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세계가 풀리기까지 59초.
나는 봉투를 뜯지 않았다. 첫 번째 본능은 빨리 읽는 것이었지만, 두 번째는 그게 누구를 위한 문서인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봉투 앞에는 ‘차정수 수기 인계서’라는 글씨가 있었고, 수취인 칸에는 지운 흔적만 남아 있었다. 누가 주인을 바꿔 놓았는지 몰랐다.
“미안합니다, 아버지.” 나는 혼잣말했다. “이번에도 바로 믿지는 못하겠어요.”
종이를 수첩 사이에 넣고 버스 밖으로 나왔다. 회로 분리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계약 전송은 보류, 귀환 통신은 정상. 외부 복제본은 아직 살아 있었다. 오늘 한 번 중단했다고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00:10.
나는 스위치에서 손을 뗐다. 아무도 대신 출근하지 않았다. 아무도 대신 내리지 않았다.
00:01.
차고지에 소리가 돌아왔다.
유나가 내 팔을 붙잡았다.
“도겸 씨! 방금 어디 갔어요?”
“한 시간쯤요.”
“한 시간이요?”
“현실에서는 일 초였고요. 농담으로 넘어갈 시간이 아니네요.”
남 형사는 곧바로 장비 상태를 확인했다.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0번 좌석의 승차 표시는 사라졌다. 그러나 뒤편 통신장치에는 작은 녹색 불이 들어왔다. 안쪽 사람이 밖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막았습니까?” 유나가 물었다.
“원래 장치는요.” 이채원이 답했다. “하지만 복제본이 남아 있어요. 오늘은 그게 어디로 연결되는지 추적해야 합니다.”
오후 여섯 시 일 분, 구태형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가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알 수 없는 발신자였다.
[긴급 운행 실패]
[최초 보관자 책임 전가 미완료]
[보조 회차 가동]
“보조 회차?” 내가 물었다.
구태형은 차고지 바깥을 바라봤다. 오래전부터 두려워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171번 버스가 한 대가 아니야.”
나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그는 지하에 또 한 대가 있는지, 다른 도시의 버스를 말하는지, 아니면 같은 장부의 백업을 말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문석이 복제본 경로를 추적했다.
“보조 회차가 차량이라는 뜻은 아니야. 외부에서 같은 계약을 실행하는 백업 경로야. 서버가 여럿 있는 것 같아.”
“그걸 찾아야겠네요.”
“찾는 것만으론 부족해. 백업이 다시 다른 백업을 만들 수 있거든.”
나는 잔뜩 지친 몸으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또 하나의 적, 또 하나의 장치, 또 하나의 사건이 도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를 나누어 보면 모두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안쪽 사람의 귀환, 밖의 계약 피해자 보호, 외부 복제본의 실행 중단. 같은 날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남 형사가 내 앞에 물병을 놓았다.
“일단 앉아서 쉬세요. 방금 한 시간 움직였다고요?”
“예. 그런데 오늘 야근 수당은 누구한테 청구하죠?”
“보관국에 하세요.”
“그 회사는 임금체불도 심각하던데요.”
유나가 웃었다. 그 웃음은 짧았지만 오랜만에 들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잠시 뒤 수동 교환기에서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171번 버스의 뒷문이었다. 철컥, 철컥. 누군가 문 안쪽에서 손잡이를 두 번 당겼다. 남 형사는 사전에 준비한 질문만 보냈다.
‘현재 위치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말하기 어려우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동선 너머에서 느린 숨소리가 들렸다.
“버스는… 멈췄습니까?”
“네. 당장은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 발로 내려가도 됩니까?”
남 형사는 구조팀을 바라봤다. 의료진과 시설 안전 책임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턱 너머는 아직 미확인 공간이었으므로 구조팀이 먼저 안전을 확인해야 했다. 남 형사는 그 절차를 설명한 뒤 물었다.
“내려오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대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우리는 기다렸다. 문 안쪽에서 물건을 끌어 옮기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오랫동안 한 자리에 있다가 일어서는 소리처럼 들렸다.
“준비… 됐습니다.”
그제야 구조팀이 문을 천천히 열었다.
안쪽에는 좁은 계단이 있었고 바닥에는 낡은 천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의료진이 손전등을 비추자,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발을 디디기 전에 손으로 벽을 더듬었다. 마치 아주 오랜 시간 계단을 올라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남 형사는 통제선 안쪽으로 다가갔다.
“형?”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남도윤의 오래된 사진과 어느 정도 닮았지만, 사진 한 장으로 판정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지 않았다. 몸은 말라 있었고 얼굴에는 시간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기혁아.”
그 한마디에 형사의 눈가가 흔들렸다. 그는 무턱대고 안기지 않았다. 의료진이 남자의 안전을 확인하고 신원 검증을 진행할 수 있도록 물러섰다. 남자는 보호 담요를 받아 들고 의자에 앉았다.
“내가… 늦었지.”
남 형사는 한참 뒤에 답했다.
“늦었다는 말은 나중에 해요. 먼저 몸부터 봅시다.”
나는 두 사람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여기서 모든 사실을 한 번에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느렸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안전한 곳에 앉는 데만도 많은 준비와 기다림이 필요했다.
의료진이 남자를 데리고 나간 뒤, 유나는 버스 안쪽을 오래 바라봤다.
“재민이는 아니었네.”
“아직 못 찾았어요.” 내가 말했다.
“알아.”
유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왔네. 그러면 길을 찾은 거겠지.”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 계단 끝을 바라봤다.
그때 문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겸아, 그 봉투. 지금 같이 봐야 할 것 같아.”
나는 정지 세계에서 가져온 봉투를 꺼냈다. 남 형사와 서아, 이채원이 참석한 상태에서 겉면을 촬영하고 봉인을 확인했다. 안에는 노란 종이 두 장이 있었다. 첫 장에는 아버지의 필체로 적힌 문구가 있었다.
‘최초 보관자는 차도겸이라고 입력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 아래로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아무것도 보관하지 않았다. 사고 당시 다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임시 항목이었다. 누군가 그 이름을 현재의 계약 책임자로 바꿨다면, 그 변경은 최초 기록의 뜻과 다르다.’
나는 종이를 놓았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문장의 시작이 보였다. 최초 보관자라는 직함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보호대상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이름을 덧씌운 것이다.
“그럼 저는…”
서아가 내 말을 받았다.
“처음부터 그 빚을 질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문석은 고개를 저었다.
“원본이 진짜라면. 필체와 보관 경로를 확인해야 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두 번째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숫자도 이름도 없었다. 작은 노선도가 그려져 있었다. 수술실에서 시작한 선이 회차 대기장을 거쳐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그림이었다. 마지막에는 선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귀환’.
다른 한쪽은 ‘기억 회수’.
그 아래 아버지는 이렇게 적었다.
‘귀환할 사람의 길은 남겨 두어라. 남의 기억을 빼앗는 길은 끊어라. 두 길을 하나로 만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서아가 노선도 오른쪽 아래의 도장을 가리켰다.
[2011년 재개편 승인 / K-07]
[변경 사유: 2027년 자동 운행 대비]
“2011년에 2027년을 대비했다고?” 유나가 물었다.
나는 차고지 한가운데 선 버스를 돌아봤다. 2027년의 출근망은 단순한 새 시스템이 아니었다. 십오 년 전부터 준비된 일의 끝이었다. 누군가 수천 건의 기록을 한 번에 실행할 날을 기다려 온 것이다.
바로 그때 멈춰 있던 안내 전광판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171번 마지막 운행: 1차 중단 확인]
[보조 회차: 운영 중]
[2027년 예약 실행까지: 10일]
마지막 줄이 나타났다.
[보조 회차 승인자: 차정수]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이름이 다시 사용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 이름을 추적하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누가 서명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는지부터 찾아야 한다.
나는 남 형사에게 봉투를 건넸다.
“이번엔 제가 아니라, 이걸 만든 사람의 퇴근 기록을 확인합시다.”
차고지 바깥에서 현실의 저녁 여섯 시가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차를 기다렸다. 누군가는 지각했고, 누군가는 약속에 늦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자신의 뜻으로 차에 타고 내릴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 자유인지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열흘.
우리는 그 자유를 수천 명에게서 빼앗으려는 마지막 회차를 막아야 했다.
제19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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