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세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들린 것은 아무 소리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17시 59분 59초. 전광판은 같은 숫자를 반복했고, 차고지 천장에서 떨어지던 물방울 하나가 공중에 매달렸다. 멈춘 도시의 가장자리가 희미하게 접혀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 한 시간 안에서 나는 멀리 달려가거나 증거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리지 않기로 했다.
손목시계에 문장이 나타났다.
[최초 보관자 승인 대기]
[승인 시 전체 계약 정상화]
[거부 시 대기 기록 회수]
나는 두 번째 문장을 읽고 웃었다.
“전체 계약 정상화라. 이름만 참 친절하네.”
그 순간 검은 우산이 버스 앞에 내려앉았다. 기억 보관국에서 여러 번 봤던 서기관이 우산을 접었다. 그의 얼굴은 늘 똑같았고,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차도겸 씨. 마지막으로 결정하십시오.”
“제가 결정하면 누구를 돌려보냅니까?”
“모든 승객입니다.”
“승객은 몇 명이죠?”
“4,183건입니다.”
“건수 말고 사람 수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모르시는군요.”
서기관은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시계 안의 바늘은 움직이고 있었다. 남은 시간 59분 21초. 현실에서는 여전히 같은 일 초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은 있죠. 여러분이 너무 오래 빼앗아 놓은 게 문제지.”
그는 우산 안쪽에서 종이를 펼쳤다. 내 기억이었다. 아버지와 악수하던 날, 어머니가 처음 내 이름을 불렀던 순간, 서아와 지켰던 약속, 유나가 빗속에서 내 손을 잡던 장면. 잃어버린 기억이 생생한 영상으로 흔들렸다.
“승인하면 모두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몸을 떨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화면 속 아버지는 젊었다. 입가에 작은 주름이 있었고 웃을 때마다 눈을 찡그렸다. 이 모습을 다시 갖고 싶었다.
그러나 서기관의 손이 내 기억을 가린 순간 나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영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대사가 붙어 있었다.
‘나는 최초 보관자가 되겠습니다.’
“그 말은 내가 한 적 없어.”
“기록에는 남아 있습니다.”
“기록에 있다는 말과 내가 말했다는 말은 다릅니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스스로 확인한 문장과 다른 사람들이 증언한 문장이 빽빽했다. 나 혼자 잃어버린 기억을 다루기 위해 만든 수첩이 이제는 여러 사람이 각자의 말을 남기는 책이 되어 있었다.
서기관이 낮게 말했다.
“그러면 기억을 포기하겠다는 겁니까?”
“아니요. 돌려받을 권리를 포기하진 않아요. 다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담보로 돌려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때 시계가 47분을 가리켰다. 정지 세계 바깥에서는 서아와 문석이 계획대로 각 복제본의 독립 검증을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0번 좌석에서 새로운 승인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원본 공란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나는 0번 좌석에 다가갔다. 아무도 없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내 이름이 떠 있었다.
“이 좌석을 빈자리로 돌려놓겠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최초 보관자 서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요구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서기관이 멈칫했다.
“2011년 운영 개편입니다.”
“1998년 원본에도 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수첩에서 아버지 인계서의 문장을 펼쳤다. ‘응답 없음은 승인이 아니다.’ 그리고 빈자리를 대리 서명으로 바꾼 2011년 개편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증거를 어디에 보여 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기계가 제일 좋아하는 곳에 놓았다. 0번 좌석의 스캐너 위였다.
[원본 사양 충돌]
[대리 서명권 검증 실패]
좌석 아래에서 금속이 튀는 소리가 났다. 서기관이 검은 우산을 벌렸다.
“당장 그만두십시오! 보조 회차가 정지되면 남은 사람들이 영원히 안에 남습니다!”
나는 수동 교환기를 가리켰다.
“아니요. 귀환 통신은 독립돼 있습니다. 문을 열 때 누가 나올지는 그 사람이 결정합니다. 밖의 계약 서버가 아니라.”
이제 서기관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생겼다. 당황이었다.
“그 선택에는 비용이 필요합니다.”
“그럼 정식으로 알리고 각자에게 물어야죠. 숨겨 둔 기억을 멋대로 빼 가는 건 비용 청구가 아닙니다.”
정지 세계의 시간이 12분으로 줄어들었다. 손목시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여기서 계속 버티면 내 마지막 기억이 징수될 수 있다는 경고가 떴다. 가장 최근에 만든 기억이었다. 오늘 아침 어머니가 차려 준 미역국, 식탁 위에 있던 햇빛, ‘다시 이야기하면 된다’고 말하던 목소리.
“오늘 것만은 가져가지 마.” 나도 모르게 말했다.
서기관이 웃었다.
“그럼 서명하십시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잊는 것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내일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손목시계 안쪽의 바늘이 멈췄다.
[개별 기억 징수 불가: 귀환 경로와 분리됨]
나는 눈을 떴다. 문석과 채원이 준비한 별도 회선 전환이 정지 세계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최초로 ‘기억을 내놓지 않아도 대기할 수 있는 상태’가 전 구간의 원본 검증에 적용됐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외부 대리 서명 복제본: 1]
[마지막 전송 시도: 진행 중]
0번 좌석의 안전띠가 다시 움직였다. 남은 시간은 2분.
서기관이 다급하게 말했다.
“버스를 멈추면 아버지의 목소리는 사라집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영상이 뜬 곳을 보았다. 그 목소리가 진짜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첩에 남은 아버지의 문장만큼은 내가 직접 읽고 검증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문을 열라고 하지 않았어요.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원본 ‘공란 유지’ 기능을 선택했다. 그것은 전체 계약을 삭제하는 명령이 아니었다. 임의 승인으로 다른 사람을 호출할 수 없게 하는 상태 전환이었다.
서기관은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당신이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관측자라면, 당신이 멈추는 순간 아무도 귀환하지 못합니다.”
나는 잠깐 그 말을 믿을 뻔했다. 혼자만 움직이던 첫날부터 내 마음 한편에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이 있었다. 하지만 창밖 현실의 차고지에는 내 허락 없이도 자신의 말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아가 안쪽 사람의 말을 듣고, 채원이 회선을 지키고, 남 형사가 증거를 남기고, 유나가 자기 동생을 찾고 있었다.
“나 한 사람에게 달린 일이 아니에요.”
나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게 우리가 겨우 만들어 낸 방식입니다.”
서기관의 형상이 종이처럼 얇아졌다. 그는 더 이상 나와 거래를 제안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버튼이 어떤 사람의 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0번 좌석: 공란 복구]
[미응답 건: 자동 실행 금지]
[외부 복제본: 독립 검증 실패]
서기관의 우산이 뒤집혔다. 빽빽하던 종이들이 바닥에 쏟아졌지만, 나는 그 종이에 손대지 않았다. 누군가의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주인을 찾기 전까지 내 것이 아니었다.
00:10.
차고지 문 밖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서아의 목소리였다.
“도겸아. 귀환 회선 살아 있어.”
00:03.
유나가 말했다.
“승인된 사람만 움직여. 아무도 대신 출근하지 않아.”
00:01.
나는 처음으로 시계를 붙잡지 않았다.
도시가 움직였다.
그리고 아무도 기억을 내지 않고 오후 여섯 시를 지나갔다.
제19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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