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혁 형사는 인쇄된 종이를 읽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남도윤: 생존 확인 절차 요청]
나는 그를 바라봤다. 몇 달 동안 형을 찾아온 사람에게 저 네 글자는 얼마나 무거울까. 생존 확인. 그토록 기다렸지만, 막상 도착했을 때는 쉽게 믿을 수 없는 말.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남 형사가 말했다.
“지금요?” 내가 물었다.
“신원 확인 절차를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저 종이에 ‘형이 살아 있다’고 적혀 있다고 믿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교환기의 종이 출력부 옆에는 전화기처럼 생긴 수동 송수화기가 있었다. 이채원은 절연 상태와 호출 경로를 검사한 뒤, 통신이 외부 정산망에 서명 데이터로 전송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송수화기를 들기 전, 남 형사는 구조팀 책임자에게 현장 상황을 공유했다.
“안쪽 상대가 말할 수 있다면 본인 확인을 시도하겠습니다. 다만 확인이 끝나더라도 임의로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들리십니까? 저는 남기혁입니다.”
잡음만 흘렀다. 금속을 문지르는 소리, 멀리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아주 약한 호흡.
“형이면, 나 기억해?”
나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질문 같은 것은 이미 몇 번이고 위조됐다. 남 형사도 즉시 말을 고쳤다.
“아니요. 그 질문에 대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는 구조팀이 있는 외부입니다. 안쪽에서 안전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짧은 침묵 뒤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은… 열지 마세요.”
유나는 눈을 감았다. 남 형사는 수화기를 꽉 잡았다.
“안쪽에 혼자 계십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산소나 물이 부족합니까?”
“지금은 괜찮습니다. 여기서 열면… 다른 문이 닫힙니다.”
목소리는 어른 남성의 것이었다. 남도윤의 오래된 음성과 비슷한 부분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음성 합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남 형사는 ‘남도윤 본인’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신원 미상 남성의 응답’이라고 현장일지에 적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질문은 넘어가겠습니다.” 형사가 말했다. “밖으로 나올 방법을 찾을 의사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 한마디는 깨끗했다. 기계음이 끼어들 틈 없이 뚜렷했다.
서아가 손짓으로 ‘본인 의사 기록, 서명으로 변환 금지’라고 적은 종이를 들어 보였다. 문석은 수신 녹음 장치가 별도 증거 기록만 남기도록 고정했다. 이제 안쪽 사람이 말하는 ‘나가고 싶다’가 내일의 출근 동의로 쓰이지 않게 해야 했다.
“어떻게 안전하게 나올 수 있습니까?” 남 형사가 물었다.
“아래층… 교환기. 첫 번째 질문을 찾으세요.”
“첫 번째 질문이라면?”
“누가 대신…”
잡음이 갑자기 커졌다.
“누가 대신 대답할 수 있는가… 그 질문부터 지우세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차정수의 오래된 규칙과 닿아 있었다. ‘응답이 없으면 먼저 장치의 고장을 의심할 것.’ 누군가 대답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는 절차 자체가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남 형사는 한 차례 더 질문했다.
“당신이 남도윤 씨입니까?”
상대는 긴 시간 침묵했다.
“그 이름… 버리지 말아 주세요.”
통화가 끊겼다.
남 형사는 천천히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형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고 싶다고는 말했어요.”
“그건 확실하죠.”
유나는 창고 쪽을 보았다. “재민이도 안에 있을까요?”
“확인해 봐야 해요.”
우리가 안쪽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관국 관련 회선에도 기록됐다. 그들은 ‘교신 성공’이라는 짧은 문장을 보내왔다.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성공이라는 말에는 누가 무엇을 얻었는지가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안쪽 사람이 자기 말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허락한 적도 없었다.
서아는 보관국의 자동 통지를 일단 읽기 전용으로 묶어 두자고 제안했다. 남 형사는 현장 통화 녹음이 사람의 동의나 법적 서명으로 쓰이지 않도록 증거 기록의 범위를 명확히 했다. 채원은 장치가 송수화기에서 입력된 목소리를 외부 정산망으로 넘기지 않는지 실제 신호를 다시 확인했다.
“아까 들은 남성 목소리 말이에요.” 나는 물었다. “도윤 씨 목소리와 비슷했나요?”
남 형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형이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지 십오 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아직도 형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녹음 파일을 듣자마자 확신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기억이 닳았을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고, 간절해서 다른 사람 목소리까지 형처럼 들었을 수도 있죠.”
그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래서 녹음은 전문가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동안 내가 형 목소리를 못 알아봤다고 괴로워하지 않으려고요.”
나는 그를 보며 조금 부끄러워졌다. 늘 다른 사람에게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내 기억의 빈자리만은 반드시 혼자 메우려 했다. 남 형사가 서류를 옆에 두었다.
“도겸 씨는 지금 형을 구하는 일을 돕는 겁니다. 형인지 확인하는 일을 대신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알아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쉬세요.”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이 가까웠다. 그날만큼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었다. 문석에게 데이터 기록을, 채원에게 설비 점검을, 남 형사에게 신원 확인을 부탁하고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혼자 영웅이 되지 않는 연습을 조금씩 하고 있었다.
우리는 형사와 유나를 따로 불러 녹음 재생 전 질문을 검토했다. 같은 목소리를 여러 번 들으면 낯설었던 억양까지 친숙해진다. 그래서 첫 감상과 나중 감상을 구분해 적기로 했다. 남 형사는 자기 기억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그 태도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알아맞히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아는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저 사람이 남도윤 씨가 아니어도, 우리가 지금 하는 구조 준비가 달라져야 할까요?”
아무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전 확인은 같아야죠. 다만 가족에게 알리는 내용은 달라질 겁니다.”
남 형사는 그 말을 받아 적었다. 그날의 불확실성은 실패가 아니었다. 구조해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과 그가 누구인지는 다른 질문이었다.
그날 밤, 음성 감정에 필요한 자료와 통신 원본을 분리해 보존했다. 나는 현장 기록을 정리하던 남 형사 옆에 앉았다. 그는 오랫동안 형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오늘 새로 알게 된 사실 하나만 적었다.
‘안쪽의 누군가가 귀환 의사를 표시함.’
나도 그 옆에 나의 서명을 하지 않은 수첩을 놓았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을 계약으로 바꾸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이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때 출력기가 마지막으로 한 장을 밀어냈다.
[첫 번째 질문: 대리 응답 권한의 기원]
그 아래는 검은 줄로 지워져 있었다.
[권한 발급 시각: 1998.06.11 18:11]
제1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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