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시험을 앞둔 밤, 유나는 나를 영병원 옥상으로 불렀다.
찬바람이 불었다. 멀리 아파트 창문들이 차례로 켜졌다가 꺼졌다. 어디선가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버스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여섯 시가 되면 가정을 위해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여섯 시가 지나서야 일을 시작한다. 그 평범한 차이가 보관국 화면에서는 전부 같은 숫자로 처리되고 있었다.
“네가 내 기록을 보면서 자꾸 내 표정을 확인하잖아.” 유나가 말했다.
“괜찮은지 걱정돼서요.”
“그 마음은 알아. 그런데 내가 괜찮다고 하면 안 괜찮아 보인다고 믿고, 안 괜찮다고 하면 대신 뭔가 하려고 할 거야?”
나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그럴지도 몰라요.”
“그럼 내일은 조금만 덜 그래 줘. 나도 결정할 수 있어.”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유나가 손바닥에 올려놓은 종이시계를 봤다. 오재민이 만든 것이다. 종이 가장자리는 여러 번 만져 닳아 있었다.
“재민이가 사라진 뒤 나는 멈춘 세계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됐어.”
“언제부터요?”
“정확한 날짜는 몰라. 처음엔 동생을 찾으러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사람들이 다 멈춘 시간에 걸어 다니면 못 찾을 사람이 없을 줄 알았거든.”
“찾았어요?”
“그때는 찾았다고 믿은 적도 있어. 다음 날엔 그 기억이 없어졌고.”
나는 수첩을 펼치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들려준 것은 수사 기록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였다.
유나는 종이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나한테도 시간이 빚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제일 무서웠어. 빚을 갚으려면 동생을 다시 잃어야 하는 줄 알았거든.”
“이번에는 다르게 해 봅시다.”
“그래. 혼자도 아니고, 대신도 아니고.”
나는 유나에게 대학 시절 우리 둘이 처음 만난 이야기를 꺼내려다 멈췄다. 그 기억은 내게도 완전하지 않았다. 보관국에 들어갔다 나온 뒤 몇 번이나 같은 만남을 처음 겪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혹시 내가 유나 씨를 여러 번 잊었다는 게 화나요?”
“예전엔 화났어.”
“지금은요?”
“네가 기억을 잃는 것도 싫지만, 그걸 네 탓만 하는 건 더 싫어.”
나는 난간에 기대섰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았다.
“한 번은 내 기억이 돌아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그런데 돌아온 기억이 진짜인지 또 확인해야 하더라고요.”
유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어리석은 말을 기억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세상에 있는 컴퓨터를 전부 고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는 것이다.
“그런 말 안 했어요.”
“했어. 지금도 비슷하게 말해.”
나는 웃었다. 잃어버린 기억이 돌려받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의 말을 임시로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빌림이 계약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언젠가는 틀렸다고 말할 자유가 남아 있었으니까.
옥상에서 내려왔을 때 채원이 관측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실 게 있어요. 단, 영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화면에는 다음 새벽 05:59의 출입 기록이 미리 표시되어 있었다. 아까 우리가 발견한 미래 서명처럼 이미 작성된 문서였다. 미리보기를 눌렀더니 관측실에 앉은 오유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수동 종을 세 번 쳤다.
하지만 실제 유나는 내 옆에 서 있었다.
“이거 녹화 영상이에요?” 내가 물었다.
“구분할 수 없는 상태예요. 기록 날짜는 내일이고, 생성 날짜는 오늘로 찍혀 있어요. 장치가 예상 장면을 합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상 속 유나는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나는 대리 근무에 동의합니다.’
옆에 있던 진짜 유나가 팔짱을 꼈다.
“내가 저렇게 정중하게 말한다고?”
“그러게요. 저는 유나 씨가 보통 ‘그딴 거 안 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정확해.”
우리는 웃었지만 영상은 끝나지 않았다. 화면 속 여자는 의자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세 번째 귀환문 사진이었다. 그녀는 관측창에 손을 대며 누군가를 불렀다.
‘재민아, 누나 왔어.’
유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곧바로 영상을 멈추게 했다.
“그만.”
채원은 재생을 중단했다. 기록 파일의 원본은 건드리지 않았다. 유나가 왜 멈추자고 했는지 따로 묻지 않았다.
서아는 영상 속 목소리의 특징을 메모했다. 2011년 C-07 음성 합성 장치는 죽은 사람의 말투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주저하는 순간까지 흉내 낼 수 있었다. 미래 장면이라면서 유나의 얼굴을 띄운 것은 예언이 아니라 그녀를 흔들기 위한 미끼일 수도 있었다.
유나는 화면 속 자신이 종을 치기 직전에 아주 잠깐 입술을 깨무는 것을 발견했다. 본인은 놀랐을 때 왼쪽 입술이 먼저 올라가는 버릇이 있었고, 영상 속 여자는 오른쪽 입술을 깨물었다고 했다.
“그걸로 가짜라고 확정할 수 있겠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 하지만 왜 다른지 확인할 수는 있겠지.”
채원은 영상의 좌우 반전 여부를 확인했다. 카메라가 반대로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옷에 붙은 출입증 글씨는 정상 방향이었다. 화면 속 유나의 행동은 실제 인물의 습관을 일부 흉내 냈지만 정확하지 않았다.
서아는 이 차이를 영상 옆의 설명란에 기록했다. ‘합성 의심’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행동 비일치’라고 적었다. 우리는 자꾸 결론을 쓰고 싶어 했지만, 결론을 미뤄 둘 때 비로소 보이는 차이도 있었다.
문석은 영상의 연결 정보를 검사했다. 원본 서버가 응답하지 않아 출처를 단정할 수 없었지만, 파일 속 배경 소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멈춘 세계에서 들리지 않아야 할 기차 출발 안내음이었다.
“이건 관측실 녹화가 아니네.” 그가 말했다. “배경을 다른 데서 가져와 합친 거야.”
“다행이네요.” 내가 말했다.
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인 건 내가 저걸 그대로 믿지 않았다는 거지. 합성한 사람이 내 동생 목소리도 알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녀는 다시 화면을 보았다. 내일의 자기 모습은 영상 파일 안에서 정지해 있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앞에서 닿을 것처럼 가까웠지만, 유나는 한 걸음도 다가가지 않았다.
“도겸아, 저 여자는 내가 아니야.”
“알아요.”
“근데 누군가 저걸 나라고 등록하면?”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영상 하나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속도는 빨라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선명한 영상이 아니라 그 영상이 누구의 동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원칙이었다.
관측실 뒤편에서 세 번째 귀환문의 비상등이 깜박였다.
[미래 관측자 신원 검증 요청]
[현재 오유나와 기록 오유나: 일치하지 않음]
처음으로 시스템도 둘이 다르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다음 줄이 나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우선 적용: 기록 오유나]
제16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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