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막은 것은 오늘 새벽의 한 줄이었다.
그리고 그 한 줄을 막기 위해 오유나는 두 번이나 자신의 이름이 타인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것을 견뎌야 했다. 나는 병원 복도 자동판매기 앞에 서서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뽑았다. 첫 잔은 너무 뜨거워 손가락을 데었다. 세상은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커피까지 평범하게 뜨거웠다.
“네가 그렇게 손을 덴 건 처음 봐.” 유나가 말했다.
“특별한 능력은 뜨거운 커피 앞에서 무력하죠.”
“차가운 물이라도 가져와.”
나는 찬물에 손을 식혔다. 그 사이 유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기 모습의 가짜 영상이 화면에서 움직이는 걸 보는 일이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도 믿기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영상 속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있었다.
“나 아직 동생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잃어버린 거예요?”
“모르겠어. 내 기억 속 재민이는 맨날 장난치던 애인데, 얼굴하고 목소리는 다른 날처럼 따로 떠올라. 사람이 그렇게 기억되는 게 이상한 건 아니겠지?”
“이상하다고 정해 놓지 말죠.”
우리는 한동안 창밖을 보았다. 아침 햇살이 병원 벽에 걸려 있었다. 그 빛은 시간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회의실로 돌아가자 남기혁 형사가 현장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험에서 자동 작성된 새 계약은 0건으로 확인됐지만, 기존 예약 계약은 4,183건으로 남아 있었다. 실제 피해자 수나 개인별 의사와 일치하는 숫자는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이고 배운 사실이었다.
강문석은 프로그램 화면에서 2027년 예약 파일과 2026년 시험 파일을 나란히 띄웠다.
“시험에서 신규 등록이 막힌 건 확실해. 다만 예약 파일은 다른 저장소에 있어. 이걸 삭제해 버리면 증거도 함께 사라질 수 있어.”
“삭제하지 말고 실행만 막을 수 있나요?” 서아가 물었다.
“정상적인 절차로는 관리자 두 사람의 승인과 시설 측 확인이 필요해. 아직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이 누군지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유나가 손을 들었다.
“그럼 2027년이 될 때까지 사람마다 나눠서 지킬 생각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음부터 시스템이 사람의 이름을 허락 없이 쓰지 못하게 해야죠.”
문석은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그게 다음 목표야. 오늘 해낸 걸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남 형사는 구태형이 제공한 자료와 정산망의 관리자 기록을 대조했다. 구태형 계정이 마지막 변경에 사용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최초로 예약 명령을 생성한 계정은 더 오래된 별도 장치에서 온 것으로 표시돼 있었다.
[기록 생성 장치: 제3 귀환문 하부 중계기]
내 머릿속에 며칠 전 제3 귀환문의 유리 너머에서 들었던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도윤은 버스에 타지 않았어요. 차 밑에 있는 문으로 들어왔어요.’
중계기는 그 말과 겹치는 지하 구조도 아래쪽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아직 누구에게도 하부 중계기의 소유권이나 실제 사용자를 확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조사 장소는 분명해졌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될까요?” 내가 물었다.
남 형사는 잠시 생각했다.
“하부 구조부터 확인하고, 접근이 가능한지 알아봐야죠. 형을 찾는 마음으로 무작정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도윤이 돌아오길 바라는 건 내 마음도 같았다. 하지만 그 희망이 누구의 안전을 대신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오후가 되자 이채원이 하나의 오래된 문서를 가져왔다. 1998년 차정수가 직접 적었다고 표시된 귀환 지침서 사본이었다. 차정수의 서명이 진짜인지 아직 감정 중이었지만 내용은 짧았다.
'나가는 문은 안에 있는 사람의 의사로 열 것.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으로 값을 치르지 말 것.'
나는 그 글씨를 오래 바라봤다. 아버지의 원칙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따로 확인해야 한다.
“아버님이 쓴 게 맞으면 좋겠어?” 서아가 물었다.
“예전에는 무조건요. 지금은 그 말이 누가 썼든 지켜졌으면 좋겠어요.”
서아는 조용히 웃었다.
저녁 여섯 시가 다가오자 내 휴대전화에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예전 같았으면 서둘러 손목시계를 차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거리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오늘은 달랐다. 유나와 서아가 나란히 서 있었고, 남 형사는 복도 끝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18:00:00.
세상의 소리가 멈췄다.
내가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돌아왔다. 그러나 유나는 이번에도 움직였다. 그녀는 내 앞에서 종이시계를 꺼냈다. 시침은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멈췄네.” 내가 말했다.
“응. 이번에는 누가 불렀는지 알아볼래?”
나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손끝에 며칠 전 잃어버린 기억의 빈자리가 만져지는 듯했다. 그래도 적어 둔 내용은 읽을 수 있었다.
‘누가 돌아가야 할지 내가 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복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창 너머에는 느리게 내리는 것처럼 보이다 완전히 멈춘 빗방울이 있었다. 오늘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건물 출입문 앞에서 잠시 멈춘 채 서 있었다.
유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지된 세상에서 움직이는 단말기는 흔치 않았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고 내게 보여 줬다.
[2027년 자동 출근망]
[정기 시험 대상 변경]
[오유나: 호출 보류]
나는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그녀의 이름이 빠졌다.
하지만 다음 줄이 나타났다.
[신규 호출 예정: 오재민]
[예비 관측 주소: 제3 귀환문 하부 중계기]
[시험 개시: 다음 날 05:59]
유나는 단말기를 놓치지 않으려 손에 힘을 줬다.
“재민이가 살아 있다는 뜻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몰라요. 누군가 이름을 사용했을 수도 있어요.”
“그래.”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직접 확인할 거야.”
그녀는 종이시계를 천천히 접었다. 전에는 그 안에 동생의 시간을 붙잡고 싶다는 소원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시간을 함부로 빼앗지 않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다음 날 새벽의 현장 계획을 한 장씩 나눠 가졌다. 남 형사에게는 중계기 접근 기록 확인을, 문석에게는 예약 계약 실행 경로를, 서아에게는 재민이라는 이름의 원본 대조를 부탁하기로 했다. 유나는 자기 몫의 일을 스스로 적었다.
'재민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응답이 오면 먼저 누군지 묻는다.'
나도 그 아래 한 줄을 썼다.
'새벽 여섯 시가 오기 전에, 사람부터 확인한다.'
그때 제3 귀환문 방향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딱. 딱. 딱.
이번에는 녹음 재생 출력은 꺼져 있었고, 외부 정산선도 계약 쓰기 기능만 차단한 상태였다. 소리가 난 것은 영병원 바닥 아래였다.
나는 유나를 바라봤다.
“들었어요?”
“응.”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재민이가 어릴 때 세 번 두드리면 내가 두 번 대답했어. 숨바꼭질할 때.”
나는 말없이 기다렸다.
유나가 손가락으로 난간을 두 번 두드렸다.
딱. 딱.
바닥 아래에서 응답이 돌아왔다.
딱.
그것이 오재민이 보낸 신호인지, 다른 사람이 흉내 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물어볼 곳이 생겼다.
제17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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