람들에게 하나씩 물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심리 대상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확인하십시오. 이게 당신 규정을 지키는 방법이잖아요.”
서기관은 한참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진술이 가능한 주체의 의견은 접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랍의 문서가 아니라 실 끝에 달린 이름을 바라봤다. 누군가를 구하려면 먼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된다. 얼마나 당연한 말을 여기 와서야 배운 건지 씁쓸했다.
나는 장부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남 형사의 왼팔 아래에 끼워져 있었다. 바닥으로 실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는 장부를 놓지 않았다. 일단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무언가를 끝까지 붙잡는 데 능숙한 모양이었다.
“형사님. 김태오 씨 진술이 적힌 페이지요.”
그는 책장을 넘겼다. 종이 위에 남 형사의 필체가 있었다.
‘김태오: 본인 기억 보관에 동의한 사실 없음. 귀환 원함.’
그 문장을 읽자 눈앞의 실 한 가닥이 끊어졌다.
“효과가 있어요!”
나는 소리쳤다.
“피해자들이 직접 거부하면 묶인 게 풀리는 것 같습니다.”
서기관이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인정합니다. 별첨 계약의 유효성이 심리 중입니다. 동의가 확인되지 않은 항목의 강제 보관은 정지되어야 합니다.”
구태형이 그를 노려봤다.
“당신 누구 편이야?”
“규정의 편입니다.”
서기관은 태연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희망이 생겼다. 우리는 보관국 전체와 싸우고 있었지만, 보관국을 움직이는 규칙 가운데 최소한 하나는 아직 구태형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남하린 씨는요?”
남 형사는 두 번째 병을 집어 들었다. 병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안쪽에서 여자가 손을 뻗었다.
“하린아. 나 여기 있어.”
“누구세요?”
“당신 남편이야. 기억 못 해도 괜찮아. 집에 오면 다시 알려 줄게.”
그 말이 끝나자 병 안쪽의 손이 떨렸다.
“나…… 정말 돌아가도 돼요?”
“당연하지.”
“그러면 돌아갈래요. 여기서는 매일 누가 내 이름을 불러 주는데,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모르겠어요.”
남 형사는 눈물을 삼켰다.
“이번에는 내가 계속 불러 줄게.”
서기관이 그들의 진술을 기록했다.
[남하린: 귀환 의사 확인.]
[본인 아닌 제삼자 동의 효력 일시 정지.]
두 번째 병이 은은하게 빛났다. 반대편 벽에 사람 하나가 걸어 나올 만한 윤곽이 생겼다.
나는 그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유나가 나를 막았다.
“아직 안 돼. 기억이 돌아가는 문이 열렸을 뿐, 몸이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고.”
“그럼 몸을 찾아야죠.”
“0번 보관실 아래쪽. 서아가 있을 거라고 했던 그곳.”
나는 부서진 유리병과 유나를 바라봤다. 오재민의 그림자는 실 한복판에서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재민이는?”
“사라지기 전에 물어봐야 해.”
유나가 우산을 접었다. 실들이 곧장 그녀를 향해 몰려들었다. 나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재민이는 내가 열아홉 살 때 마지막으로 봤어. 그래서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이는 거야.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흘렀어.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걸 알 거야.”
그녀가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재민아. 내가 네 누나 오유나야. 기억나?”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응.”
“여기서 나가고 싶어?”
잠깐의 침묵.
“나가고 싶어.”
유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같이 가자.”
“그런데 누나, 나가려면 먼저 저 사람을 멈춰야 해.”
그림자의 손가락이 구태형을 가리켰다. 구태형의 눈이 무섭게 변했다. 그는 정장 주머니에서 작은 원형 금속판을 꺼냈다.
금속판에는 숫자 00이 적혀 있었다.
“정지 프로토콜 실행.”
그가 말했다.
갑자기 내 손목시계가 바뀌었다. 60분짜리 카운트다운이 멈추고, 숫자 00이 새겨졌다.
[감사 심리 일시 보류.]
[운영권 비상 회수 요청.]
서기관이 소리쳤다.
“승인자! 그 장치는 현재 심리 중입니다. 실행 권한이 없습니다!”
구태형이 웃었다.
“권한은 원래 가진 사람이 쓰는 겁니다. 당신들은 관리자 서명을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나는 금속판을 보았다. 그 가운데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있었다.
‘승인번호 0613. 차도겸.’
원본이 남긴 서명보다 더 오래된 흔적이었다.
벽에 붙어 있던 37번 우편함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겸, 잘 들어.”
원본의 목소리였다. 다급했다.
“그건 내 서명이 아니야. 문석이 것도 아니고.”
“그럼 누구 건데?”
“처음에 문을 연 사람.”
“처음에 문을 연 사람이라니. 서아?”
“아니.”
벽 너머의 내가 숨을 들이켰다.
“네가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부터 차도겸이라는 이름을 쓰던 사람.”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 차도겸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써 온 이름이었다. 주민등록증, 졸업장, 어머니가 불러 주던 이름까지.
그런데 바닥에서 떨어져 나온 종이 조각 하나가 발치에 닿았다. 거기에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7개월 전 회사 출입증 사진.
이름: 차도겸.
사진 속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회색 점퍼를 입은 구태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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