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멈췄다.
차고지 문틈으로 들이치던 늦가을 비가 투명한 못처럼 허공에 박혔다. 방금까지 들리던 구태형의 숨소리도, 경찰 무전기도, 유나가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도 사라졌다.
그러나 내 손목시계의 안쪽 바늘만 움직였다.
[정지 세계 체감 잔여 시간: 60분]
[현실 경과 예상: 1초]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는 한 시간이 자유 시간인 줄 알았다. 이제 안다. 이 한 시간은 누군가의 결재 버튼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가두는 감옥이기도 했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누구세요?”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만 텅 빈 차고지에 울렸다. 멈춘 사람들은 나를 볼 수 없었다. 나는 문턱을 넘어가지 않은 채 손전등을 켰다. 시계의 초침이 한 칸 움직였다.
버스 0번 좌석에는 사람이 앉아 있지 않았다. 대신 작은 가죽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곳에 없었던 물건이었다. 손잡이에는 노란 종이가 매달려 있었다.
‘보관자에게: 출근하지 마시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상한 세계에서도 출근하지 말라는 경고는 기분이 좋았다.
그때 내 뒤에서 누가 말했다.
“그 가방은 네 게 아니다.”
돌아보니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닮은 사람이었다. 나보다 얼굴이 조금 어려 보였고, 오른쪽 눈썹 아래 흉터가 있었다. 나는 그 흉터를 기억하지 못했다. 전에 보관실에서 본 ‘원본’과도 조금 달랐다. 마치 서로 다른 시간대의 사진들을 억지로 이어 붙인 얼굴 같았다.
“당신은 누굽니까?”
“네가 물을 줄 알았어.”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벌써 몇 번째 받는지 모르겠다.”
“또 차도겸이라고 하겠죠?”
“아니.”
그는 가방을 가리켰다.
“내 이름은 네가 잃어버린 기억 중에 있어. 나도 아직 찾는 중이야.”
나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누가 진짜인지 맞히는 게임은 이미 충분히 했다. 대신 물었다.
“당신이 0번 좌석에 앉았습니까?”
“아니. 앉은 사람은 없어.”
“그럼 왜 승차로 기록됐죠?”
“누군가 옛날의 보호대상을 지우고 오늘의 너를 끼워 넣었으니까.”
그가 바닥에서 종이 한 장을 주웠다. 내가 잡으려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나중에 네가 직접 찾는 게 낫겠다. 나를 믿고 행동하면 또 같은 일을 반복해.”
“그럼 왜 나타났습니까?”
“한 가지만 말하려고. 네가 여기서 누구 대신 출발해 버리면, 밖의 사람은 모두 그 일을 네 선택으로 기록할 거야. 그러면 그 기록을 지울 사람은 없어.”
나는 손목시계를 봤다. 잔여 시간 47분. 한 시간 안에 이 버스를 멈추지 못하면 현실의 일 초가 끝나면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
“그럼 뭘 해야 합니까?”
그는 버스의 뒷문을 가리켰다.
“안쪽 사람이 내려올 길은 남겨 둬. 대신 승차 장부와 출발 장부를 분리해. 네가 개발자잖아.”
말을 끝내자 그는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 남긴 마지막 말이 귀에 남았다.
“그리고 네 아버지한테 미안해하지 마. 그 사람은 네가 여기 들어오는 걸 원하지 않았어.”
나는 머릿속이 비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기억을 더 징수하고 있는 것인지, 정지의 부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잠깐 어머니의 집 현관 색깔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허겁지겁 수첩을 펴서 적었다.
‘잔여 시간 46분. 0번 좌석 비어 있음. 다른 나처럼 보이는 인물 등장. 그가 말한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행동하지 말 것.’
버스 하부의 작은 패널에 물리 스위치가 세 개 있었다. 조금 전 채원이 설명한 승객 감지, 귀환 경로, 계약 전송이었다. 스위치의 선 색이 다르다는 사실도 기억했다. 내가 임의로 전원을 끊으면 안쪽에 있는 사람의 통신과 생명 유지 장치가 위험할 수 있었다.
나는 절연 커버를 열어 회로 표기를 읽었다. 오래전 아버지가 쓴 듯한 글씨가 있었다. ‘출발은 보류해도 귀환은 보류하지 않는다.’
장치에는 수동 차단 버튼 하나가 별도로 있었다. 2011년 개조 때 단자만 뽑아 놓은 상태였다. 이를 원래 위치에 되돌리는 것이 위험한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현장 작업 절차의 사본을 펼쳤다. 채원이 앞서 승인받은 시험 범위가 있었고, 그 범위 안에는 계약 전송만 분리하는 작업이 포함돼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새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준비해 둔 절연 단자를 그 위치에 연결했다. 그 순간 화면에 표시가 바뀌었다.
[승차 신호: 미확인]
[귀환 통신: 유지]
[계약 전송: 보류]
내가 숨을 내쉬려는 순간 또 다른 화면이 켜졌다.
[현실 복귀 시 외부 백업 자동 실행]
복제본. 원래 망을 멈춰도 다른 곳에 숨어 있는 4,183건의 파일이 살아 있었다.
나는 정지 세계의 뒷좌석을 하나씩 살폈다. 좌석마다 사람이 앉았던 흔적이 있었다. 누구의 장갑 하나, 작아진 버스표, 이름이 적히지 않은 종이컵. 그러나 그 물건들이 특정한 사람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열 번째 좌석 아래에는 구겨진 색연필 그림이 있었다. 노란 집과 파란 하늘, 붉은 버스. 버스에는 바퀴가 네 개나 그려져 있었다. 어린아이가 바퀴를 두 개 더 그렸을 수도 있고, 실제로 보았던 이상한 버스를 그렸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림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아직 돌아오지 못한 누군가의 물건이었다.
시계가 35분을 가리킬 때 나는 한 번 넘어졌다. 몸은 정상적으로 움직였지만 계단 끝에서 발을 헛디뎠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는 내 비명도 남에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팔꿈치에 생긴 작은 상처를 살피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을 멈춰도 계단은 안 비켜 주는군.”
평범한 고통이 오히려 안심됐다. 아직 내 몸이 여기 있고, 내가 실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물병을 꺼내 조금 마셨다. 그러다 문득 물의 차가움을 아는 기억이 사라질까 봐 무서워졌다. 기억 징수는 큰 사건을 위해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던 감각이 어느 날 낯설어질 수 있었다.
나는 수첩에 적었다. ‘물이 차갑다. 팔꿈치가 아프다. 나는 아직 이곳에 있다.’
잔여 시간 21분. 버스 뒤편의 안내 방송에서 낡은 목소리가 흘렀다.
“도겸아.”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버지 차정수의 목소리였다.
“네가 내 대신 문을 열 필요는 없다.”
녹음일 수도 있다. 합성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말이 반갑다는 사실과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견뎠다.
“아버지라면,” 내가 말했다. “증거를 남겼겠죠.”
음성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0번 좌석 아래에 봉투 하나가 나타났다.
겉에는 내 이름이 아니라 다음 문장이 적혀 있었다.
‘출발을 멈추는 권한은 한 사람에게 없다.’
그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출처가 적혀 있었다.
[차정수 수기 인계서 / 마지막 페이지]
남은 시간 00:59.
나는 봉투를 들어 올렸다.
제18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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