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형은 카드가 아니라 거래를 내밀었다.
“네가 최초 보관자임을 인정하면 버스가 멈춘다.”
나는 카드 앞면을 봤다. K-07이라는 낡은 숫자 아래에 뚫린 구멍 두 개. 공장 사원증처럼 평범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차고지 안쪽에서 경적이 한 번 울리자 그는 흠칫 놀랐다.
“왜 그렇게 급하세요?” 내가 물었다.
“여섯 시가 되면 늦어.”
“그건 제 퇴근 얘기할 때도 매일 들었습니다.”
남 형사는 우리 사이에 섰다.
“카드를 증거로 제출할 의사가 있습니까? 조건부로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은 안 됩니다.”
구태형은 카드의 양끝을 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한참 뒤에야 카드와 손을 떼어 놓았다.
“좋아. 가져가. 대신 내 이야기를 들어.”
남 형사는 수령 과정과 시간을 기록하고 카드를 봉투에 넣었다. 그제야 구태형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11년 개편 당시 버스 회차 대기장의 승인 카드를 바꾼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다만 기존의 수동 거부 기능을 삭제하라는 지시는 다른 곳에서 왔다고 했다.
“어디서요?” 서아가 물었다.
“근무연속성 위원회. 부서 이름이 계속 바뀌어서 지금의 명칭을 나도 몰라. 내 서명으로 처리된 건 인정해. 하지만 내가 문 안의 사람을 모두 출근시킨 건 아니야.”
“승인하지 않은 사람이 출근 처리된 걸 알았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시선을 피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때 멈췄어요?”
답이 없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답하지 않은 빈자리가 어쩌면 답보다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강문석이 휴대용 판독기에 카드 복제 데이터를 넣었다. 읽기 전용으로 분석한 카드 안에는 두 가지 명령이 있었다.
[운행 중지]
[최초 보관자 갱신]
두 명령은 같은 버튼에 묶여 있었다. 하나를 실행하면 다른 하나도 자동 처리되는 구조였다.
“아주 친절하네요.” 문석이 말했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자동차 소유권까지 바뀌는 차 같아요.”
구태형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그런 구조로 만든 게 아니야.”
“그럼 왜 고치지 않았죠?” 유나가 물었다.
그는 유나를 바라봤다가 고개를 떨궜다.
“다시 고치려고 하면 사람이 더 사라졌으니까.”
나는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피해를 입은 이유를 듣는 것과 그 사람이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별개였다. 남 형사는 사실관계를 공식 절차에서 밝히겠다고 했다.
구태형은 녹슨 차체를 바라보며 오래전 일을 한 가지 더 털어놓았다. 2011년 개편 전 그는 버스 문 옆에 ‘수동 거부’라는 표지를 직접 붙였다고 했다. 어느 날 상급자가 그 표지를 떼라고 했고, 그는 아무런 이의를 적지 않은 채 지시대로 따랐다.
“그때는 이런 사고가 날 줄 몰랐어.”
“사고가 난 뒤에는 알았잖아요.” 내가 말했다.
그가 입술을 다물었다.
“처음엔 운영 오류라고 보고했어. 그다음엔 설계상 불가피하다고 적었지. 마지막에는 아예 보고서를 내지 않았어.”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버지의 낡은 수첩을 생각했다. 아버지에게도 설명하지 못한 실수와 숨긴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사람의 잘못까지 오래전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덮을 수는 없다.
“오늘 그 카드를 내놓는다고 과거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알아.”
“대신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있죠. 빼놓은 기록을 전부 제출하세요.”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남 형사가 증언의 범위와 진술 절차를 설명했다. 구태형이 협조하겠다는 말도 강제로 유도하지 않고 현장 기록에 남겼다.
내가 그를 믿게 된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할 길 하나가 더 생겼을 뿐이었다.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차고지의 내부 전등이 꺼졌다. 밖은 환했는데 실내만 정전됐다. 이채원이 무전으로 안전팀을 불렀다. 버스에서는 노란 비상등이 켜졌다. 차체 아래에 누가 숨겨 둔 축전 장치가 작동한 것이다.
“전력 공급이 끊겼어도 경로 장치는 움직입니다.” 채원이 말했다. “아까처럼 선을 뽑는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그때 구태형이 낮게 말했다.
“0번 좌석을 움직여야 해.”
“타라고요?”
“아니. 비워야 해.”
나는 그의 얼굴을 봤다. 조금 전까지는 내가 앉아야 멈출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더니 이제는 반대였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정말 카드를 읽고 생각을 바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석은 화면을 확인했다.
“도겸아. 압력 센서에서 네 이름을 채우는 데이터가 로컬 서버에 없대. 0번 좌석에 저장된 건 누군가의 신원 자체가 아니라 외부 장부를 가리키는 주소야.”
“그러면 그 주소만 바꾸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주소를 넣으면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거야. 빈칸으로 돌려놓아야 해.”
그는 카드의 명령을 분리해 볼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 문틈을 바라봤다. 문 안에 남겨진 사람들이 있다. 나는 누구의 이름도 새로 넣지 않고 경로를 멈추고 싶었다. 그런데 계기판은 갈수록 빨리 깜박였다.
[운행 준비: 30분 전]
[0번 승객: 승차 확인]
내가 앉지 않았다는 증거는 이미 남아 있었다. 차고지 입구의 CCTV에도, 모래주머니 실험에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진술에도. 그렇다면 승차 확인을 바꿀 수 있는 건 내 행동이 아니라 잘못된 기록 자체였다.
서아가 내게 말했다.
“도겸아, 이건 네가 타고 안 타고의 문제가 아니야. 누군가 네 이름을 가짜 열쇠로 쓰고 있어.”
“알아요.”
“그 가짜 열쇠를 부수는 데 네가 진짜로 들어갈 필요는 없어.”
그때 구태형이 주머니에서 작은 접힌 종이를 꺼냈다. 2011년 회차 시스템의 수동 복구 절차였다. 그는 처음엔 그것을 보여 줄 생각이 없었던 듯 머뭇거렸다.
“이것만은 말해야겠군. 나는 십오 년 동안 이걸 숨겼어.”
종이의 마지막 줄은 찢겨 있었다. 남은 부분에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버스의 마지막 운행은 승객을 태우는 운행이 아니다.’
나는 그 밑의 찢긴 자리를 바라봤다.
빠진 문장을 알아야 했다.
제18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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