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형은 생각보다 초라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예전의 그는 반듯한 정장과 날카로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우리가 그를 만난 날들은 대개 누군가의 기억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오늘 그는 회색 외투를 입고 남기혁 형사가 지정한 면담실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낡은 파일철이 들려 있었다.
“나는 사람을 지우려고 이 장치를 만든 게 아닙니다.”
첫마디부터 변명이었다.
“그럼 왜 경고를 동의로 바꿨습니까?” 남 형사가 물었다.
“안에 있는 사람이 반응하지 않을 때 회로가 멈추면 산소 공급도 끊길 수 있었습니다. 비상 응답을 대신하는 장치가 필요했어요.”
“그 장치가 사람의 의사까지 대신할 필요는 없었겠죠.” 유나가 말했다.
구태형은 그녀를 보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유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 이름이 등록된 건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치고는 내년에 급여명세서까지 발행됐네요.”
나는 웃지 않았다. 내 농담을 그녀가 빼앗아 간 것은 처음이었지만 오늘은 기꺼이 양보했다.
구태형은 파일철을 펼쳤다. 2011년의 작업 일지, 1998년 사고 당시의 복사된 수기 기록, 2027년 갱신 주기에 관한 내부 검토표가 있었다. 모두 원본은 아니었다. 서아는 그 점을 표지에 적었다.
“왜 지금 내놓는 겁니까?” 남 형사가 물었다.
“U-00을 완전히 끊으면 세 번째 문 안쪽의 호출 회선도 함께 끊깁니다. 그게 싫어서요.”
“우리는 처음부터 완전히 끊자는 말을 안 했어요.” 유나가 말했다.
그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2011년 이후 종이 세 번 울린 비상 호출이 기록되어 있었다. 시스템은 그것을 모두 ‘대리 동의’라고 처리했다.
“안쪽 사람은 여기서 계속 신호를 보냈습니다.” 구태형이 말했다. “저는 그걸 보존했습니다.”
“보존했다고요?” 내가 되물었다. “신호의 뜻을 뒤집어 놓고?”
구태형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때는 장치가 꺼지면 안쪽 사람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깥 사람의 기억을 빼도 된다고는 누가 허락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면담실 시계는 이상할 만큼 요란하게 초를 세고 있었다. 구태형은 아까부터 오른쪽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두 번, 쉬었다가 한 번. 나는 제3 귀환문 앞에서 들은 신호가 떠올라 손을 움켜쥐었다.
“그 소리 그만 내 주세요.” 내가 말했다.
그가 손을 멈췄다.
“습관입니다.”
“어디서 생긴 습관이죠?”
구태형은 답하지 않았다. 남 형사는 그의 손등을 바라보며 질문의 의미를 확인했다. 오래된 반응을 새로운 증거로 쓰기에는 너무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살리려 했다는 주장을 확인하겠습니다.” 형사가 말했다. “그러나 그 주장이 누군가의 시간을 대신 가져갈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구태형의 눈썹이 떨렸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는 말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계산서를 받아 드는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분노했지만, 분노 때문에 아직 모르는 사실까지 지어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아가 조용히 개입했다.
“우리가 확인하고 싶은 건 죄책감의 크기가 아니라 명령을 수정할 수 있는 위치예요. 내일 또 다른 사람을 시험 대상으로 부르면 안 됩니다.”
구태형은 테이블 가장자리로 낡은 열쇠 하나를 밀었다. 금속에는 U-0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수동 중단키예요. 실제 회선을 끊는 키가 아니라 새로운 계약을 쓰지 못하게 막는 키입니다.”
“그걸 왜 지금 주죠?” 유나가 물었다.
“과거에는 한 사람이 대신 버티는 게 모두를 살리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구태형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으니까요.”
나는 순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오유나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뜻인가. 그러나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남 형사가 남은 자료의 출처를 확인하고, 공개 가능한 진술의 범위를 정리했다.
면담실 문을 나오자 유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구태형의 말을 계속 곱씹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 한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저 사람은 왜 내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지?”
“죄를 인정하기 싫어서겠죠.”
“모르겠어. 그런데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해도 내가 바로 괜찮아지는 건 아니야.”
서아가 차 키를 꺼내며 말했다.
“맞아. 그 사람의 사과와 유나의 회복은 별개의 일이야.”
유나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햇빛을 바라봤다. 낮이었다. 다음 새벽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이 자신에게 남겨진 것인지 다시 빼앗길 시간인지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입안에서 굴리던 ‘이제 다 해결될 거예요’라는 말을 삼켰다. 실망스러운 약속을 던지는 대신 우리가 확인한 사실을 다시 알려 줬다. 수동 중단키는 보유했고, 기존 회선의 안전을 확인한 뒤 사용할 것이며, 유나는 실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할 수 있다고.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믿을 수 있겠어.”
면담 뒤 우리는 곧장 장비실로 가지 않았다. 열쇠가 작동하는 순간 기존 회선까지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채원에게 별도 시험 계획을 요청했고, 내부의 사람에게 신호가 전달될 수 있는 안전선을 확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복도에서 나는 유나에게 물었다.
“저 사람 말 믿어요?”
“아니. 그래도 열쇠가 실제로 뭘 하는지는 확인할 가치가 있어.”
“이러다 제가 보관국 버전 관리 책임자가 되는 거 아닐까요?”
“이미 비공식 고객센터 같아.”
“상담 만족도 몇 점?”
“방금 전까지 1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유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은 2점.”
그날 밤 강문석이 수동 중단키의 규격을 확인했다. 예상과 다른 점이 있었다. 열쇠는 새로운 계약을 쓰는 기능만 잠갔지만, 이미 등록된 미래 계약은 그대로였다. 2027년 1월 1일의 예약 명령에는 닿지 않았다.
“내일 시험만 막는다고 끝나지 않아.” 문석이 말했다.
나는 캘린더를 펼쳤다. 오늘까지도 우리가 막은 것은 눈앞의 사고뿐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날에 누군가 이미 우리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때 유나의 휴대전화에 새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당신은 보호자입니까, 대신 근무할 사람입니까?’
유나는 화면을 나에게 보여 주고,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둘 중 하나만 고르라는 질문에는 답 안 해.”
잠시 후 화면 아래 작게 세 번째 항목이 떠올랐다.
[선택 보류: 허용되지 않음]
제16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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