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8:59.
영병원 별관의 새벽 공기는 오래된 동전처럼 차가웠다. 나는 관측실 유리 밖에 섰고 유나는 안쪽 의자에 앉았다. 남 형사는 출입구를 지켰다. 서아는 수첩에 숫자를 쓰고, 문석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두 장치의 시각을 비교했다.
05:59:00.
시스템 화면이 하얘졌다.
“유나 씨?”
그녀가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벽에 붙은 안내문 모서리가 허공에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문을 닫던 관리인의 손도 멈췄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나만 움직일 수 있는 정지 시간은 익숙했다. 이상한 건 이번에는 내 손목에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유나는 움직였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유리 가까이 왔다.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이 벌어졌다. 순간 관측실 안쪽에 다른 복도가 겹쳐졌다. 같은 자리에 지하철 승강장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형광등 아래에 노란 안전선이 있었다. 그 선 위에 어린 남자아이의 운동화 한 짝이 놓여 있었다.
“도겸아, 들려?”
이번에는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려요. 밖으로 나오세요.”
그녀는 문고리에 손을 댔지만 손이 통과하지 않았다. 금속이 아니라 얇은 막을 만진 사람처럼 손바닥을 움찔했다.
“여기가… 내 옛날 기억 같아.”
“어떤 기억이요?”
“재민이가—”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노란 선 너머에서 누군가 ‘누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운동화만 반대편으로 한 뼘 움직였다.
벽시계는 그대로였다. 보관국 화면에만 초가 흘렀다.
[시험 대상 접속]
[대리 기억 추출: 1차 준비]
[예상 정산: 11초]
나는 문석이 만들어 놓은 독립 기록 버튼을 눌렀다. 정지된 세계에서 전자 장비가 반응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작은 붉은 불은 켜졌다. 화면에는 ‘기록 중’이라는 글씨가 떠올랐다. 그 뒤에 손을 떼었다. 지금 당장 서버 선을 뽑는다고 유나를 꺼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어떤 말을 시키면 안 돼요.” 유나가 말했다. “내가 뭘 봤는지도 지금은 확신 못 하겠어.”
“알아요.”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손안에는 종이 조각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빈손이었다. 노란 종이에는 글씨가 반쯤 젖어 있었다.
‘06:11 / 반대쪽 출구’.
나는 그 내용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유나가 그 문장을 낭독하면 동의로 바뀌는 장치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종이를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나는 여기 들어오기로 한 적 없어.”
“예. 그건 제가 들었어요.”
노란 선이 있는 승강장은 현실의 공간보다 조금 좁아 보였다. 광고판에는 가게 이름 대신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11년 6월 11일. 종이에 적힌 날짜와 같았다. 나는 발을 옮기려다 멈췄다. 광고판 속 사람 얼굴은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실제 관측실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나가 손바닥을 유리에서 떼자 안쪽에 물기가 남았다. 손가락 자국 다섯 개. 그 흔적이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나는 자세히 살폈다. 손가락이 네 개만 보였다.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유나의 손에는 분명 다섯 개가 있었다. 이건 그녀를 비추는 거울도, 단순한 투영도 아니었다.
“왜 손이 다르게 나와요?” 내가 묻자 유나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보는 쪽에는 네가 두 명이야.”
“뭐라고요?”
“하나는 지금 소리치는 너. 하나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너.”
나는 뒤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정지된 세상은 내가 보는 것과 유나가 보는 것을 다르게 보여 주고 있었다. 같은 사건의 증인이 둘이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장면을 본다는 뜻은 아니었다.
화면의 글씨가 갑자기 바뀌었다.
[관측자 침묵 확인]
[대리 서명 수행]
“침묵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유리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유나는 내 쪽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화면에 싸움을 걸면 그들은 내 분노를 ‘반응’으로 세려 들 것이다.
나는 수첩에 직접 적었다.
05:59:00. 오유나: ‘나는 여기 들어오기로 한 적 없어.’
그리고 창 앞에 펼쳐 보였다.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세상이 움직였다. 관리인이 문을 닫는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고, 안내문이 벽에 붙었다. 전자시계는 05:59:59를 가리켰다.
유나는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 잤어?”
나는 얼어붙었다.
“기억 안 나요?”
“방금 문을 봤어. 그런데 지금은 너무 멀게 느껴져.”
남 형사가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의 장비를 확인했다. 서아의 수첩에는 05:59:00 다음 숫자가 05:59:59였다. 문석의 독립 기록 장치에는 쉰아홉 초 동안 들어온 음성이 없었다. 그러나 내 수첩에만 유나가 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재민이 이름을 불렀어요.” 내가 말했다.
유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놀라움보다 먼저 경계가 왔다.
“그 말을 내가 했다고 확정하지 마. 지금 기억이 없으니까.”
“확정 안 해요. 제가 들은 내용이라고 적을게요.”
서아는 기록에 두 열을 만들었다. ‘도겸의 관측’과 ‘유나의 현재 진술’. 둘이 다르면 다르게 남겼다. 남 형사는 자료 보존 봉투에 내 수첩의 사본을 넣었다.
그때 유나가 호주머니를 뒤졌다.
“어?”
그녀가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노란 종이였다. 승강장에 있던 종이와 같은 색이었지만 물에 젖어 있지 않았다. 그 위에는 볼펜으로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너를 내보내기 위해 재민이가 들어갔다.’
노란 종이는 바닥에 평평하게 누웠다. 금속 바닥 위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이 이상하게 무거운 것처럼 보였다. 유나는 그것을 주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 형사는 우리가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조금 떨어져 섰다.
“보존해도 괜찮겠습니까?”
유나는 대답하는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이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렸다.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원본은 보존해 주세요. 대신 내 동의로 작성된 쪽지라고 기록하지 마세요. 내가 갖고 있었다는 사실만 맞아요.”
남 형사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 나는 작은 차이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새삼 느꼈다. 종이가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종이에 적힌 문장을 그 사람이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유나는 종이를 떨어뜨렸다.
나는 주워 들지 않았다. 누가 썼는지, 언제 넣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었다고 말했던 사람이 한 문장 앞에서 울었다.
“거짓말일 수도 있어.” 내가 말했다.
“알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서 더 무서워. 나도 믿고 싶거든.”
05:59 시험 결과 화면이 켜졌다.
[대상자 정상 귀환]
[연장 계약 수립 성공]
우리가 보기에 시험은 실패해야 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성공이라고 적었다. 누군가 이미 그 결과를 이용해 다음 단계를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제16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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