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금속판의 교체 가능성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래된 물건이잖아. 중간에 수리를 했겠지."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수리 기록이 없어요."
"그럼 기록부터 찾아보면 되지."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일이 단순해졌다. 나는 그동안 세상이 멈추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모든 문제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증거가 불분명할 때 확인 절차를 거치는 건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아는 금속판을 봉투에 넣고 교체된 시점을 추정할 만한 사진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2004년의 통에는 판이 보이지 않았다. 2011년에는 판이 부착된 상태였다. 2019년 기록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2011년 전후에 판이 붙었다고 볼 수는 있어도, 현재 손에 든 판이 그때의 것인지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귀가 증명서를 너무 믿지 말자." 내가 말했다.
"그렇지." 유나가 답했다. "이름보다 사람이 먼저지."
점검이 끝난 뒤 어머니는 우리에게 잠깐 산책하자고 했다. 지금까지 가족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외출을 제안했다. 나는 동행하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집 앞 편의점까지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다. 유나는 집에서 대기하겠다고 했고, 나는 어머니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돌아오자 손에는 작은 우유 두 개가 있었다.
"너 어릴 땐 저거 먹으면 꼭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저 유당불내증인가 봐요."
"그런 말은 몰랐지. 그냥 네가 우유랑 안 맞는 줄 알았어."
어머니는 웃더니 나를 똑바로 봤다.
"아까 너희가 이야기하는데 나도 무서웠다. 누가 우리 집을 통째로 기억에서 지울까 봐. 그런데 내가 너를 키운 건 누가 장부에 적어서가 아니거든."
나는 눈을 깜빡였다.
"매일 아침 밥을 먹이고 학교 갈 때 가방을 챙겼고, 네가 밤새 열이 나면 옆에 앉아 있었어. 그건 무슨 시스템이 지운다고 없어지는 일이 아니야. 네가 잊으면 내가 다시 말해 주면 되는 거지."
"엄마가 잊으면요?"
"그럼 네가 말해 주겠지. 우리 둘 다 잊으면 사진을 보면 되고. 사진도 없어지면… 그때는 오늘부터 다시 살아야지."
그 대답은 아버지가 남긴 기술 문서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나는 과거를 지키기 위해 현재의 어머니를 집 안에 가두려고 한 내 모습을 떠올렸다. 기억을 지키는 일이 삶을 멈추는 일이어서는 안 됐다.
어머니는 냉장고에 우유 하나를 넣었다. 다른 하나는 나에게 건넸다. 나는 배가 아플지 모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한 모금 마셨다. 달았다. 어머니가 웃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어머니와 단둘이 식탁에 앉았다. 유나와 서아는 거실에서 문서를 정리했고 남 형사는 취합한 자료를 수사 담당자에게 넘겼다.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계속 함께 움직이던 사람들이 잠시 다른 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조용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왜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밥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처음에는 일이 길어졌다고 생각했지. 그다음에는 사고가 났다고 생각했고. 마지막에는 뭘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럼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옆집 아저씨 말은 믿지 않았어요?"
"믿고 싶었어. 그런데 그 사람이 봤다는 날, 네 아버지 외투는 여전히 집에 있었어. 신발도 그대로였고. 사람이 다른 옷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로 결론을 내리진 않았지."
"엄마는 그때도 증거를 구분했네요."
"무슨 증거까지야. 애를 데리고 살려면 마음을 다잡아야 하니까 그랬던 거지."
어머니는 싱크대 위에 오래된 수첩을 펼쳤다. 장을 넘길 때마다 조그만 칸에 연필 글자가 보였다. 쌀을 산 가격, 내 약을 탄 날짜, 집세 낸 날. 그 사이에 빨간 볼펜으로 적힌 글이 있었다.
'6/11 밤 6:11 초인종. 문 열었으나 없음.'
"이건 누구 초인종이에요?"
"우리 집. 네 아버지가 사라지고 며칠 뒤에도 울렸어. 고장인 줄 알았는데 똑같은 시간에만 울려서 이상했지."
나는 전율을 느꼈다. 18:11. 우리가 171번 버스에서 보았던 귀환 시각이자, 미전달 확인서의 자동 인계 시각.
"그걸 왜 처음에 말하지 않았어요?"
"네가 매일 새로운 일을 들고 오는데, 오래된 초인종 고장까지 말하면 뭘 어쩌겠니. 그리고 나는 그게 이번 일이랑 관계 있는지 몰랐어."
어머니는 괜히 웃었다. 그 웃음에는 스스로도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피로가 있었다.
나는 그 수첩을 쫓아가듯 읽었다. 6월 12일 칸에는 우유 세 개라고 적혀 있었고, 13일에는 병원 문의라고 돼 있었다. 14일에는 빨간 잉크로 '그 아이 밥 안 먹음'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어떤 아이요?"
어머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 친구였어. 병원에 같이 있던 아이. 네 아버지가 그 아이도 집에 보내야 한다고 했는데, 어디서 기다려야 하는지 몰라서 며칠 같이 지냈지."
"집에 보냈어요?"
"기억나는 건 여기까지야. 그 아이가 갔다고 생각한 날에 집에 그 아이 신발이 없었으니까. 지금 와서 정말 갔다고는 못 하겠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실종을 자신이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생각은, 사실을 모르는 가족에게도 평생 남는 무게였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았다.
"도겸아. 내가 네 아버지 대신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는 종이를 아무리 많이 보여 줘도, 내가 문을 열고 그 사람을 본 적 없으면 그날은 안 돌아온 거야."
"그럼 그 기록은 지워 버릴까요?"
"아니. 누가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 알아야지. 그걸 지우면 다른 사람이 또 그 말을 믿을 거잖아."
나는 어머니가 기술자였다면 좋은 개발자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버그를 발견했다고 로그를 삭제하는 게 아니라, 왜 생겼는지 확인하자고 말하는 사람이니까.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수첩을 사진으로 남기는 데 동의를 구했다. 원본은 어머니가 보관했다. 서아는 연도가 없는 페이지를 추정 연도로 단정하지 않도록 표기했다. 우리는 사진과 글을 증언으로, 전자 장부는 시스템 기록으로 구분했다. 둘 다 중요하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워서는 안 됐다.
서아가 돌아오자 우리는 어머니 수첩의 날짜를 확인할 방법을 논의했다. 어머니의 기억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기억에 기대지 않고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첩의 뒤표지 안쪽에는 옛집 집주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현재 연락 가능한 공적 경로를 통해 자료 제공이 가능한지 알아봤다. 집주인 가족은 오래된 계약서를 일부 보관하고 있었지만 개인정보와 관련된 부분은 보여 주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는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설치된 인터폰의 모델명과 공동 배선 위치가 남아 있는지 물었다.
며칠 전이라면 나는 누군가가 숨긴 자료가 있다면 당장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자료를 보유한 사람에게도 지킬 삶이 있다는 사실이 먼저 떠올랐다.
남 형사는 우리 사건과 직접 관계 없는 가족 기록은 수사 목적으로도 함부로 가져올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 말은 때로 느렸지만, 우리가 보관국의 일방적인 결정에 맞서며 지키려는 원칙과 같았다.
연락을 마친 뒤 어머니가 작은 메모 한 장을 내밀었다.
'보조 단말기 고장 신고 번호.'
그 밑에 오래된 업체 이름이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그 메모 덕분에 전혀 다른 경로로 1998년의 초인종 기록을 찾아갈 수 있었다. 커다란 서버보다 수첩 뒤에 적힌 여덟 자리 숫자가 오래 남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연락이 왔다. 1998년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는 재개발돼 지금과 같은 건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관리회사로부터 확인된 옛 출입기록 파일 일부가 있었다. 예전 인터폰 업체의 설치 이관 자료였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 18시 11분에 초인종이 울렸다는 어머니 수첩의 날짜들과, 남아 있는 호출 로그의 날짜가 일부 일치했다.
문제는 호출의 발신 위치였다.
'공용 현관'이 아니었다.
`발신: 세대 내부 보조 단말기`
나는 화면을 다시 보았다.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 것은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 안에 있던 다른 단말기가,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13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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