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혁 형사는 차표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지 않았다.
“먼저 봉투부터요.”
나는 그의 말을 따라 투명 보관 봉투를 꺼냈다. 처음 이런 일을 겪었을 땐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이제는 증거를 건드렸다가 형사에게 혼나는 조연의 기분을 더 자주 느꼈다.
문석이 차표를 확대 촬영했다. 낡은 종이에는 승객 이름과 발행 시간이 보였지만 목적지 칸은 비어 있었다. 뒷면의 문장은 내 필체와 비슷했다. 그렇다고 내가 썼다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었다. 2011년에 내 이름이 사용됐고, 1998년의 손글씨가 2026년의 인증으로 바뀌어 있었다. 글씨 한 줄쯤 누가 흉내 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계기판에서 발행된 겁니까?” 내가 물었다.
이채원이 버스 아래의 작은 출력기를 가리켰다.
“용지는 오래됐는데 잉크는 새것이에요. 누군가 최근에 리본을 갈았다는 뜻이죠.”
“출입이 없었다던 시설에서요?”
“기록상 출입이 없었던 거죠.”
말이 끝나자 뒤쪽 천장에 작은 불이 켜졌다. 좌석 사이로 검은 화면이 펼쳐졌다.
[목적지 입력 대기]
[승객이 지정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자동 지정합니다.]
유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나오고 싶은 사람이 어디로 갈지 결정해야 하는 거지, 바깥의 네가 정할 일이 아니잖아.”
“그런데 저쪽은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자기가 하겠대요.”
우리는 자동 지정의 조건을 확인하기 전까지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기로 했다. 시설관리자는 버스 열쇠를 분리했고, 남 형사는 차량 앞문과 뒤문에 각각 통제 인력을 세웠다. 문석은 외부 접속 회선만 감시했다.
지하 대기장에서는 낡은 이동식 의자가 네 줄로 놓여 있었다. 입구 쪽에는 작은 매표창구가 남아 있었다. 유리창 아래 녹슨 종이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구멍을 뚫은 차표들이 줄지어 들어 있었다. 모든 차표의 목적지는 달랐다. 영병원, 동문 정류장, 강변 주차장, 서부 터미널. 그리고 한 장에는 ‘집’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 차표의 뒷면은 이상했다.
‘귀가 장소는 본인이 지정한다. 응답이 없으면 대기한다.’
서아는 차표를 보자 손을 멈췄다.
“1998년 매뉴얼 문구야. 내가 회수했던 수첩에도 비슷한 문장이 있었어.”
“그때도 버스를 타고 갔어요?”
“아니. 그때 버스는 환자를 수송하기 위해 임시로 쓰였어. 시간 정지를 만드는 장치는 병원에 있었고.”
그녀가 손바닥으로 매표창구의 유리를 닦았다. 안쪽 벽에 오래된 노선도가 붙어 있었다. 열한 분 동안 이어지는 짧은 동선. 시작점은 수술실, 끝점은 병원 밖의 회차 대기장. 원래는 사고 당시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긴급 동선이었다. 2011년 이후의 도면에서는 병원 안쪽을 빠져나가는 선이 지워져 있었다.
“귀환 경로를 없애고 계약 전송 경로만 남긴 거네요.” 문석이 말했다.
“그러면 누군가를 살리려고 만든 길이 누군가를 다시 묶는 길이 됐겠지.” 서아가 답했다.
내가 한쪽 벽에 귀를 댔을 때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실내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책장을 넘기는 것 같은 소리였다.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났다. 정확히 열한 번. 그 뒤에는 정적이 왔다.
“들리십니까?” 내가 묻자 남 형사가 손을 들었다.
“들립니다. 하지만 사람의 움직임인지 설비 소음인지 확인해야 해요.”
서아는 매표창구에 붙은 낡은 주의문을 찾아냈다. ‘응답 대기 중 반복 호출 금지.’ 무언가를 열한 번 두드리면 열한 번 대답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던 게 아니다. 응답이 늦어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문장 앞에서 마음이 급해졌다. 과거 나는 프로그램 응답이 삼 초만 늦어도 오류라고 생각했다. 알림을 다시 보내고, 새로고침을 누르고, 사용자를 쫓아냈다. 이곳에서 누군가 같은 식으로 재시도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답이 없는데도 장치가 대답을 만들어 냈군요.”
“그걸 일이라고 불렀을지도.” 서아가 말했다.
유나는 낡은 의자에 앉았다. 동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대기라는 단어는 얼마나 힘든 것일까. 그녀는 한참 뒤에야 일어났다.
“그래도 오늘은 기다릴래요. 내 동생이 저기 없다 해도, 안쪽의 다른 사람을 재촉하지 않을래요.”
우리는 매표창구 뒤편에서 통신선을 하나 더 발견했다. 버스 출발 알림과는 무관한 저전압 선이었다. 이채원이 회선을 검사하자 놀랍게도 제3 귀환문의 수동 교환기와 같은 규격이었다.
“여기도 내부에서 목적지를 고를 수 있는 장치가 있었어요.”
“어디로 연결되죠?”
“선이 끊겨 있어요. 그런데 반대쪽 단자는 새로 교체됐습니다.”
나는 단자 위에 적힌 제작번호를 읽었다. 2011-171-R. 재설치 시각은 2011년 6월 13일. 우리가 추적해 온 사건의 바로 그날이었다.
남 형사는 그 사실을 적었다. 나는 구태형의 이름을 입에 올리려다 그만두었다. 계정이 사용된 기록과 그 사람이 실제로 손을 댄 사실은 달랐다. 다만 어떤 사람은 그런 차이를 악용해 모든 책임에서 도망치기도 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진실도 잡지 못한다.
점심을 지나 이채원이 임시 케이블을 연결했다. 내부 목소리를 바깥으로 꺼내는 수동선만 복원했고 계약 승인 단자는 물리적으로 분리했다. 현장 책임자의 허가와 안전팀의 감시 아래 진행한 시험이었다.
버스 천장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그 질문이 끝나자 긴 침묵이 흘렀다. 시스템이 기다렸다. 이번에는 사람의 대답을 임의로 채우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힘없는 숨소리가 났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 한마디가 끝나자 화면이 바뀌었다.
[목적지: 미정]
[대기 유지]
유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오늘은 나가지 않겠다고 말할 권리를 처음으로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화면에서 붉은 빛이 켜졌다.
[외부 긴급 지정권 활성화]
[권한자: 최초 보관자 차도겸]
[오늘 18:00까지 목적지를 입력하십시오.]
잠시 뒤 안내 방송이 다시 울렸다.
“입력 기한 초과 시 모든 예약 승객의 목적지는 동일하게 변경됩니다.”
문석이 물었다.
“동일하게, 어디로?”
화면이 짧게 깜박였다.
[목적지: 출발지]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결국 모두를 다시 그 문 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뜻이었다.
제18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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