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서류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엄청난 법원 명령도, 최고 관리자의 비밀번호도 아니었다.
자기 이름을 자기가 쓴 종이 한 장이었다.
강문석은 외부 서버의 예약 장부를 세 종류로 나눴다. 주인을 확인한 기록, 이름은 있지만 실제 사람과 연결되지 않은 기록, 장치 시험과 중복으로 추정되는 기록. 4,183건이라는 숫자는 그 셋을 합친 결과였다. 피해자 수를 세려면 다른 검증이 필요했다.
“이제 사람한테 물어볼 순 있어요?” 내가 물었다.
남 형사가 답했다.
“신원을 확인하고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분들부터요. 조사 중인 자료를 무턱대고 공개하면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설명회를 열었다. 이름이 복구되지 않아 정상적인 급여명세서를 받지 못했던 사람, 어느 날 한 시간의 기억이 사라진 사람, 출근하지 않았는데 출근 기록이 생긴 사람. 초대된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일을 겪었고, 모두가 보관국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맨 처음 손을 든 사람은 대전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박미라였다.
“제 기록에는 제가 두 시간 더 근무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날은 어머니 병원에 갔어요. 병원 출입 기록도 있어요.”
그녀는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이 중에 뭘 믿어야 해요?”
나는 순간 쉽게 대답할 뻔했다. 병원 기록이 있으니 근무 기록이 틀렸다고. 하지만 남 형사가 먼저 말했다.
“두 자료의 원본과 시간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동안 근무 기록을 근거로 박미라 씨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보전 요청을 하겠습니다.”
박미라가 내 얼굴을 봤다.
“그럼 오늘 당장 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군요.”
“네. 하지만 틀렸을 수 있는 기록이 당신 잘못으로 굳어지는 건 막아야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부터 해 주세요.”
또 다른 남자는 자기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다들 놀랐다. 그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떠올리고 싶은 날도 있지만, 어떤 기억은 지금 바로 돌려받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누군가 결정해 돌려주는 일이 아니라, 나중에 선택할 수 있는 권리였다.
서아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즉시 복원 희망하지 않음. 별도 재동의 전까지 보관 상태 유지 요청.’
“이렇게 적어도 됩니까?” 남자가 물었다.
“네. 원하면 나중에 바꾸실 수도 있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보관국에서 제일 싫어할 문장일 겁니다. ‘나중에 다시 결정하겠다.’”
작은 웃음이 흘렀다. 사람들은 번호표를 받지 않았다. 누구도 대신 이름을 써 주지 않았다. 요청서를 제출하지 않고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그 선택 역시 빈칸으로 남겼다.
설명회가 끝날 때쯤 서아가 내게 얇은 봉투를 건넸다.
“네 것도 있어.”
“제 신청서요?”
“응. 너도 피해자잖아.”
나는 종이를 펼쳤다. 이름, 연락 방법, 현재 확인되는 기억 손실, 복원 희망 여부. 맨 아래에는 작은 문장이 있었다.
‘본인은 타인의 의사를 대신 표시할 권한을 이 신청서로 부여하지 않습니다.’
나는 펜 끝을 종이에 대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잃어버린 어린 날, 떠오르지 않는 아버지의 손, 유나와의 첫 만남. 전부 돌아오면 좋을 것 같기도 했고, 한꺼번에 돌아오면 나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복원 결정을 보류하겠습니다.”
서아가 나를 바라봤다.
“괜찮겠어?”
“괜찮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도 내가 고를래.”
그녀는 내 이름이 아니라 내가 쓴 문장을 확인했다.
그날 저녁 박미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제 근무 시간이 아직 복구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회사에서 제 의견을 묻더라고요.’
나는 답장을 쓰다가 손을 멈췄다. 별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한 줄을 적었다.
‘그 질문을 받으실 권리가 원래 있었습니다.’
밤 열한 시, 외부 복제본의 실행 대기열에서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독립적 당사자 확인서 접수: 63건]
[일괄 계약 실행 보류 대상: 확대]
문석이 전화했다.
“도겸아. 작동 방식이 바뀌고 있어. 사람이 직접 쓴 거부와 보류는 원본 검증 계층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야.”
“그럼 4,183건 전부 신청서를 받으면 되나요?”
“아니. 그 숫자가 사람 수가 아니잖아. 장치 항목에는 서명할 사람이 없어. 그리고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우리가 마음대로 대답하면 다시 원점이고.”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계획을 수정했다. 확인된 사람의 의사는 그대로 기록하고, 확인되지 않은 대상은 실행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사후 동의를 강요하지 않는다.
화면 한쪽에 새로운 경고가 떴다.
[예약 실행까지: 4일]
[유효 승인 비율: 기준 미달]
[비상 일괄 대리 서명 준비]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자, 기계는 더 큰 소리로 대신 말하려 하고 있었다.
제19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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