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도윤이라는 이름을 적어 놓고 한참 지웠다 썼다.
증거를 발견하면 신나야 할 것 같았지만, 막상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은 달랐다. 남기혁 형사에게 이 장갑 사진을 보여 줄 생각을 하니 목이 막혔다. 그에게 남도윤은 사건 관계자이기 전에, 열다섯 해 동안 생사를 확신하지 못했던 형이었다.
"형사님에게 전화할까요?" 내가 물었다.
서아가 장갑을 보관용 봉투에 넣는 최윤재의 손을 지켜보았다.
"전화는 드려야지. 다만 우리가 확인한 게 장갑의 글씨라는 걸 그대로 말해. 그 장갑을 누가 실제로 꼈는지는 아직 모르잖아."
전화를 걸기 전 나는 메시지를 세 번 고쳐 썼다. 처음에는 '형을 찾았습니다'라고 썼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두 번째에는 '형의 흔적을 찾았습니다'라고 적었는데, 그것도 너무 빨랐다. 장갑에 적힌 이름은 흔적일 수 있어도 실제 형이 그날 그곳에 있었는지는 아직 몰랐다. 결국 메시지 대신 전화 버튼을 눌렀다.
남 형사가 받기까지 세 번의 호출음이 울렸다. 나는 전화기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며 지난날의 수첩을 떠올렸다. 우리의 기록에는 그가 처음부터 용감한 형사로만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형이 나타났다는 음성 앞에서 무너진 사람을 봤다. 두 가지가 모두 그였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는 먼저 말했다.
"도겸 씨, 오늘 새 자료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제게 말하실 때는 추측과 확인된 것을 구분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는 원래 하려던 말을 잠시 지웠다. 그는 이미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번호를 눌렀다.
"형사님, 도윤 씨 이름이 적힌 장갑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누가 썼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요."
전화 너머가 잠잠해졌다.
"사진을 보내 주시겠습니까."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가 직접 증거를 수집하면 이해관계가 생길 수 있으니, 별도 담당자에게 보관 절차를 부탁하겠습니다. 그 대신 가족 자료와 대조할 수 있는지 협조하겠습니다."
단단한 말을 하는 데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나는 형사를 찾아가 직접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 전에 그가 요청한 일을 하는 편이 나았다.
최윤재는 작은 금속 상자를 하나 더 꺼냈다. 상자 안에는 2011년 배전반의 점검표가 들어 있었다. 모서리가 젖어 글씨가 번졌지만, 점검자 항목은 분명했다.
'절연장갑 1조 분실. 현장 반납 확인 못함.'
"장갑을 왜 보관하셨습니까?" 서아가 물었다.
"그날 아침 누군가 나한테 버리라고 했어요. 손에 묻은 것까지 없어져야 일이 끝난다면서."
"누가요?"
"못 봤습니다. 문 너머에서 말했거든요."
노인은 우리를 보며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그때 난 겁이 났어요. 신고도 못 하고 도망쳤죠. 나중에 사람들이 없어졌다는 소문을 듣고도 모른 척했고요. 여러분이 날 잘못했다고 해도 할 말 없습니다."
나는 무슨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그의 손이 사진을 들 때부터 떨리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 말씀해 주신 내용은 기록할 수 있습니다." 남 형사 대신 동행한 담당 수사관이 말했다. "다만 겪지 않은 일은 겪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최윤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점검표의 다음 장은 더욱 이상했다.
'복구 우선순위: 사람 / 기록 / 장치.'
글씨가 나중에 덧붙여져 있었다. 원래 순서는 반대였다고 최윤재는 말했다. 당시는 장치부터 복구하고 기록을 복원한 뒤 사람의 소재를 확인하는 절차였는데, 누군가 그 순서를 바꿔 적어 두었다고 했다.
"남도윤 씨가 적었나요?"
"가능성은 있지만 모르겠습니다. 내가 쓴 건 아니에요."
그는 자신의 낡은 작업수첩을 넘겼다. 그 안에는 같은 문장이 여러 번 연습돼 있었다. '사람을 먼저.' '사람 먼저.' '누가 돌아왔는지 확인.' 처음에는 삐뚤고 마지막으로 갈수록 힘 있는 글씨였다.
"그때 이걸 보고 따라 썼어요. 기억하려고요. 다시는 장치가 무섭다고 사람부터 지우지 않으려고."
나는 장갑의 이름보다 그 수첩을 더 오래 보았다. 기술자의 후회는 수리되지 않은 장치처럼 오래 남아 있었다.
점검표의 마지막에는 업무 중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는지 적힌 칸이 있었다. 업체 대표, 야간 관리자, 구급 연락처. 그중 두 칸은 나중에 검은 펜으로 지워져 있었다. 세 번째 칸에는 처음 보는 숫자 여덟 개가 남아 있었다.
"이건 전화번호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최윤재가 종이를 들여다봤다.
"모두가 모르는 숫자를 하나씩 적어 놓게 했어요. 누가 안에서 나왔다고 말하면, 그 사람에게 그 숫자 중 자기가 고른 두 개를 묻게요."
"비밀번호처럼요?"
"신원 확인으로 충분하진 않았죠. 누가 엿들었는지도 모르니까.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 대답할 기회를 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이 숫자가 또 다른 강제 인증 수단이 되지 않도록 원본 그대로 보존했다. 상대가 대답하지 못한다고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기억을 빼앗긴 사람이 자기 숫자를 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남 형사에게도 숫자에 대한 설명을 보냈다. 그는 오랫동안 답하지 않다가 짧게 남겼다.
'형이 어릴 때 암호를 만들자고 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절대 정답을 알려 주지 않았어요. 사람을 확인하려고 한 게 아니라, 제가 잘못된 답을 해도 미워하지 않는 놀이였죠.'
그 메시지를 읽고 나는 수첩을 덮었다. 잃어버린 것은 증거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된 농담 하나가 사라진 삶의 일부였다.
그날 오후, 시우가 장갑 내부 섬유의 사진과 작업수첩을 비교한 결과를 가져왔다. 물리적 사용 흔적만으로 착용자를 특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장갑 안쪽의 도윤이라는 글씨는 2011년 점검표에 쓰인 날짜보다 오래된 것이었다. 남도윤의 개인 물건이 현장에서 사용됐을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누가 썼는지는 여전히 미확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사건에서 '모른다'고 적는 일이 편해졌다. 이전에는 모른다는 게 곧 패배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을 섣불리 범인으로 만들지 않는 방법이었다.
최윤재는 돌아가기 전 내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그 시계, 차정수 씨 물건이죠?"
"아버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수 씨는 장치를 고칠 때 늘 회로 하나를 남겨 놓았어요. 전원이 끊겨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 기록만큼은 없어지지 않게."
나는 시계 뒷면의 스크래치를 만졌다.
"어디에 남겼습니까?"
"비상 접지선에요. 모두가 정전이면 끝이라고 생각할 때, 그는 지하에 별도 회선을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 문은 지하를 향해 있었다. 문이 아니라 선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도윤이라는 사람은 그 회선을 알고 있었나요?"
최윤재가 아주 오래 생각했다.
"그는 알고 있었어요. 차정수 씨가 만든 회선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도."
"그게 뭐였죠?"
"안에 있는 사람에게 끊을 권리를 주는 것."
그날 밤, 내가 보관하던 증거 복제본에 새 파일이 나타났다. 날짜는 2011년 4월 18일이었다.
`EXIT_NOT_ALLOWED.wav`
파일명만으로는 내용도 진위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원본 파일을 분리한 뒤, 안전한 복제본에서 재생했다.
처음에는 기계 잡음이 흘렀다. 이어 남자의 짧은 외침이 들렸다.
'장갑 벗어! 그쪽은 출구가 아니야!'
그 다음 들린 소리는 놀랍게도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였다.
'문을 여는 건 내가 아니야. 차도겸이야.'
나는 재생을 멈췄다.
그 이름을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이름이 타인의 행동을 가리는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다.
제12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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