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대신하는 서명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정작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 사람이 한 말과 서명이 주장하는 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병원에 갔다. 남기혁 형사가 안내한 면회실에는 커튼이 반쯤 쳐져 있었다. 그 안의 남자는 작은 컵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한때 그가 갇혀 있던 장소에서는 컵의 물이 잘 흐르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은 어떤 걸 기억하십니까?” 남 형사가 물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문 닫히는 소리. 그리고 누가 자꾸 제가 내렸다고 말하는 소리요.”
“누구인지 기억납니까?”
“아뇨. 다만 제가 내렸다고 해 놓고, 다시 태우려고 했어요.”
나는 질문을 참았다. 그가 정말 남도윤이라면 묻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왜 안쪽에 남았는지, 그동안 무엇을 봤는지, 아버지와 만났는지. 하지만 남 형사의 손짓에 멈췄다.
“말씀하신 내용은 여기까지 기록하겠습니다. 오늘 답하고 싶지 않은 건 건너뛰셔도 됩니다.”
남자는 오랫동안 나를 쳐다봤다.
“당신도 버스에 있었습니까?”
“잠깐이요.”
“0번 좌석에는 앉지 않았죠?”
“네.”
그는 처음으로 안도한 얼굴을 했다.
“거긴 사람이 앉을 곳이 아니에요. 빈자리가 필요한 때가 있거든요. 아무도 대신 대답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돌아오는 길에 서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야 말했다.
“처음에는 빈자리를 남긴 게 보호였는데, 나중에는 아무나 대신 앉힐 수 있는 권한이 됐어.”
“보호 장치의 의미가 뒤집힌 거지.”
“그걸 다시 원래대로 돌리려면, 처음에 누가 빈자리를 만들었는지 확인해야 해.”
우리는 차정수의 수기 인계서 뒷장에 숨어 있던 탄소 복사지를 발견했다. 마른 종이 위에 연필 가루를 옆으로 쓸어 내자 희미한 표가 보였다. 머리글자는 세 개였다.
대기. 귀환. 거부.
각 항목 옆에는 서명란이 있었지만, 0번에는 어떤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 글씨로 ‘비워 둘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2011년 운영 문서에는 그 자리에 ‘차정수 영구 위임’이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기존 원본을 복구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네요.” 채원이 말했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이 장치를 믿고 살아왔으니까요.”
나는 버스 차고지로 향했다. 정비사는 0번 좌석 밑의 장치를 건드리지 않은 채 차체 아래 안전 통로를 보여 주었다. 바닥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검은 상자가 있었고, 상자에는 세 개의 단자가 있었다.
첫 번째는 승차.
두 번째는 귀환.
세 번째는 공란.
문석이 전류가 흐르지 않는 시험 장비에서 세 번째 단자의 연결을 추적했다.
“이게 대리 응답 스위치가 아니야.”
“그럼 뭐죠?”
“원래는 차단 스위치야. 사람이 대답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
스위치 아래 낡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응답 없음은 승인이 아니다.’
서아가 손으로 글자를 짚었다.
“여기에 누가 선을 하나 더 꽂았네.”
그 선은 2011년형 중계기를 지나 외부 서버로 향했다. 신호가 없으면 대기해야 하는데, 중계기는 신호가 없을수록 ‘위임 승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구태형은 정비 통로 밖에 서 있었다. 그에게 설명을 듣자 입술이 창백해졌다.
“이건… 내가 허용했던 패치가 맞아요.”
“왜요?” 내가 물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결과를 빨리 알고 싶어 했습니다. 대기가 길면 불안해하니까요. 위원회가 자동 처리율을 올리자고 했죠.”
“대기하는 사람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동의하지 않은 사람의 대답을 만들었다고요?”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다는 말로 고장 난 시간을 고칠 수는 없잖아요.”
서아가 내 팔을 잡았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화를 내는 일보다 먼저 고쳐야 할 선이 있었다.
남 형사의 조치 아래 우리는 원본과 패치 기록을 보전했고, 채원은 시험용 장치에 공란 신호를 보냈다. 시뮬레이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에 다음 문장이 떴다.
[미응답. 현재 상태 유지.]
“정상입니다.” 채원이 말했다.
같은 입력을 실제 중계기에서 읽기 전용 복제 환경에 재현하자 전혀 다른 문장이 떴다.
[승인자: 차정수]
[자동 귀환 계약 생성]
문석이 소리 없이 화면을 캡처했다. 마침내 ‘아버지가 승인했다’는 주장의 실제 출처가 드러난 것이다.
그때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번호 대신 한 문장이 나타났다.
[0번 좌석 교체 대상: 오재민]
유나가 내 손에 든 화면을 봤다.
“재민이가 이번에는 승인자 자리로?”
나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정하지 말아요. 이름만 뜬 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유나는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그동안 사람을 대신해 대답하던 빈자리가, 이제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동생 이름으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제19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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