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이라고 해서 반드시 편지가 남아 있는 건 아니다.
특히 1998년에 보낸 편지라면 더 그렇다.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경고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서아의 표정을 보고 닫았다. 그녀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는 얼굴이 때로는 기대하는 얼굴보다 절박했다.
우리가 찾아간 건물은 지금 문구점이었다. 유리문에는 '복사·제본·택배 접수'라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문구점 사장은 십 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켰다고 했다. 그는 오래된 우체국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했다.
“제가 예전에 있던 직원 명단까지 알지는 못해요. 건물을 사들인 게 아니라 임대한 거라서요.”
우리는 그에게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공개된 기관 기록과 보관업체 이관 목록을 찾았다. 남 형사는 관련 사건의 정식 조회를 요청했고, 문은경은 자신이 관리하는 목록에서 옛 우편 전송 계약서를 확인했다.
나는 문구점에서 공책 세 권을 샀다. 사장은 왜 이렇게 많이 사냐고 물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요.”
“그러면 더 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회사원이었으면 웃고 지나갈 농담이었다. 나는 결국 한 권을 더 샀다. 유나가 계산대 옆에서 볼펜을 흔들었다.
“그건 필요 없어. 넌 고장 난 펜도 버리지 못하잖아.”
“실수로 계약서를 쓰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래.”
“그럼 이름 말고 장보기 목록부터 적어.”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렸다. 비 오는 거리는 시간 정지와 잘 어울렸다. 움직이지 않는 빗방울은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거기에 사람을 가둬 둘 수는 없다.
오후에는 박혜림의 흔적이 나타났다. 동명이인이 여러 명이어서 확인이 필요했지만, 1998년 영병원 별관 '음성 전달 업무 보조'로 근무한 박혜림이라는 사람의 서명이 있었다. 2011년에도 보관 기록 이관 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표시돼 있었다.
“한 사람의 서명이 두 시대에 있어.” 서아가 말했다.
“그렇다고 둘 다 실제로 그 사람이 쓴 건지는 모르지.” 남 형사가 대답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으려고 이 먼 길을 온 듯했다.
문은경의 소개로 연락이 닿은 건 박혜림의 조카였다. 그는 이모가 몇 년 전부터 외부 연락을 줄이며 지냈다고 했다. 주소를 알려 주지는 않았다. 대신 사건의 범위를 듣고 이모에게 의사를 물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전화기 너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누구라도 친척의 오래된 상처를 갑자기 낯선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기록을 추적하다 보니 당시 우체국 직원들의 교대 명단이 나왔다. 그 가운데 박혜림 옆에 적힌 담당 업무가 눈에 들어왔다. '야간 회선 정리'.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밤마다 끊긴 전화를 다시 연결하는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날의 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렸다.
나는 오래된 교환기 사진을 찾아보았다. 스위치가 줄지어 있었고, 사람이 일일이 선을 연결해야 했다. 요즘 회사 서버를 생각하면 우습기도 했다. 우리는 몇 밀리초를 줄이려고 온갖 장비를 교체한다. 그런데 그날은 사람이 누군가의 말을 듣게 만들기 위해 선 하나를 천천히 꽂았을지도 모른다.
“제일 빠른 길을 찾는 게 아니었겠네.” 내가 말했다.
서아가 물었다. “뭐가?”
“그날 누군가가 말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거. 장치가 빠르든 느리든, 듣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잖아.”
남 형사는 당시 회선 계약자와 실사용자를 구분해 표시했다. 계약자는 영병원이었다. 실사용 장소는 병원 별관과 가족 주거지의 보조 호출 장치로 나뉘어 있었다. 기록에 차정수의 서명이 일부 남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모든 통화를 관리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서명이 있는 사람이 책임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남 형사가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편하게 정리한 사건이 뒤늦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는지 보고 있잖아요.”
서아는 그에게 조용히 고맙다고 말했다. 형사는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었다.
“형을 찾는 데 급해지면 저도 그렇게 할까 봐 겁납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남도윤의 이름이 여러 문서에 제멋대로 붙어 있던 장면을 떠올렸다. 남 형사는 형이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믿고 싶은 결론을 먼저 써 버리면 정작 살아 돌아올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문구점에서 산 공책 가운데 한 권을 남 형사에게 건넸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저도 수첩 있어요.”
“이건 빈 수첩이잖아요. 이미 적은 결론이 없으니까요.”
“말은 잘하네.”
유나가 옆에서 말했다. “제일 문제는 적지도 않은 결론을 이미 안다고 말하는 거지.”
나는 네 번째 공책을 내 가방에 넣었다. 누군가 말할 때마다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써 놓기 위해서였다.
옛 우체국 건물에는 우편함 흔적이 있었다. 지금은 광고 전단이 꽂혀 있었지만 벽의 작은 틈은 여전했다. 나는 그 틈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누군가 보낸 편지가 여기에 들어왔는데, 정작 받아야 할 사람에게 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서아는 내 옆에 와서 말했다.
“안 간 편지가 꼭 나쁜 건 아니야.”
“왜?”
“그 편지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수 있잖아. 누가 일부러 막았는지, 받는 사람이 거절했는지 아직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가 돌아왔다고 해서 사라진 것도 아니고, 도착했다고 해서 읽었다는 뜻도 아니었다. 우리 사건의 여러 장부가 딱 그 차이를 지우면서 시작됐다.
저녁 무렵, 박혜림이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진서아라는 이름 때문에 연락했다고 들었습니다.”
서아가 휴대전화를 받았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왜 문서에 있는지 아직 모릅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네요.”
수화기 너머로 오래된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박혜림은 만나기 전에 꼭 확인할 것이 있다고 했다.
“기록을 확인하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싶은 건가요?”
“둘 다요.” 서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찾고 싶지는 않아요.”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숨이 흘렀다.
“1998년에 그걸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다음 날 공개된 작은 도서관의 상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박혜림은 사람들 눈이 있는 곳이 편하다고 했다. 유나는 우리 모두의 동의를 받고 약속 시각과 장소를 적었다.
그런데 전화가 끊기고 나서 손목시계가 낯선 경고를 띄웠다.
[1998년 발신인 대면 예정]
[진서아 수신 상태: 검증 대기]
[자동 면담 기록 생성 허용?]
“안 돼.” 내가 말했다.
유나가 화면을 들여다봤다.
“또 대신 기록하려고?”
“우리가 사람을 만나겠다고 한 것뿐인데, 시스템은 곧바로 그 사람의 증언을 자기 것처럼 쓰려 해.”
나는 허용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독립 녹음도 박혜림이 원할 때만 하기로 했다.
남 형사는 외부망에서 안내 문구를 출력해 왔다. '당사자가 원하는 범위만 증언하고 언제든 중단할 수 있음.' 이토록 평범한 문장에 우리가 왜 이렇게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새삼 화가 났다.
그날 밤, 서아는 우리 집 식탁에서 오래된 사진들을 펼쳤다. 어머니가 내온 따뜻한 국을 조금씩 먹으며 사진을 바라봤다. 어떤 사진에는 내가 있었고, 어떤 사진에는 얼굴이 긁힌 아이가 있었다.
“내가 그때 여기 있었던 걸까?” 그녀가 물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그때도 다 알지는 못했어. 떠나고 싶어 하지 않던 아이가 있었다는 건 기억해. 하지만 이름은 함부로 붙이고 싶지 않다.”
서아는 사진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 모습이 묘하게 슬펐다. 서아는 기억을 찾고 싶은데, 기억을 찾기 위해 누군가를 증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박혜림이 보낸 짧은 메시지였다.
'옛날 편지는 내게 없습니다. 대신 우체국이 마지막으로 돌려보낸 소리를 기억합니다. 그 소리는 처음부터 어린아이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진 속 긁힌 얼굴이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내가 물었다.
서아가 대답했다.
“내가 들은 목소리와, 누군가 내 목소리인 척했던 소리가 따로 있었을지도 몰라.”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58분.
이제 여섯 시가 되면 시간이 멈춘다는 사실보다, 여섯 시에 누가 무엇을 말하게 만들지가 더 두려워졌다.
제14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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