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테이프는 없었다.
적어도 물건 목록에는 없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상상으로 찾아다니는 대신, 그 물건을 폐기했다고 적은 사람에게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썼는지 물어야 했다.
“중복 자료라는 판정 기준이 있어요?” 내가 이채원에게 물었다.
“있죠. 내용뿐 아니라 생성 경로와 저장 매체, 권리 관계를 비교해야 합니다.”
“그런데 2011년 기록에는 어떻게 돼 있죠?”
이채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낡은 결재서 사진에는 '4번과 3번 동일'이라는 한 줄만 있었다. 누가 들어 보고 같은지 판단했는지, 어느 구간을 비교했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이걸로는 폐기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정식 조사 범위 안에서 당시 이관 업체의 검수 보고서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이채원은 3번 테이프의 물리 상태를 점검했다. 보존용 설비와 절차를 갖춘 뒤, 일부 구간만 시험 재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서아는 재생 여부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듣겠습니다. 다만 원본에 담긴 다른 사람의 사적인 말이 나오면 중지해 주세요.”
“그렇게 하죠.” 이채원이 말했다.
테이프가 돌아갔다. 천천히 회전하는 기계는 내 손목시계보다 훨씬 믿음직해 보였다. 기계는 기록을 저장할 수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정하는 권한은 없었다. 적어도 이 장치는 그런 척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잡음뿐이었다. 그러다 아주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누가 있어요?'
서아가 숨을 삼켰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기가 어디에서 울고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온갖 표정을 읽어 내는 시선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다음 여자아이 목소리가 나왔다.
'사람들이 있어. 내가 말해 줄게.'
박혜림이 이야기했던 내용과 비슷했다. 한 아이가 안쪽에서 물었고, 다른 아이는 바깥에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두 목소리가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곧 남자의 말이 따라왔다.
'안쪽의 말은 먼저 적어 주세요. 대답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아버지처럼 들렸다. 어머니가 오래전에 녹음해 둔 생일 축하 메시지와 비교하면 비슷한 억양이 있었다. 하지만 음질은 좋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목소리로 추정'이라고만 적었다.
서아가 화면에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아직은 이름을 모르겠어.”
“이름 모르면 일단 듣기만 해.” 유나가 대답했다.
여자아이 둘의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한 아이는 문 안에 있었고, 다른 아이는 밖에서 질문을 전달했다. 목소리 사이로 가끔 낡은 전화기의 누름음이 흘렀다.
'밖에 있으면 내 말을 전해 줘.'
'누구한테?'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말고, 날 찾는 사람한테.'
그 순간 서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녀가 손을 들자 이채원은 곧바로 재생을 멈췄다.
“왜?” 내가 물었다.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에게 저런 말을 한 것 같아.”
“누가 그랬는지 기억나?”
“얼굴은 모르겠어. 그런데 내 기억에는 내가 문 안에 있었거든. 지금 들리는 건 바깥에 있는 아이 말이야.”
우리는 수첩에 두 개의 가능성을 적었다. 서아가 기억하는 위치가 달라졌을 수도 있고, 목소리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것일 수도 있었다. 원본을 들었다고 기억의 빈칸이 저절로 채워지는 건 아니었다.
이채원은 시험 재생한 구간을 보존용 사본에 옮기면서 파형 분석 화면을 보여 줬다. 2011년 전자 파일은 두 어린 목소리의 중간을 잘라 붙여 놓은 상태였다. 그 뒤에 어른이 읽은 '누구를 먼저 내보낼까'라는 질문을 끼워 넣었다.
“이 정도면 단순한 손상이 아니네요.” 이채원이 말했다.
남 형사는 문장과 녹음 경위를 정리했다. 하지만 그는 범인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편집된 파일이 있다는 사실과, 누가 왜 만들었는지는 다른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2011년 전자 파일의 자동 색인 결과를 다시 확인했다. 거기에는 어린 목소리 두 개가 하나의 사람으로 합쳐져 있었다.
`화자 A = 화자 B = 진서아`.
“이게 시작이었네요.” 내가 말했다.
서아는 화면을 찬찬히 읽었다.
“두 아이가 한 사람으로 등록됐으니까, 내 대답이 다른 아이의 대답이 됐던 거야.”
“그럴 수 있어. 다만 어떤 말이 누구 것이었는지는 더 확인해야 해.”
이채원은 3번 테이프의 재생 가능한 부분이 더 남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서아는 그날은 거기까지 듣겠다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어떤 결론을 눈앞에 두고도 기꺼이 멈출 수 있었다.
우리는 테이프의 음성이 완전히 복구되었다고 오해하지 않기로 했다. 재생 장치는 낡았고, 원본의 일부는 사라졌으며, 사람 목소리를 구분하는 작업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분명히 보이는 차이는 있었다. 1998년 테이프의 화자는 질문하고, 기다리고, 자기 이야기를 했다. 2011년 전자 파일의 화자는 숫자를 고르고 다른 사람의 순서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기계가 말투까지 바꿨네요.” 내가 말했다.
“기계가 스스로 했는지, 누군가 바꾸라고 지시했는지도 나눠 봐야 해.” 강문석이 대답했다.
서아는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왜 어른의 질문을 싫어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고 했다. 학교에서 발표할 때마다 선생님이 정답을 요구하면 갑자기 목이 막혔던 기억. 누군가가 '누구부터 구할래?' 하고 물었다면 그 아이는 아마 아무 말도 못 했을 것이다.
“내가 침묵해서 누군가 못 돌아왔을까?”
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나는 짧게 말했다.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넌 그때 아이였어. 어른들이 기계를 만들고 문을 열고 닫았는데, 네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운명을 떠맡길 수는 없어.”
“그렇지만 내가 밖에 있었다면…”
“밖에 있었다고 해서 선택할 권한이 생기는 건 아니지.”
서아는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채원은 테이프를 정리하며 조용히 우리에게 물을 건넸다. 그 시간이 필요했다. 서아는 무언가를 확신하는 대신, 확신이 없어도 자신에게 잘못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비슷했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구하려고 만든 기술이 사람을 망쳤다고 해서 모든 죄가 내게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아버지의 선의를 믿는다고 해서 눈앞의 피해를 덮을 수도 없었다.
우리는 남아 있는 기록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정리했다. 박혜림의 메모와 보관 안내문, 원본 음성의 일부와 2011년의 재편집 흔적. 그 자료들이 가리키는 범위는 분명히 적을 수 있었다. 아직 알 수 없는 것 또한 따로 적었다.
나는 수첩 한쪽에 굵은 선을 그었다. 왼쪽에는 '확인', 오른쪽에는 '추정'. 오랫동안 흐릿했던 칸이 조금씩 나뉘었다.
유나는 테이프에서 아이가 “찾는 사람한테 전해 달라”고 했던 부분을 다시 듣고 싶다고 말했다. 이채원은 원본에 무리가 가지 않는 보존용 사본으로만 확인하게 했다.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게 아니라,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알려 달라고 했어.” 유나가 말했다.
“같은 말인 줄 알았는데 다르네.” 내가 대답했다.
“가족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 아이를 찾는 사람은 친구일 수도 있고, 간호사일 수도 있고.”
서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2011년 시스템이 왜 가족 주소를 기본 귀환지로 만들었는지 생각했다. 주소란이 비면 프로그램은 오류가 나기 쉽다. 그래서 개발자는 기본값을 넣는다. 하지만 사람에게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해서 아무 집이나 넣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 작은 기본값이 수많은 사람의 삶을 흔들었다.
그날 저녁, 박혜림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우리가 허락한 범위의 질문을 듣고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 기억나요. 문 안의 아이는 바깥 아이에게 이름을 알려 주지 말라고 했어요.”
“왜요?”
“밖에 나가면 자기 이름을 누군가가 가져갈까 봐 무섭다고 했죠.”
박혜림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 번은 이런 말을 했어요. '내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는 사람을 믿지 마세요.'”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2011년에 누군가 내 이름을 빌려 문을 열었다. 그보다 십삼 년 전, 이름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던 아이가 있었다.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제14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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