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결제 버튼을 누를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가격을 안 보는 것이다.
나는 그 실수를 수십 번 했다. 인터넷 쇼핑, 게임 아이템, 휴대전화 요금제. 그런데 비상 퇴근이라는 글씨가 붙은 손잡이 앞에서 마지막 남은 기억을 결제하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안 누르면 어떻게 됩니까?”
강문석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구태형에게 붙잡히겠죠.”
“누르면요?”
“보관국의 감사 통로로 들어갑니다. 대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나는 손잡이를 놓았다.
“거래는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나는 강문석의 손가락이 하나 없다는 사실을 다시 보았다. 그가 다친 이유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지금 온전하게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처에 관한 질문부터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닐 듯했다.
“한 가지만 더 묻죠. 당신은 왜 우리를 돕습니까?”
강문석이 바닥의 먼지를 발끝으로 밀었다.
“처음에는 과학이 사람을 구한다고 믿었습니다. 다음에는 기술의 오용을 막아야 한다고 믿었죠. 그런데 내가 만든 출입 장치로 사람들이 사라졌어요. 내가 다치고 기억을 잃은 뒤에도 그건 바뀌지 않았습니다.”
“손가락은 어떻게 됐습니까?”
“출입구가 닫힐 때 끼었습니다. 정지 세계의 물체는 항상 안전하게 되돌아오는 게 아니더군요.”
유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 사건을 직접 봤던 사람처럼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 제가 있었어요.”
강문석이 웃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어떤 문은 닫힐 때 사람을 두고 갑니다.”
나는 손잡이 대신 배기구를 택한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정해진 두 길 중 하나를 고를 필요는 없지만, 세 번째 길에도 비용은 존재한다.
“그럼 다른 길로 나가겠습니다.”
유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없다니까?”
“문이라는 게 꼭 손잡이만 달려 있어야 문은 아니잖아요.”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인쇄기 배기구를 살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폭. 아래로 이어지는 환기 덕트가 있었다. 회사 인프라 관리 일을 하면서 배운 가장 쓸모 있는 진실이 있다. 누가 정문을 막아 놓으면 관리용 통로를 찾으면 된다.
“저기로 갑니다.”
강문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보관국의 설계도에 없는 길인데.”
“그러니 좋은 거죠.”
우리는 절단기 받침대를 밀어 덕트 입구를 열었다. 먼지가 쏟아졌다. 유나가 먼저 들어갔고, 내가 장부를 가슴에 안은 채 뒤따랐다. 뒤에서는 구태형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차도겸 씨!”
그가 계단을 내려오며 불렀다.
“시간이 없어요! 그 증거물은 당신을 살릴 수 없다고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덕트의 금속 바닥이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다.
“원본하고 외부 기록이 둘 다 살아남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말, 보관국 직원도 하던데요.”
목소리가 멀어졌다.
덕트 끝은 인쇄소 뒤편의 배수 시설로 이어졌다. 우린 도로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햇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내 휴대전화는 5시 58분을 가리켰다.
강문석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 사람은요?”
유나가 어둠 속을 돌아봤다.
“자기 선택을 한 거야. 원래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사람인지도 몰라.”
나는 장부에 적힌 ‘외부 기술 책임자’라는 글씨를 떠올렸다. 그가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다만 지난 일곱 달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장부를 경찰에 보내야 합니다.”
“종이째로 보내. 사진만 보내면 바뀔 수 있어.”
나는 남기혁 형사에게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는 가까운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몇 분 뒤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감사 마감은 오후 6시. 현실의 몇 분은 이제 너무 길었다.
유나가 장부 마지막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이름이 없는 항목이 하나 더 있었다.
대상자: 공란.
징수 항목: 인식자 전원.
승인 시각: 18:00:00.
“이건 뭐죠?”
“구태형이 마지막으로 준비한 계약이야.”
그녀가 말했다.
“감사에 실패하면 너 하나가 아니라, 네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잊게 돼. 네 엄마나 남 형사만이 아니라.”
“입막음을 단체 할인으로 하는군요.”
농담을 했지만 속이 차가워졌다. 만약 일곱 번의 분기가 모두 실패했다면 이번에는 관계자 전원이 비용을 치르게 되는 구조였다.
나는 종이를 넘겼다. 서아의 필체가 아닌, 붉은색 잉크로 된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동의하지 않은 기억은 보관할 수 없다. 다만 당사자가 이의 신청을 포기하면 예외로 한다.’
“이의 신청을 포기하면?”
나는 방금 전 두 시계를 떠올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건 진짜 선택권이 아니었다. 선택지를 거부하고 이의를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수법이었다.
“감사 통로로 들어가면 그 포기서를 쓰게 만들겠군요.”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아가 일곱 문장을 남긴 거야. 네가 매번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가슴 속에 이상한 열기가 차올랐다. 내가 과거의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그 사람이 나를 살리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김태오의 이름 옆에 적힌 표시를 다시 보았다. 미반환과 보관 확인. 단어는 비슷하지만 의미가 달랐다. 기억만 남은 사람과 몸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른 칸에 분류된다면, 보관국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육체를 보존하는 시설이 있어야 했다.
“혹시 우리가 본 0번 보관실 아래에 누가 누워 있는 겁니까?”
유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서랍 복도까지야. 아래층에 있는 시설은 서아만 알고 있어.”
“그럼 서아가 왜 나오지 못한 거죠?”
“그 사람은 자기 권한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어. 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최종 서명권을 갖고 있었거든.”
나는 구태형이 집요하게 내 서명을 요구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는 서아의 권한을 직접 빼앗을 수 없으니 나를 통로로 삼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저는 서아 대신 서명할 수 있습니까?”
“네가 누구의 이름을 대고 동의하는지에 따라 달라. 구태형은 그 틈을 노렸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앞으로 어떤 서류에도 다른 사람 이름을 쓰지 않겠습니다. 제가 책임질 수 있는 건 제 말뿐이에요.”
유나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였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다른 곳에서 누군가 나를 조종하려 해도, 적어도 지금 내가 잡고 있는 손은 내 선택이었다.
“서아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0번 보관실 아래층. 누구의 기억에도 속하지 않는 곳.”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사람들은 서아의 동의를 얻지 못했거든. 그래서 그녀를 기억도 현실도 아닌 경계에 남겨 뒀어.”
나는 사진을 꺼내 들었다. 그 얼굴이 선명해진 건 감사 요청을 했을 때뿐이었다. 그녀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구할 수 있을까.
유나는 사진을 보며 말했다.
“서아는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를요?”
“아니. 이번에는 네 선택을.”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였다.
“차도겸 씨.”
나지막한 여성의 목소리.
“누구시죠?”
“진서아예요.”
나는 숨을 멈췄다. 오랫동안 찾던 이름이 전화기 너머에서 나를 불렀다.
“살아 있어요?”
“그 질문에는 대답하기 어려워요.”
“어디 있습니까?”
“네가 한 번도 내려오지 못한 층. 내 목소리는 외부 전화기에 30초만 실을 수 있어.”
나는 시계를 봤다. 5시 59분 12초.
“어떻게 구하면 되죠?”
나는 휴대전화의 통화 시간을 내려다봤다. 표시된 초는 실제 세계 기준으로는 무의미했지만, 서아의 숨소리는 분명 시간이 부족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도겸아.”
“네.”
“예전에는 내가 네 이름을 부르면 바로 알아들었는데.”
“지금도 알아들어요. 다만 누가 부르는지 잊었을 뿐이에요.”
수화기 반대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아?”
“모릅니다.”
“그래도 그 대답이면 돼.”
나는 순간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그녀 혼자 떠안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내가 잘못했다고 확신할 수 없는 부분까지 함부로 사과하면, 그녀의 선택을 동정하는 셈이 될까 봐 말을 삼켰다.
“그리고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게 있어.”
똑같은 말이었다. 원본도 그렇게 말했다.
“왜 다들 구하러 오지 말라는 겁니까?”
“구태형은 누군가를 구하려는 네 마음을 이용해 출입 권한을 얻었어.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서명을 하는 순간이야.”
“서명 안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줘.”
전화기 너머로 종이가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감사실에 들어가면 내 이름을 증인으로 적지 마. 구태형이 거기에 이름을 올려 두었거든.”
“그럼 누구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요?”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는 사람.”
통화가 흔들렸다. 누군가 반대편에서 전화를 빼앗으려는 듯, 금속성 잡음이 들렸다.
“그리고 도겸아.”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네가 잊어도 괜찮아. 난 우리가 했던 약속을 아직 기억해.”
통화가 끊겼다.
시간은 5시 59분 47초.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기억이 없어도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남아 있었다.
유나가 내 손목을 잡았다.
“이제 13초.”
멀리서 남기혁 형사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종이 장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방 던지면 내용물 흐트러집니다.”
“그럼?”
“제가 여기까지 뛰겠습니다.”
나는 전력으로 달렸다. 그가 내 손을 붙잡는 순간 장부를 넘겼다.
“증거물! 반드시 보존해 주세요!”
남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퇴근하러 갑니다.”
그 말이 끝나자 거리의 소리가 끊겼다.
오후 6시 정각.
세계가 멈췄다.
나는 손바닥을 폈다 쥐었다. 몇 번이나 시간을 겪었는데도, 여섯 시가 되는 순간에는 매번 작은 두려움이 찾아왔다. 현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 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나중에 내 이야기를 믿을 수 있도록 나는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경찰차 앞에 섰던 남기혁 형사가 장부를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도겸 씨.”
그의 손목에는 검은 종이 띠가 있었다.
“이번엔 저도 같이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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