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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14화
PAYLUA ORIGINAL · 제14화

14화. 시계를 깨면 남는 것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178자

오프라인 책장
어머니 손목의 검은 띠가 멈춘 건 정확히 3초였다. 나는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러고는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든 해 봐!” 유나가 깨진 시계 조각을 주워 들었다. 조각 표면에서 아주 작은 초침이 돌아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나머지 부품은 멈춰 있는데 그것만 움직였다. “보관국이 현실에 손을 뻗을 때에는 기준점이 필요해.” 나는 깨진 시계 조각을 마룻바닥에 가지런히 배열했다. 분해하는 도구도 없이 내부를 만지는 일은 위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리가 산산조각 났는데도 이 시계는 계속 움직였다. 금속 부품에서 정상적인 태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안쪽에는 숫자 대신 누군가 연필로 적은 글씨가 있었다. ‘기억의 주인이 동의하지 않았을 때에는 연결을 유지하지 말 것.’ 아버지 필체인지 내 필체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래된 손때가 묻어 있었다. 누군가 이 장치를 만들 때부터 위험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내게는 시계의 원리를 완벽히 이해할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손목의 띠가 움직일 때 어떤 부품이 반응하는지 보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다시 실험할 수 있도록 수첩에 배치도만 그렸다. “무언가 이 시계를 기준점으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응. 아까 네 엄마가 시계를 꺼내는 순간, 보관국이 집 주소를 붙잡은 거야.” 나는 시계의 뒷면을 펼쳐 수첩 종이 위에 올렸다. 0613이라는 숫자 주변에 새로운 글씨가 떠올랐다. ‘열람 장치. 구형.’ 기술자는 언제나 구형 장비를 좋아한다. 동작 원리를 알기 쉽고, 새 장비만큼 똑똑하게 사람을 속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손목에 붙은 띠는 분리할 수 있어요?” “밖에서 억지로 뜯으면 기억까지 뜯겨.” “그럼 이 시계를 쓸 수밖에 없겠군요.” 나는 깨진 유리 조각을 시계 뒷면의 홈에 맞췄다. 두 조각이 딸깍 맞물리자 시곗바늘이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띠가 느려졌다. 유나가 말했다. “정지시켜. 여섯 시 이전에 저걸 오래 돌리면 하루치 시간을 빌려 쓰게 돼.” “얼마나요?” “빌리는 만큼 기억을 잃어.” 내 손이 멈칫했다. 어머니의 기억을 구하려고 내 기억을 잃는 일은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관국이 원하지 않는 증인까지 끌고 가려는 중이었다. 같은 거래를 반복하면 결국 그들이 이긴다. 나는 형사에게 물었다. “지금 서류에 시간 적혀 있습니까?” “오후 4시 47분.” “그다음 장에도 적어 주세요. ‘증인 본인 의사 확인 없이 강제 이동 시도.’” 남 형사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요?” “증거를 남기면 저쪽은 계약 위반을 늘리는 겁니다. 제6시 보관국은 최소한 자기 규칙을 지켜야 움직일 수 있는 곳 같아요.” 형사는 종이에 문장을 썼다. 그 순간 띠 표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유나가 내 의도를 알아챘다. “계약 조항을 현실의 증인이 동시에 읽으면 강제 처리가 멈추는 걸까?” “시험해 봅시다.” 나는 수첩 11화에서 적은 문장을 읽었다. “분기 시점 이후 각 주체는 독립된 기억 주체로 취급한다. 타방의 말소는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없다.”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나는 누구한테도 어딜 데려가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 말이 끝나자 검은 띠가 종잇조각처럼 찢어졌다.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남 형사는 곧바로 증거봉투에 넣었다. 형사는 이제 초능력과 수사 절차를 동시에 취급하는 데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건 국과수에서 뭐라고 할지 모르겠네요.” “고생하시겠네요.” “고생은 당신이 더 하는 것 같은데.” 그가 웃지 않은 채 대답했다. 우리는 어머니를 형사가 마련한 안전한 숙소로 모셨다. 경찰 보호 절차는 현실의 규정대로 진행했다. 휴대전화를 바꾸고, 숙소 위치를 최소한의 인원에게만 공유했다. 기억을 지우는 조직을 상대로 이런 조치가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후 5시 20분. 나는 강문석의 흔적을 찾아 회사 인근의 오래된 인쇄소로 향했다. 유나가 알려 준 곳이었다. “왜 하필 인쇄소죠?” “보관국이 전자 기록을 고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문석 씨는 종이에만 남겼거든.” 인쇄소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회사 보안팀의 조직도를 떠올렸다. 구태형이라는 이름은 시스템 관리자 목록에서 몇 번 봤다. 얼굴을 대면한 적은 거의 없었다. 보통 개발자에게 보안팀장은 비밀번호 변경 공지나 개인정보 교육 영상의 마지막에만 나타나는 존재다. 그런데 그가 지난 일주일 동안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면 문제는 더 컸다. 누군가 기업의 정상적인 보안 절차를 이용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그 기록을 보관국의 명단과 동기화하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 있는 한 상대는 내가 언제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유나 씨. 구태형이 당신을 알아봅니까?” “당연히. 난 예전부터 저 사람하고 싸웠어.” “그런데 아직 회사에 남아 있네요.” “증거가 없으니까. 저 사람은 늘 정상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입막음했어. 징계, 계약, 증인 없는 면담. 필요한 경우에만 보관국을 이용하지.” “그렇다면 현실에서 잡을 수 있겠네요.” “아직은 아니야.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범죄에는 피해자의 말만 남거든.” 그 말을 듣고 속이 답답했다. 어떤 사건은 경찰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남는 증거 자체가 너무 적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수첩과 인쇄된 종이에 매달려 있는 거겠지. 나는 휴대전화의 회사 메신저를 열어 마지막으로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하 서버실 장비를 임의로 교체하지 마세요. 업무 장애 조사 중입니다. 장비 이동 요청이 오면 담당자 서명부터 받으세요.’ 팀장이 곧바로 답했다. ‘너 진짜 회사 와서 해결해. 대체 어디야?’ 내가 다시 답장하기 전에 그는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그리고 강문석이란 사람 누구야? 아까 내가 검색하니까 인사팀이 왜 찾느냐고 전화했어.’ 나는 화면을 캡처하지 않고 종이에 내용을 베꼈다. 인쇄소는 재개발 구역 끝자락에 있었다. 커다란 절단기와 낡은 복사기가 구석에 놓여 있었고, 벽에는 십 년 전 달력이 걸려 있었다. 주인은 손님이 왔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차도겸 씨죠?” “어떻게 아세요?” “일곱 달 전에 똑같은 표정으로 왔어요. 그때는 더 젊어 보였는데.” “일곱 달 사이에 많은 일이 있어서요.” 주인은 대답 대신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내 이름과 숫자 37이 적혀 있었다. 유나가 준 은색 열쇠와 같은 숫자였다. 안에는 프린트한 회로도와 간단한 메모가 있었다. ‘강문석, 분기 서버 물리 입출력 담당. 본 문서를 받은 차도겸은 관리자 계정 접속을 중지할 것.’ 나는 메모를 보자마자 사원증을 내려다봤다. “늦었는데요.” 사원증 뒷면에는 내가 모르는 작은 홀로그램이 생겨 있었다. `MINUTE-0 / USER 007`. 나는 인쇄소의 진열대를 지나면서 생각했다. 복사기 위에는 동네 학교의 졸업 앨범, 가게 홍보 전단, 교회 안내문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잊지 않으려고 사진을 찍고 글을 인쇄한다. 저 서류들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납품 물량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지 않은 한 시절이 될 것이다. “왜 37번이죠?” 나는 인쇄소 주인에게 물었다. “봉투에 처음부터 그렇게 써 있었어요. 내가 들은 건 그 숫자보다 이름을 먼저 확인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름만 같으면 누구에게나 줍니까?” “아뇨. 손에 있는 흉터를 보라고 했어요.” 나는 왼쪽 팔꿈치를 걷었다. 주인은 오래된 사진을 꺼냈다. 흉터의 모양이 확대되어 있었다. “사진도 저쪽에서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바꿀 수 있으면 바꿔 보라고 하죠. 네 번이나 훔쳐 가려다 실패했으니까.” 그의 태연한 대답에 내가 더 당황했다. 이곳은 내가 생각했던 평범한 동네 가게가 아니었다. 주인은 문을 잠갔다. “이 봉투를 건네면 문을 잠그라고 했어요. 밖에서 기다리는 놈이 있거든.” 유나가 창밖을 보았다. 흰색 승합차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운전석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평범한 회색 점퍼를 입은 남자였다. “누굽니까?” “회사 보안팀장. 구태형.” 강문석의 회로도를 펴 보니 회사 지하 서버실에 없는 장치가 한 개 있었다. 정전 상태에서 작동하는 독립 전원 장치. 전력이 음수로 찍혔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 이관 장치는 서버가 아니다. 서버는 동기화를 위한 문고리다. 문 자체는 사람에게 있다.’ 그 문장을 읽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사람에게 문이 있다고요?” 유나는 내 왼쪽 손목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조금 전까지 없었던 반원형의 흉터가 있었다. 처음 정지 시간을 경험했을 때 사라졌던 시계줄 자국과 정확히 겹쳤다. “네가 마지막에 만든 건 기계가 아니었어. 매일 오후 여섯 시에 열리는 자기 자신이라는 출입구였지.”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평범한 개발자였다. 출입구가 되고 싶어서 야근한 적은 없다. 그런데 6월 13일의 설계도에 분명 내 이름이 있었다. 설계자: 차도겸. 검증자: 진서아. 안전 책임자: 강문석. 외부 운영 승인: 구태형. 유나가 내게 속삭였다. “서아는 위험을 막으려 했고, 문석 씨는 실패를 기록했어. 구태형은 모든 기록을 지우려 했지.” “그럼 구태형이 보관국 사람입니까?” “아니.” 그 대답이 더 무서웠다. “평범한 사람이야. 그래서 멈춘 시간 밖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거고.” 시간은 5시 56분이었다. 구태형이 차에서 내려 인쇄소를 향해 걸어왔다.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유리문 너머에서 명찰을 내보였다. ‘회사 보안팀.’ 그리고 아주 상냥하게 말했다. “차도겸 씨. 현업 시스템 접근 기록을 확인할 일이 있습니다. 면담 좀 합시다.” 나는 인쇄소 주인에게 뒷문이 있는지 물었다. 주인은 절단기 아래를 가리켰다. 낡은 철제 바닥판이 들려 있었다. “저기로 나가요. 근데 조심해요. 그 통로 끝은 강문석 씨가 막아 놨어요.” “왜요?” “자기한테 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봐.” 나는 뒷문을 열었다. 계단 아래에 내 이름이 적힌 표지판이 있었다. [차도겸 전용 출입구.] [외부 시각 17:59:59.] 아직 5시 57분이었는데, 계단 안쪽에서는 이미 여섯 시 직전의 시계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왔다. 얼굴이 지워진 사람이 아니라, 분명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진에서 본 강문석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원본을 만나고 왔군요. 그럼 이제 본인이 왜 일곱 번째인지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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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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