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아래에서 한 번의 대답이 돌아왔다.
딱.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유나가 내 팔을 잡았다.
“어디 가?”
“아래에 누가 있어요.”
“아래에 누군가 있다는 것과 지금 우리가 내려가도 된다는 건 다른 말이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자주 하던 말을 이렇게 돌려받으면 반박할 방법이 없다. 나는 벽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손목시계는 여섯 시에 멈췄고, 복도 끝의 빗방울도 창문 밖에서 그대로 떠 있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나와 유나뿐인 듯했다.
“세 번, 두 번, 한 번.” 유나가 낮게 말했다. “재민이랑 숨바꼭질할 때 쓰던 방식이야. 세 번 두드리면 내가 두 번 대답하고, 그다음에 재민이가 한 번. 그런데 그건 우리 둘이 만든 암호가 아니야. 동네 애들이 다 알았어.”
“그 말은 누군가 흉내 낼 수도 있다는 거네요.”
“맞아. 그러니까 또 물어볼 거야. 재민이가 아니어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 말고.”
유나는 종이시계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시침 아래에 작은 낙서가 있었다. 종이를 펼치면 초록색 크레파스로 그린 별이 나오는 구조였다. 그녀는 그 별의 의미를 아직 내게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나한테 시간에 관해 질문을 한 적이 있어. 내가 답을 틀렸더니 아주 신나 했지.”
“그럼 정답은 아나요?”
“기억이 안 나.”
우리는 서로를 봤다. 대단한 인증 수단처럼 꺼낸 이야기가 순식간에 소용없어졌다. 유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좋네. 누군가 내 동생을 사칭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진짜 누나인지 증명할 기억도 없네.”
“그런 시험 자체가 잘못됐을 수도 있어요. 이름을 부르거나 비밀을 맞혀야만 도와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도와줘야 하는 건 맞아. 다만 문을 함부로 열지 말자는 거지.”
우리는 문이 아닌 복도 바닥의 구조를 살폈다. 하부 중계기가 있다는 도면에는 한 층 아래의 점검 공간과 두 갈래 비상통로가 표시돼 있었다. 오른쪽 출구는 오래전에 콘크리트로 막혔고, 왼쪽은 병원 창고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 도면이 2011년 이후 갱신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유나는 통신선을 가리켰다. 유리 아래의 작은 진동판이 움직였지만 글자는 뜨지 않았다. 화면은 원래 응답을 사람의 말로 번역하는 장치였고, 그 번역 프로그램이 바로 대리 서명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표시 기능마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유나에게 바닥 아래의 공간이 처음 발견된 날을 물었다. 그녀는 영병원의 폐쇄 이전 기록을 떠올리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이 없다는 것보다 기억이 있을 듯 말 듯하다는 상태가 더 괴로운 모양이었다.
“어릴 때 병원에 온 적이 있어요?”
“재민이 검사 때문에. 하지만 여긴 아닌 것 같아. 우리가 갔던 병원 복도는 파란색이었어.”
“그 기억은 기록이랑 맞춰 봤어요?”
“아니. 내가 무슨 검사였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수첩 뒷장에 ‘파란 복도’라고 적었다. 새로운 증거가 아니라 유나의 기억으로 분류했다. 최근 내 수첩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종류의 글이 늘었다. 확인된 장비 로그는 검은색, 누군가의 증언은 파란색, 나의 추정은 연필. 진실을 색깔로 나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추정을 사실처럼 읽을 위험은 줄어들었다.
유나는 내 수첩을 훑어보았다.
“넌 나를 의심해?”
“아니요. 제가 잘못 이해할까 봐 적는 거예요.”
“그건 가끔 똑같이 느껴져.”
말이 막혔다. 내가 아무리 정확한 문장을 써도 상대의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수첩을 접었다.
“미안해요. 지금은 기록보다 먼저 들어야 했는데.”
“아냐. 적어 줘. 나중에 내가 기억을 잃으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그녀가 다시 바닥을 두드리려고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어느 쪽이 더 용감한 일인지 나는 판단하지 못했다. 문 아래를 향해 뛰어드는 것인지, 대답이 오지 않는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인지.
유나는 천천히 내게 오래된 약속을 들려줬다. 재민이가 집 안에서 놀다가 어디론가 숨으면, 가족들은 문을 열기 전에 반드시 ‘찾아도 될까’ 하고 물었다고 했다. 아이가 장난으로 숨어 있는 건지 정말 혼자 있고 싶은 건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 약속을 왜 지금까지 기억했을까요?”
“모르겠어. 어쩌면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날이 있어서겠지.”
시간이 멈춘 복도에서 그녀의 얼굴은 이상하게 성숙해 보였다. 재민이가 사라졌다는 시간에 멈춰 있던 누나가, 이제 자기 앞의 문을 어떤 방식으로 열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있었다.
18:00:34.
내 메모장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34초가 늘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지 시간이 시작되면 숫자는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수첩에 붙여 놓은 아날로그 측정기에서는 바늘이 천천히 진행하고 있었다. 하부 중계기가 자기만의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일까.
“그 시계는 뭐죠?”
“중계기를 본다고 문석이가 준 거. 전자신호와 상관없이 스프링으로 움직이는 거야.”
나는 순간 깨달았다. 하부에 있는 것이 사람이라면 응답 시간과 바늘의 움직임을 연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나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다르다고 사람인 건 아니야. 장치도 혼자 움직일 수 있잖아.”
그때 바닥이 두 번 떨렸다. 방금 전과 간격이 달랐다.
딱. 딱.
유나는 종이시계를 펼쳐 초록 별을 바라봤다.
“재민이는 어릴 때 문을 두드릴 때마다 시간을 세었어. 잘못 두드리면 처음부터 다시 했고.”
“이번에는요?”
“틀렸어.”
그녀가 손끝으로 바닥을 짚었다.
“재민이의 박자가 아니야. 그런데 누군가 재민이의 방식을 알고 있긴 해.”
19:00:00.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난 뒤, 멈췄던 세상의 소리가 돌아왔다. 복도에서 남 형사가 무전을 받았고, 서아가 문 쪽으로 뛰어왔다.
“괜찮아?”
“아직은요. 확인되지 않은 응답이 있어요.”
나는 눈앞의 바닥을 가리켰다. 남 형사는 출입 통제선 앞에 서서 손전등을 켰다. 직접 내려가지 않고 시설 관리자에게 연락해 하부 점검구의 안전 상태부터 확인하게 했다. 문석은 현장 노트북으로 통신 로그를 검증했다.
“이상하다. 호출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대답 한 번이 예약돼 있어.”
“얼마나 전에?” 서아가 물었다.
“아침 다섯 시 오십구 분.”
시간을 맞춰 보니 유나가 아직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습관을 알아내어 저녁 여섯 시의 대답으로 복사했을 가능성이 생겼다.
나는 조금 전의 메모를 지웠다. ‘재민의 신호’라고 썼던 줄을 ‘재민의 방식을 닮은 신호’로 바꿨다. 지운 흔적을 남기기 위해 옆에 수정 시각도 적었다.
그리고 남 형사의 무전에서 새로운 정보가 들려왔다.
“하부 점검구에 외부 전원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부에서 수동 개폐 장치가 작동한 흔적이 있답니다.”
문석이 고개를 들었다.
“전원이 없으면 자동 응답 장치가 움직일 수 없어.”
잠깐 모두가 침묵했다.
“그럼 사람일까요?” 내가 물었다.
남 형사는 대답 대신 보호 장비 목록을 적었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준비하고 들어가야죠.”
그때 창고 쪽 벽에서 또 한 번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쇠붙이로 아주 천천히 글씨를 긁는 소리였다.
제17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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