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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173화
PAYLUA ORIGINAL · 제173화

173화. 오십아홉 초를 빌린 자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3,422자

오프라인 책장
05:59에 시간 정지가 시작되자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직 서명하지 마.”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벽에 붙은 소화기조차 그림자만 남겨 놓고 고요했다. 다만 유리 너머의 복도가 이상하게 밝았다. 한 사람이 걸어오는 듯했지만 발걸음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낡은 영상의 프레임이 몇 개씩 건너뛰는 것 같았다. 나는 메모장을 펼쳤다. ‘확인되지 않은 음성. 발화자 미상.’ 말을 듣자마자 누군가를 알아본 척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운 뒤로, 이렇게 쓰는 일에 익숙해졌다. 문제는 익숙해질수록 외로워진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아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도 믿지 못하게 되었을까. 첫 번째 표시등이 켜졌다. [오재민: 관측 승계 준비] 두 번째 표시등은 이상하게도 나의 손목시계와 연결돼 있었다. [차도겸: 기억 담보 확인] “또 제 기억이요? 은행도 이 정도면 한도 심사 좀 해라.” 혼잣말이 복도에 퍼졌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웃으려던 입이 저절로 닫혔다. 내가 한 번 더 움직이면 누군가가 그 움직임을 동의라고 읽게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손을 뒤로 모으고 화면 앞에 섰다. 발밑에는 미리 붙여 둔 노란 안전선이 있었다. 그 선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수첩에 이유를 적기로 약속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용감한 구조가 아니라 강제 계약 생성이 가능한 경로의 확인이었다. 유나가 옆에서 나타났다. 그녀도 움직일 수 있었다. 오전의 시간 정지에 전부 적응한 것은 아니지만, 눈빛만은 분명했다. “내 이름이 사라졌어.” “봤어요.” “그리고 재민이가 대신 들어갔지?” “그렇게 기록됐지만, 아직 누가 들어갔는지는 몰라요.” 유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작은 종이시계를 내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어제의 신호가 짧게 적혀 있었다. 세 번, 두 번, 한 번. 우리가 처음 확인했던 순서였다. “그 소리 말이야. 진짜 재민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살려 달라고 두드리는 걸 수 있어.” “네.” “그걸 이용해서 또 다른 사람을 데려오게 만든다면?” “그것도 막아야죠.” 그 순간 통로에서 아주 작은 빛이 튀었다. 가만히 떠 있던 먼지들이 누군가 걸어간 것처럼 흔들렸다. 나는 구분 가능한 윤곽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정지된 공간에서 감각은 평소보다 더 자신만만해졌다. 그 자신감 때문에 여러 번 실수했다. 영상 속에는 어린아이의 손이 나타났다. 손등에 오래된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아이는 다섯 손가락을 펴고 하나를 접었다. 네 개. 그리고 하나를 더 접었다. 세 개.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내가 물었다. 유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어릴 때 숫자를 셀 때 쓰던 방법과 같아.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우리 둘뿐은 아니지.” 그녀가 화면을 향해 말했다. “거기 누구야?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문을 억지로 열지 않을 거야.” 아이의 손이 사라졌다. 대신 두 개의 문이 화면에 나타났다. 왼쪽에는 ‘보호자 대리 동의’, 오른쪽에는 ‘미확인 호출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시스템은 어느 쪽을 누를지 우리를 기다리는 듯했다. “둘 다 누르지 마요.” 내가 말했다. “나도 알아.” 두 문 아래에 세 번째 선택이 점멸했다. 화면에는 버튼처럼 보였지만 글자가 반쯤 지워져 있었다. [응답 대기: 보존] 나는 그것이 원래의 안전 기능인지, 또 하나의 유도 장치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손을 뻗지 않고 수첩에 화면을 그렸다. 이채원이 전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안전장치를 찾았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누가 어디에 연결했는지부터 봐야 해요.’ 초침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직전, 유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재민아, 네가 아니어도 괜찮아. 사람이라면 겁내지 말고 한 번만 숨을 쉬어 줘.” 그것은 신호를 강요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한 부탁이었다. 화면 너머에 보였던 손가락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손목의 반창고가 떨어지며 검은 점 하나가 드러났다. 정지된 공간의 벽시계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가 가져온 태엽식 측정기에는 아주 느린 떨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손목시계 대신 그 측정기를 바라봤다. 어떤 상황에서는 시간이 하나만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내 기억이 닳는 속도, 전자 기계가 기다리는 속도, 안쪽 사람의 몸이 견디는 속도는 서로 같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 개발자들은 뭘 믿어?” 유나가 물었다. “일단 로그를 믿었다가 로그가 잘못됐다고 깨닫죠.” “그다음은?” “동료를 불러요. 혼자 보면 놓치는 게 많으니까.” 유나가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혼자 멈춘 세계를 뛰어다녔고, 그때마다 무엇인가를 잃었다. 처음에는 사라진 기억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내 능력을 썼으니 내가 값을 치르는 건 당연하다고. 하지만 그 대가가 꼭 필요한지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제야 이상했다. 화면에 나타난 아이의 손이 사라진 뒤, 그림자처럼 생긴 검은 선이 바닥에 남았다. 그것은 실제 자국이 아니었다. 형광등이 꺼졌다 켜질 때만 보이는 잔상 같았다. 나는 무릎을 굽혔다가 일어섰다. 선 아래에는 작게 ‘R-MIN’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사람 이름을 줄여 쓴 것인지, 중계기 부품 코드인지 알 수 없었다. “재민의 영어 이름이 R-MIN이었어요?” “아니. 그런 걸 쓴 기억은 없어.” “그러면 이름을 찾았다고 생각하지 말죠.” 유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분명히 적어 둬. 나중에 원본을 찾을 때 필요할 거야.” 나는 ‘영상 속 글씨 R-MIN, 정체 미확인’이라고 썼다. 딱 그만큼만. 얼마 뒤, 화면에는 [관측 기록 누락]이라는 문장이 나타났다. 누락된 것을 자동으로 채울까요, 하는 선택지가 따라왔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어릴 적 시험지의 빈칸 채우기 문제가 떠올랐다. 학교에서는 틀려도 선생님이 동그라미를 쳐 주면 끝났지만, 이곳에서 잘못 채운 빈칸은 살아 있는 사람을 짓눌렀다. “안 채워요.” 내가 말했다. “응.” 유나가 답했다. “오늘은 모르는 채로 나가자.” 그 말이 나에게 이상할 만큼 큰 용기가 됐다. 05:59:59. 세상의 소음이 돌아왔다. 유나가 무릎을 짚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잠깐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수첩을 봤다.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응답 대기 보존, 버튼 누르지 않음.’ 문석이 노트북을 들고 달려왔다. “둘 다 살아 있어? 새 계약은 없어.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뭔데요?” “시험 로그에 들어온 데이터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야. 세 번째는 프로그램이 만들어 낸 응답이 아니야.” 그는 통신 원본 파형을 확대했다. [하부 수동선: 입력 1회] 누가 손으로 만든 신호였다. 다만 그것이 오재민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때 남 형사가 계단 아래에서 올라와 말했다. “하부 점검구에서 사람이 쓰던 물건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문이 안쪽에서 잠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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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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