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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105화
PAYLUA ORIGINAL · 제105화

105화. 유족 확인 칸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4,885자

오프라인 책장
"움직이지 마세요." 남기혁 형사에게 그렇게 말한 뒤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듣기엔 그가 있는 장소부터 불안정했다. 우리 뒤의 벽은 관측실이었는데, 바로 왼쪽에는 낡은 병원 복도가 겹쳐 보였다. 형광등은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고, 복도 끝에는 붉은 글씨로 '응급 출입구'라고 적힌 판이 걸렸다. "지금 당장 어디로 가야 하죠?" 형사가 물었다. "저희랑 같이요. 아직 계약하지 마세요." "무슨 계약인데요?" 아까까지 사건을 함께 검토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관측자로 부르는 문장만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내가 차도겸이라고 말해도 반응이 없었다. 내 등 뒤에 선 서아를 봐도 마찬가지였다. 이쪽 시간에서 시우는 움직이지 못했다. 손에 든 펜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유나는 멈춘 바깥쪽에 서 있었지만, 그녀가 손으로 두드리는 신호만 내 시계에 전달됐다. 유나가 가리킨 것은 내 손목시계의 두 번째 작은 바늘이었다. 그 바늘이 거꾸로 돌고 있었다. [현재 실시간 18:00:00] [보관 시간 1998.06.13 18:09:41] "지금 과거에 들어온 겁니까?" "아니요. 과거에 저장된 장면이 현재에 겹쳐진 걸 수도 있습니다. 실제 과거인지는 몰라요." 내 대답에 남 형사는 조금 안도했다. "그렇게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우리는 복도 끝으로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 타일이 서로 다른 무늬로 바뀌었다. 현재의 관측실과 1998년의 영병원이 한 장의 불완전한 사진처럼 겹쳐 보였다. 어느 위치에서는 문손잡이가 손에 잡혔고, 다른 위치에서는 손이 문을 통과했다. 나는 걸을 수 있는 부분을 시계로 표시했다. 복도의 첫 번째 문은 환자 대기실로 이어졌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 아이는 손에 종이배를 들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벽시계의 초침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종이배를 잡으려 하자 손가락이 종이 안으로 들어갔다. 영상처럼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실제 과거의 사람들입니까?" 남 형사가 물었다. "그렇게 보이긴 해요. 하지만 재현된 그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기억을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 눈으로 확인한 것만 적었다. 벽에는 사고 당시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정지 11분 이내 복구 원칙. 보호자 동의 없는 아동 신원 인계 금지.' 그 뒤에는 붉은 종이가 덧붙여져 있었다. '운영 편의를 위해 인계 완료로 일괄 처리.' 나는 이를 악물었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한 규칙이 누군가 편하다는 이유로 바뀐 것이었다. 원래 있던 '귀환'이라는 목적이 '서류상 귀환 완료'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남 형사가 옆에서 종이의 모서리를 살폈다. "이게 진짜 붙어 있었는지 모르죠." "맞아요. 여기서 본 문장들은 힌트일 뿐, 물증이라고 할 수 없어요. 나중에 실제 원문을 찾아야 해요." 우리는 그 방을 나왔다. 남 형사는 문 앞에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아이의 종이배는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다. 작은 책상 하나가 복도 중앙에 놓여 있었다. 유리 덮개 아래 계약서가 펼쳐져 있었다. [관측 책임 인수 동의서] [관측 대상: 최초 정지 11분] [현재 지정자: 남기혁] 그 아래는 빈칸이었다. 동의자의 서명칸도, 계약이 끝나는 조건도, 책임의 범위도 비어 있었다. 오직 '관측자가 나타났음을 인정한다'는 문장만 이미 체크되어 있었다. "이런 종이에 서명하는 사람은 없겠죠." 남 형사가 말했다. "누르면 사람이 있다고 인정하는 정도겠죠. 그런데 나중에 그걸 영구 책임 수령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나는 계약서 모서리를 살펴봤다. 구태형 운영사에서 사용하던 푸른 색 실선 아래로 아주 오래된 문서 번호가 숨겨져 있었다. 1998년 원본의 형식과 같았다. "여기, 옛날 서식 위에 새 계약을 덮어씌웠어요." 형사는 유리 덮개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옆의 작은 카메라를 가리켰다. 셔터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물건이었다. "저건 뭐죠?" "관측자 확인 장치겠죠. 저 장치가 형사님을 바라봤다는 이유로 동의라고 우길 수도 있어요." 나는 가방에서 검은 천을 꺼냈다. 원래는 빛이 새어 들어오는 관측 카메라를 가릴 때 쓰던 천이었다. 유리 반사에 비친 얼굴을 숨기기 위해 카메라 위로 덮었다. 그런데 기계는 고개를 돌리더니 천의 반대편에서 나를 비췄다. [대리 관측자 2순위: 차도겸] "이럴 줄 알았지." 이번에는 기계의 화면에 내 얼굴까지 나타났다. 나는 카메라를 때려 부수고 싶어졌다. 하지만 센서를 부수면 누구의 얼굴이 기록됐는지 남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바닥에 카메라의 위치를 표시하고, 얼굴 정보의 사용을 거부한다는 문장을 큰 소리로 남겼다. "본인 동의 없는 책임 인수는 거절합니다. 기록 보존은 별개로 요청합니다." 남 형사도 같은 문장을 따라 했다. 기계가 잠깐 멈췄다. [동의 기록 미검출] [최초 기록 열람 권한 유지] "둘을 분리할 수 있네요." 내가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원본을 보는 건 동의하고, 그 책임을 떠안는 건 거절할 수 있다는 거죠." 우리 앞의 복도가 잠깐 밝아졌다. 붉은 '응급 출입구' 글씨 밑에 또 다른 문구가 드러났다. '기록을 확인한 자는 사고의 책임자가 아니다.' 그 문장을 읽자 남 형사가 이마를 감쌌다. 사라진 기억 하나가 돌아오려는 듯 눈을 꽉 감았다. "누가 저 문장을 말해 줬습니다." "누구요?" "어린아이였어요. 버스 안에서." "도윤 형이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손을 펴 내가 보게 했다. 파란 잉크는 이제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얇은 흉터 하나가 보였다. 손목 안쪽에 시계바늘처럼 생긴 자국이었다. "이건 어릴 때 형이 고쳐 주던 장난감 시계에 베인 상처입니다." 유리 계약서 옆에 먼지 낀 납제 장난감 하나가 있었다. 바퀴가 네 개 달린 버스였다. 앞 유리에 작고 동그란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옆면에는 연필로 '20'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그날 버스의 모형일까요?" 내가 물었다. 남 형사는 장난감을 들어 보려다가 그만뒀다. 그것이 실제 물건이 아니라 기억의 재현이라면 만지는 순간 다른 장면이 만들어질지 몰랐다. "형이 제가 장난감을 잃어버리면 언제나 비슷한 걸 만들어 줬어요. 종이상자에 바퀴를 붙이곤 했죠." 그가 말했다. "그런데 이건 제가 잃어버린 적 없는 물건입니다. 누가 여기에 놓은 걸까요?" 나는 가까이서 모형을 바라봤다. 버스 앞면에 투명한 테이프로 붙인 작은 종이가 있었다. 글자는 반쯤 지워졌지만 끝부분이 남아 있었다. '도착을 확인한 사람이 없으면, 아직 도착했다고 쓰지 말 것.' 그 말은 지금껏 우리가 찾은 다른 자료와 닮아 있었다. 같은 작성자가 남긴 말일 수도 있고, 누군가 뒤늦게 덧붙인 것일 수도 있었다. 남 형사는 종이를 읽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라면 저런 말을 했을 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그 말이 형이 썼다는 증거는 아니네요." 복도 끝 문이 열렸다. 누군가 서 있었다. 청소년용 운동화, 낡은 학생복, 형사와 닮은 눈. 남 형사의 형이라고 불렸던 남도윤의 학생증 사진 속 소년이었다. "기혁아." 소년이 말했다. 남 형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형?" 소년은 몸을 돌렸다. 복도 저편에서 들리는 사이렌 쪽으로 달려갔다. 남 형사가 뒤따르려 하자 바닥의 타일이 꺼졌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기다려요. 저 사람이 진짜 형인지 모르잖아요." "하지만 저 목소리…." "알아요. 저도 아버지 목소리 들으면 그럽니다." 남 형사는 소년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바라봤다. 그 손이 떨리는 걸 보고 나는 제대로 잡아 줄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을 찾으면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세요?" 내가 물었다. "처음에는 왜 안 왔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지금은요?" "내가 기억해도 괜찮은지 묻고 싶어요. 도윤이라는 사람이 정말 자기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고 싶진 않으니까요." 나는 서아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내 잃어버린 기억의 대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가 내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서아는 서아였다. 과거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열쇠가 아니었다. 남 형사도 같은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형사님, 저 사람을 본 건 저희 둘뿐입니다. 그게 형님을 찾은 것과 같지는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 그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는 이를 악물고 멈춰 섰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앞에 남은 것은 문틀이었다. 소년이 지나간 자리에는 낡은 서류 한 장이 걸려 있었다. [1998년 최초 사고 현장 관측 기록] [남도윤: 현장 목격자] [남기혁: 해당 없음] 그리고 작고 붉은 글씨. [현장 목격자는 사고 이후 돌아오지 않음. 현재 관측자를 대체 지정하려면 유족 확인이 필요합니다.] 나는 계약서로 눈을 돌렸다. 남 형사가 서명할 자리는 원래 '유족 확인' 칸이었다. 누군가 유족에게 가족의 실종을 인정해 달라고 묻던 문장을, 사고의 책임을 인수한다는 계약으로 바꾼 것이었다. "형사님." 내가 말했다. "형을 찾기 위해선 서명하지 않는 게 먼저입니다." 남기혁은 눈을 감았다. 그런 뒤 여전히 비어 있는 서명칸 앞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복도가 갈라지고 화면이 깨졌다. [관측 책임 인수: 동의 없음] [대리 관측: 종료] 시간이 다시 흐를 때 남 형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기억했다. 서아도 알아봤다. 다만 오른손에 여전히 작은 흉터가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였다. "형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마치 자신에게 확인하듯 덧붙였다. "하지만 방금 본 걸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증거를 찾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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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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