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보온통을 여는 데에도 순서가 필요했다.
나는 그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고마웠다. 문을 열면 세상이 끝나고, 서명하면 누군가 사라지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손잡이를 살펴보고 봉인의 상태를 기록하는 일이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다. 오늘의 나에게 가장 멋진 능력은 ‘서류를 천천히 읽기’였다.
문은경은 원본 봉인 사진을 내밀었다. 2004년 촬영된 사진에는 금속 고리 옆에 작은 구멍 두 개가 있었다. 지금은 세 개였다.
"보관 중에 한 번 열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언제요?"
"2011년 점검 기록에 '추가 봉인'이라고 적혀 있어요. 하지만 제가 그때 담당한 건 아닙니다. 직접 열렸는지, 봉인만 바뀐 건지는 따로 확인해야 해요."
아버지가 남겼다고 믿고 싶은 물건에 다른 사람이 손댔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했다. 동시에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족과 보관인의 동의를 받고 개봉 과정을 기록했다. 속에는 음식이 없었다. 얇은 유리병 한 개, 접힌 종이 다섯 장, 휴대용 녹음테이프, 그리고 손바닥만 한 작은 판이 들어 있었다. 판에는 보온통과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98-06-11 / H`
다섯 장 가운데 한 장은 완전히 빈 종이였다. 나머지에는 번호와 항목이 있었다.
1. 귀가 확인을 요청한 사람
2. 실제로 현관을 통과한 사람
3. 귀가를 직접 확인한 사람
4. 확인할 수 없다고 답한 사람
다섯 번째 빈 종이 맨 아래에는 연필로 작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적지 말 것.'
서아는 종이를 보고도 곧장 아버지가 무엇을 의도했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 종이의 섬유 상태와 당시 작성된 기록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처음엔 답답했다. 하지만 오래된 기록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이 바뀌는 일을 수없이 봐 왔으니, 지금만 예외로 둘 수는 없었다.
"이 다섯 장이 귀가 확인서입니까?" 남 형사가 물었다.
"보관 대장에는 확인서와 부속 자료라고 돼 있습니다." 문은경이 말했다. "무엇을 확인한다는 문서인지는 저도 오늘 처음 봤습니다."
서아가 1번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차정수의 이름과 1998년의 날짜가 있었다. 2번은 공란이었다. 3번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연필로 흐리게 쓰여 있었고, 그중 하나는 지워져 있었다. 4번에는 '확인할 수 없음'이라는 문장이 또렷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돌아왔다고 썼어요?"
"아니." 서아가 대답했다. "돌아오고 싶다고 요청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귀가를 확인한 칸은 비어 있어. 지금 단계에선 거기까지만 말할 수 있어."
나는 한동안 빈칸을 보았다. 아버지가 살아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2번에 글자가 보이기를 바랐다. 바람이 너무 크면 빈칸조차 글자로 읽힐까 봐 겁이 났다.
"테이프는 어떻게 합니까?"
"복제 가능한 방식으로 먼저 보존할게." 서아가 말했다. "원본을 바로 재생하면 훼손될 수도 있어."
그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강문석은 아날로그 소형 녹음 장비를 빌려 왔고, 재생 전에 테이프 상태를 확인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고 해서 무조건 틀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논의했다. 어머니는 동의하되, 도중에 듣기를 중단하고 싶으면 언제든 멈추게 해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처음으로 이 사건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가족의 기억을 찾는다면서 가족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강제로 듣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강문석은 테이프를 복제하면서 간단한 파형을 보여 줬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잡음이 중간에 두 번 끊겼다. 편집 흔적일 수도, 오래된 테이프의 손상일 수도 있었다. 음성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 목소리 하나로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지?" 내가 물었다.
"그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해도 마찬가지야. 더군다나 이건 날짜가 적힌 테이프지, 그 날짜에 녹음됐다고 검증된 테이프가 아니니까."
나는 오디오가 재생되기 전 아버지의 목소리를 기억하려 애썼다. 막상 떠올리려니 한 문장도 명확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 현관에서 신발끈을 묶던 뒷모습은 떠올랐지만 목소리는 자꾸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섞였다.
어머니에게 듣고 싶은지 물었다.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 옆에 앉았다.
"전부 들을게. 다만 내가 중간에 나가면 따라오지 마. 잠깐 혼자 있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누구나 자신의 속도로 과거를 들어야 했다.
서아가 이어폰 한쪽을 어머니에게 건네고, 녹음기를 천천히 작동시켰다. 낡은 장치의 작은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녹음은 41초였다.
처음에는 냄비 뚜껑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는 누구도 대신 서명하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사람과 돌아오는 걸 보는 사람이 서로 다른 경우에는 두 기록을 분리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목소리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텔레비전 뉴스 소리보다도 친숙한 억양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 기억이 그렇게 반응한다는 뜻이었다. 녹음 속 화자가 누구인지 아직 검증하지 않았다.
'첫 번째 출구는 몸이 움직이는 곳입니다. 두 번째는 기억이 돌아오는 곳이고, 세 번째는 안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뜻을 밖으로 전하는 곳입니다.'
서아의 손이 멈췄다. 우리가 120화에서 추적했던 세 번째 귀환문의 기능과 겹치는 설명이었다.
'세 번째 문으로 나온 목소리는 신원 확인이 끝나기 전까지 귀가 완료로 처리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원한다고 해도, 확인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다른 가족에게 떠넘기지 마십시오.'
잡음 뒤에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그럼 난 어디로 가요?'
남자의 대답이 이어졌다.
'먼저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말해 줘. 그다음에 찾자.'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대신 식탁에 놓인 오래된 내 그림을 끌어당겼다. 사람 넷 중 노란색을 칠한 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애가 이런 목소리였던 것 같아."
서아가 말했다.
"목소리를 기억하시는 것과 같은 인물인지 확인하는 것은 별개예요. 그림은 보관해 두고 다른 단서를 찾아볼게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프가 끝나자 어머니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따라가려 했지만 약속을 지켰다. 부엌에서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괜찮으실까?" 내가 물었다.
"지금은 기다려 드리자." 서아가 대답했다.
그 사이 나는 파형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혹시 어머니가 들은 목소리를 나와 다르게 느꼈는지, 아버지인지 아닌지 당장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답을 듣는다고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한참 뒤 어머니가 돌아왔다. 손에는 물컵 두 개가 있었다.
"목소리가 그 사람 같긴 하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확신하진 못하겠다. 네 아버지가 말할 때는 꼭 끝을 조금 올렸거든. 저 사람은 많이 지쳐 있는 목소리네."
그 말은 내게 어떤 목소리 인식 프로그램보다 중요했다. 동시에 그것은 어머니의 기억이었다. 확인 결과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녹음 속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한 번 더 재생했다. 세 번째로 듣고 싶다고 할 때는 잠시 쉬자고 제안했다. 기억을 되찾으려는 조바심 때문에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들으면, 실제로 듣지 않은 부분까지 들었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우리는 각자의 첫인상을 종이에 따로 적었다. 나는 '아버지와 닮은 목소리', 어머니는 '확신하지 못함', 서아는 '화자 미확인'. 세 장의 종이를 한꺼번에 접었다.
서로 다른 대답은 틀린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5번 종이를 다시 보았다. 빈칸에 누구의 이름도 적지 말라는 문장. 아버지는 아들을 수취인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아들의 이름을 적어 넣지 못하게 빈칸을 남긴 것일까.
그때 강문석이 2011년 점검 대장을 화면에 띄웠다.
'보관통 재봉인 / 확인서 2번 항목 사본 회수.'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2번 항목이 원래 비어 있던 게 아니에요?"
"최소한 그걸 확인한 사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강문석이 대답했다. "그 안에 무슨 글자가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기록은 2011년 4월 18일 오전 여섯 시 십이 분으로 돼 있었다.
바로 세 번째 귀환문이 다시 열렸던 날이었다.
그리고 회수 담당자 칸에는 내가 이미 여러 번 본 번호가 적혀 있었다.
`승인 표시: 07`
제13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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