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지 않은 내 글씨가 자꾸 발견되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첫 번째는 버스 차표의 ‘네가 타야 우리가 내릴 수 있어’였다. 두 번째는 매표소 벽에서 발견됐다. 사인펜으로 거칠게 적힌 글자였다.
‘0번 좌석을 비워 두어라.’
이 필체는 달랐다. 어렸을 때 내가 쓴 글씨와 비슷했다. 적어도 어머니가 냉장고에 붙여 두었던 초등학교 숙제와 닮아 있었다.
“필적 감정으로 가면 답 나오겠죠?” 내가 물었다.
남 형사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언제 쓴 글씨인지부터 확인하죠. 벽에 있는 글씨가 실제로 열 살짜리가 쓴 것인지, 누가 따라 쓴 것인지 모르니까요.”
“제가 열 살 때 그렇게 악필이었습니까?”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던데요.”
이런 순간에 농담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유나는 집에서 어머니가 보관해 둔 공책 사진을 받아 왔다. 어머니는 아버지 차정수가 도겸의 낙서를 모아 둔 작은 상자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사진의 글씨를 비교했다. 자음의 각도는 닮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버스 벽의 글자는 오른손잡이의 움직임으로 쓰였고, 내 어린 시절 공책에는 왼손의 눌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 초등학교 때 왼손잡이였나?” 내가 물었다.
서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뒤에 오른손으로 연습했어. 그 사실을 네가 잊었구나.”
나는 어린 시절의 다른 사진들도 넘겨 봤다. 학예회에서 종이 왕관을 쓴 모습, 여름 방학에 물총을 들고 웃는 모습, 그리고 버스 정류장 앞에서 울먹이는 얼굴. 마지막 사진에서 아버지는 내 팔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이건 왜 찍어 놨대요?” 내가 물었다.
“기록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서아가 답했다.
“사람이 울고 있는데 사진부터 찍은 건가요?”
“그날 너는 이미 기억을 한 번 잃었어. 아버지는 네가 무슨 일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게 남겨 둔 거야.”
나는 사진 속 아이를 다시 봤다. 무서운 장치 앞에 서 있던 아이가 무엇을 기억했을까. 오른손과 왼손을 바꾼 일보다 그날의 공포를 더 잘 기억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에게 남은 건 왼손으로 쓴 낙서의 흔적뿐이었다.
“이 사진을 보면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정확히는 모르지.”
서아의 말이 맞았다.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걱정스러워 보였지만, 걱정의 이유까지 사진 한 장이 알려 주진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추억을 증거로 바꾸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그날을 자세히 물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 대해 언제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공책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누군가 내 이름을 이용했다고 해서 모든 흔적이 가짜인 건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삶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의외로 이렇게 사소한 단서에서 시작되기도 했다.
“벽에 쓴 사람은 그럼 성인이었겠네요.”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나중에 네가 따라 썼을 수도 있어.”
“그것도 싫은데.”
“그러니까 아직 단정하지 말자.”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내가 정말 세상을 멈추는 능력으로 과거로 돌아가 이런 문장을 써 놓았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시간이 뒤틀리는 장치 앞에서 상식을 무기로 삼는 건 위험했다.
이채원은 0번 좌석 아래에서 낡은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는 나사 네 개로 고정돼 있었다. 열자 작은 크랭크와 금속판이 나타났다. 금속판에는 ‘운행 중 자동 확인 금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원본인가 봐요.” 채원이 말했다. “좌석이 눌리면 승차로 인식하는 센서가 있었는데, 원래는 그것만으로 동의가 되지 않도록 이 차단기가 들어갔어요.”
“2011년에는 빠졌겠네요.”
“원본에는 있어요. 개정 도면에는 없고요.”
상자를 꺼내자 종이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손대지 않고 남 형사에게 알렸다. 쪽지에는 여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여기서도 기다려.’
뒷면에는 날짜가 있었다. 1998년 6월 13일. 아버지의 낡은 수첩에서 보았던 날짜와 같았다.
오후 다섯 시가 넘자 차고지 주변의 소음이 서서히 줄었다. 18시의 정지를 기다리는 내 귀는 예민해졌다. 사람들은 아직 웃고, 차는 아직 달렸지만 내 몸은 저절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버지가 옛날에 171번 버스 얘기 한 적 있어?”
“그 버스?” 어머니는 한참 생각했다. “네 아버지가 버스 운전기사였던 건 아니잖니. 그런데 네가 어렸을 때 버스를 못 타겠다고 울던 날은 기억나.”
“왜 울었는데?”
“문이 닫힐까 봐 무서워했어. 아버지가 그때 이렇게 말했지. 문이 닫히면 기다리라고. 너 혼자 들어가서 열지 말라고.”
나는 0번 좌석의 안전띠를 생각했다. 혹시 이곳에서 아이가 처음 배웠던 규칙이었을까. 가족의 기억을 사건의 증거로 삼기 전에 확인할 것이 많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목소리는 나를 붙잡아 줬다.
“엄마, 오늘 조금 늦을 수도 있어.”
“바쁠수록 밥 챙겨 먹어.”
“이번엔 꼭 그럴게.”
통화를 끝내고 나는 수첩 첫 장에 적었다.
‘0번에 앉지 않는다. 누군가 나 대신 승차를 기록해도 그건 내 대답이 아니다.’
그때 문석의 장비가 울렸다.
[승차 처리 완료]
[승객: 차도겸]
나는 아직 버스 밖에 서 있었다.
“내가 타지도 않았는데요?”
문석은 화면을 바짝 들여다봤다.
“0번 좌석의 압력 센서가 작동했어.”
“거기 아무도 없잖아요.” 유나가 말했다.
우리는 버스 창을 바라봤다. 빈 좌석의 안전띠가 아주 천천히 당겨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앉은 사람의 몸을 감싸듯이.
그러나 창에는 누구의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제18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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