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할지는 제가 정합니다.”
나는 구태형에게 말했다.
“일단 원본을 부르세요.”
서기관이 고개를 저었다.
“0번 보관실의 주체는 체류 허가가 만료되는 중입니다. 소환 시 잔여 허가 시간이 소모됩니다.”
“그러면 계속 가둬 두겠다는 겁니까?”
“관리상 필요한 절차입니다.”
말하는 방식이 정말 회사 인사팀과 비슷했다. 사람의 삶을 ‘관리상 필요’로 묶으면 웬만한 잔인한 일도 평범한 업무처럼 보였다.
남기혁 형사가 내 옆에 섰다.
“소환 전에 그 사람 의견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습니까?”
“접촉이 제한돼 있습니다.”
“이의 신청권이 있으면 접촉 방법도 있어야죠.”
서기관의 입술이 잠깐 벌어졌다가 닫혔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듣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유나가 내게 작은 종이를 건넸다. 종이에는 숫자 37이 적혀 있었다. 처음 그녀에게서 받은 열쇠와 같은 숫자였다.
“기억나? 네가 만든 비상 연락번호.”
나는 주머니에서 은색 열쇠를 꺼냈다. 열쇠 뒷면의 홈에 엄지손톱을 넣자 두께가 얇은 금속판 하나가 빠졌다. 안쪽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37번은 문이 아니라 수신자.’
“수신자?”
“원본의 외부 이름이야. 네가 원본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만든 번호.”
나는 감사실 벽을 바라봤다. 벽에는 작은 우편함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중 37번만 비어 있었다.
금속판을 그 안에 넣자 벽 너머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차도겸.”
내 목소리였다.
“들려?”
“들립니다.”
“나를 데려오려고 하지 마. 증거가 필요하잖아. 내가 여기서 직접 말할게.”
나는 안도했다. 원본을 0번 보관실에서 끌어내지 않고도 증언을 받을 수 있었다.
“원본 차도겸 씨. 6월 13일의 문서에 서명한 게 맞습니까?”
남 형사가 물었다. 종이와 펜을 쥔 모습은 평범한 참고인 조사 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조사 대상이 벽 안에 있고 같은 이름의 남자가 옆에 서 있다는 점만 달랐다.
벽 너머의 내가 대답했다.
“계약 첫 장에는 내가 서명했어. 하지만 제삼자 기억을 담보로 잡는 조항에는 동의하지 않았어.”
구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의 주장입니다.”
“맞아요.”
원본이 말했다.
“그래서 서명 원본을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계약한 날엔 그 조항이 없었어요.”
감사실 바닥에 검은 선이 나타났다. 벽에 걸린 문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내 서명이 적힌 종이 아래쪽에 다른 종잇장이 붙어 있었다. 접합선은 아주 얇았다. 뒷면의 날짜가 서로 달랐다.
계약 본문: 6월 13일.
담보 설정 별첨: 7월 1일.
“7월 1일이면 분기 이후네요.”
나는 구태형을 보았다.
“그날 저한테 서명받았습니까?”
“시스템이 자동으로 갱신했습니다.”
“누가 자동 갱신을 허용했죠?”
구태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기관이 처음으로 그의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구태형 운영 승인자. 별첨 계약의 인증 근거를 제출하십시오.”
구태형이 천천히 웃었다.
“좋아요. 그러면 증인 셋을 불러 봅시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직접 확인이라면.”
구태형은 한동안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기이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도겸 씨. 당신이 처음 그 문을 연 이유가 뭔지 기억합니까?”
“모릅니다.”
“당신은 살릴 수 없던 사람을 구하고 싶어 했어요. 밤새 데이터를 뒤지고, 단 한 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된다고 했지.”
내 심장이 이상하게 빨라졌다.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장면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진실이라면,” 나는 말했다. “왜 그 목적 때문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쳐야 하죠?”
구태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연구에는 비용이 듭니다.”
“비용을 내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내는지 알아야 합니다.”
“당신도 비용을 냈잖아요. 여섯 번이나.”
“그래요. 그래서 이제 더 내기 전에 영수증부터 받겠다는 겁니다.”
남 형사가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 쌓여 있던 공포가 잠시 느슨해졌다. 나는 다시 구태형의 서류를 내려다봤다. 계약서는 언제나 서명한 사람을 탓하기 쉬웠다. 동의하지 않은 사람의 말은 가장 늦게 듣는 구조였다.
“그럼 피해자 이름이라도 들려 주세요.”
구태형이 나를 빤히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번만큼은 미소가 없었다.
“좋아요. 그렇게 원한다면.”
그가 서류가방의 바닥을 열었다. 작은 유리병 세 개가 나왔다. 각각의 병 속에는 하얀 종이 조각이 떠 있었다.
김태오.
남하린.
오재민.
내가 본 장부 속 이름들이었다.
유나의 얼굴이 질렸다.
“그걸 어디서…….”
“회사 서버실에서 회수했습니다. 정전이 걸린 덕분에 보관 환경이 불안정해졌거든요. 저도 곤란했습니다.”
구태형이 첫 번째 병의 뚜껑을 열었다.
병 안에서 남자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태오의 얼굴이 흰 종이 위에 나타났다. 그는 두 눈을 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죠?”
“김태오 씨?”
내가 물었다.
“네. 당신은 누구죠?”
“차도겸입니다. 우리가 회사 서버실에서…….”
“아, 그 사람.”
그는 내 이름을 듣고 움찔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왔어.”
나는 말을 잃었다.
“당신이 출입문을 열어 준다고 했거든. 직원들이 기억을 지우는 회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그런데 문을 통과한 순간, 보관국이 나를 가져갔어.”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함께 있었다.
나는 종이 위에 떠오른 김태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눈 밑은 까맣게 그늘졌고, 왼쪽 뺨에는 붉은 흉터가 있었다. 실종 전단의 사진과 조금 달랐다. 유나가 손끝으로 병을 가리켰다.
“저건 사람 전체가 아니야. 자기 몸으로 돌아가려는 기억이야.”
“그럼 김태오 씨 몸은 어디 있죠?”
“보관실 아래층에 있을 거야. 기억과 몸을 분리해 둔 거지.”
김태오가 우리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 자꾸 내가 물건처럼 설명되는 겁니까?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요!”
“알겠습니다.”
나는 병 안쪽에서 김태오가 내 얼굴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신경이 쓰였다. 그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목소리가 닿는 곳이 기억의 표면이라면, 그의 눈빛도 방 안에 있는 신체의 눈빛과 다를 것이다.
그런데 분노는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가 내 이름을 듣자마자 느꼈던 공포도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었을 수 있다. 그것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 내게 주어진 숙제였다.
“제가 당신한테 무슨 일을 했는지 전부 듣겠습니다. 다만 당신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전부터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김태오가 잠깐 말을 멈췄다.
“여섯 번이나 같은 말을 하진 않았군.”
“이번이 처음이라면 다행입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끝까지 들으려 했다.
“지금부터는 김태오 씨한테 직접 묻겠습니다. 본인의 마지막 기억은 언제입니까?”
“6월 말. 누군가 회사 서버실에서 문을 열어 줬어요. 출입 허가를 받은 사람이 차도겸이라고 했죠. 난 기억이 지워진 동료들을 찾으러 간 거였어.”
“그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문 너머에 서랍이 있었어요. 내 이름이 적힌 서랍. 그걸 열면 아내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어요. 아내는 없지만, 사람을 홀릴 만큼 그럴듯한 약속이었지.”
그가 작게 웃었다.
“내가 열기 전에 누가 내 손을 잡았어요. 서아라고 했어요. 서랍을 열면 돌아갈 수 없다고.”
내 숨이 멎었다. 그때에도 서아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었습니까?”
“들었는데, 믿지 않았어요. 내 눈앞에 문이 있었으니까.”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해. 그렇다고 남의 기억을 강제로 보관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맞습니다.”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이유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잃는 건 아니니까요.” 나는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나를 탓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때의 저는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여기서 꺼내고 싶습니다.”
“그 말도 들었어.”
김태오가 말했다.
“벌써 여섯 번째야.”
구태형이 입꼬리를 올렸다.
“보셨죠? 같은 사람에게 여러 번 속은 겁니다. 그 사람의 기억이 믿을 만합니까?”
나는 김태오의 말을 곱씹었다.
“여섯 번째라는 건 당신이 그때마다 기억했다는 뜻이군요.”
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래.”
“그럼 그 기억이 증거입니다.”
나는 남 형사를 돌아봤다.
“피해자가 직접 자신이 당한 일을 말했어요. 그걸 진술로 남겨 주세요.”
남 형사는 곧바로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김태오 씨. 기억을 맡기는 데 동의했습니까?”
“아니.”
“돌아가고 싶습니까?”
“당연히!”
그 순간 유리병 안에서 빛이 번쩍했다.
[비동의 보관 확인.]
[임시 귀환 권고.]
서기관이 충격받은 얼굴로 병을 바라봤다.
“이런 판정은…… 운영 승인자가 직접 보관 중인 객체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 시스템에 버그가 있나 보죠.”
나는 말했다.
“아니면 그동안 진실을 검사해 본 적이 없던가.”
구태형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두 번째 병을 집어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남하린.
남 형사의 손목 숫자가 03:31로 바뀌었다. 그는 병을 보는 순간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사람을 마주한 얼굴이었다.
“하린아.”
병 안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남 형사가 얼어붙었다.
“나야. 기혁이.”
여자는 잠깐 침묵했다.
“그 이름…… 알아요.”
“그럼 나 기억나?”
“아뇨.”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그 이름을 들으면, 꼭 돌아가야 할 집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남 형사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보며 했던 말과 똑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 병에서 아주 어린 남자아이의 손바닥이 나타났다.
유나가 숨을 들이켰다.
“재민아.”
그러자 병 안쪽에서 목소리가 대답했다.
“누나, 늦었어.”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감사실의 불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구태형이 세 번째 병의 바닥을 깨뜨렸다.
검은 실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증언은 여기까지입니다.”
제1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