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차권 뒷면에는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 있었다.
끝 네 자리가 0613이었다. 날짜와 똑같아서 나는 조금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 속 단서였다면 작가가 너무 대충 지었다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 이 종이를 보관한 사정은 그보다 훨씬 사소했다. 남기혁 형사의 어머니가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해 버스표에 적어 두었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종이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남 형사가 말했다.
"그건 저도 부럽네요. 저희 집은 뭘 버리면 나중에 꼭 그게 필요해지거든요."
유나가 곧장 물었다.
"스물여덟 년 전 버스표가 세 장인 이유는요?"
"형이 있었어요. 남도윤. 열여섯 살이었죠."
내가 그를 바라봤다. 지금껏 남 형사는 자기 가족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 기록을 찾는 동안 그는 수사관으로서 옆에 있었고, 개인 이야기를 묻지 않도록 우리 쪽에서도 조심했다.
"형도 실종됐습니까?"
"아닙니다. 실종됐다고 신고하려 했는데 접수할 필요가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남 형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1998년 6월, 그의 가족은 지방에 계신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하루 늦게 오기로 했고, 어머니와 두 아들이 먼저 버스를 탔다. 그런데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기혁에게 형을 찾지 말라고 말했다.
'도윤이는 먼저 집에 갔어.'
그 말은 이상했다. 버스가 출발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고, 형은 분명 뒷좌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에는 좌석 세 장을 끊은 영수증이 있었지만, 세 번째 표에는 '미탑승' 도장이 찍혀 있었다.
"형이 버스에서 내렸다는 거예요?"
"당시엔 그렇게 믿었죠. 며칠 뒤 집에 돌아가니까 형 방이 없어졌습니다."
"방이요?"
"정확히는 방은 있었는데 벽지가 달랐어요. 원래 침대가 놓여 있던 자리에 수납장이 생겼고, 가족사진에는 저 혼자였습니다."
서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기억이 지워진 뒤 물건까지 달라져 보이던 경험을 떠올린 듯했다. 그러나 남 형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는 제가 잘못 기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도 형 같은 사람은 원래 없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형 이름을 기억하고 계세요?"
남 형사는 대답 대신 낡은 학생증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소년은 앞머리를 어설프게 자르고 있었다. 학생증 뒷면에는 볼펜으로 작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기혁아, 남의 기억이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걸 먼저 봐.'
"학생증이 남아 있었군요."
"한참 뒤에 발견했어요. 어느 해에는 글자가 안 보이다가, 어느 해에는 멀쩡했습니다. 제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착각하는 건지, 실제로 물건이 변하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보관 장소와 날짜를 기록하기 시작했죠."
나는 갑자기 남 형사가 현장에서 원본 보존 절차를 집요하게 따지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에게는 그런 일이 기술이 아니라 오래된 생활 습관이었다.
"그래서 경찰이 되셨습니까?"
"그 이유만은 아니에요. 누군가 실종됐을 때 최소한 찾기 시작할 권한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는 했습니다."
그가 잠시 웃었다.
"막상 경찰이 되니 권한보다 절차가 많더군요. 하지만 절차 때문에 구해 낸 사람도 있습니다. 기록을 누군가 함부로 지우지 못하게 하는 데는 그게 필요하니까요."
나는 표의 뒷면 전화번호를 가리켰다. 누구 번호였냐고 묻자 그는 처음 보는 것처럼 잠시 바라봤다. 어머니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사라진 형이 연락할까 봐 적어 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어머니가 길 안내를 받으려 적은 번호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모르죠."
도윤의 학생증을 보던 유나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형사님, 형은 웃을 때 어떤 얼굴이었어요?"
남 형사는 한참 학생증을 보았다. "입꼬리보다 눈이 먼저 움직였어요.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서요."
"그럼 학교는 다니셨겠죠. 그때 친구도 있었을 테고."
그런 가능성은 나도 생각했지만 이름을 잊으면 사람도 사라지는 장치를 상대하다 보니 우리가 전자 기록만 바라보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종이 졸업 앨범, 교실 벽의 단체사진, 동급생이 적은 낙서가 남아 있을지 몰랐다. 남 형사는 학생증의 학교 이름을 가린 채 먼저 어머니에게 그 학교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겠다고 했다.
"왜 가리세요?" 내가 물었다.
"어머니가 자기 기억으로 학교 이름을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려고요. 먼저 답을 알려 드리면 그다음엔 그게 원래 기억인지 알기 어렵잖습니까."
그는 학생증을 잠깐 내게 맡겼다가 다시 가져갔다. 이렇게 조심한다고 모든 기억의 진실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보탠 말 때문에 원래 기억이 더 흐려지는 일은 줄일 수 있었다.
그때 서아가 책상 위에 두 장의 종이를 펼쳤다. 하나는 1998년 영병원 사고의 접수 목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 형사가 가져온 승차권이었다. 두 기록에서 날짜가 겹치는 것은 우연일 수 있었다. 사건의 발생 시각이 같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확인한 건 딱 하나였다. 남기혁이 어린 시절 '형'이라고 불렀던 사람에 관한 자료가 일부 남아 있다는 것.
남 형사는 별도 수사관을 통해 자신의 진술을 접수하고, 버스표와 사진의 감정 가능성을 문의했다. 학생증은 당장 우리에게 넘기지 않았다. 그것은 남 형사 개인의 소유물이었다. 그가 보이는 기록을 우리가 마음대로 결론 내릴 수도 없었다.
통화 전에 남 형사는 작은 종이 한 장에 질문을 정리했다. '형이 있었는가'는 첫 줄에서 지웠다. 그 아래 '당시 가족이 어디로 갔는가', '승차권은 누구의 것인가', '어머니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가'라고 적었다.
"형사님다운 질문들이네요." 내가 말했다.
"형사답지 않으려고 적은 겁니다. 피조사자한테 묻는 것처럼 어머니를 몰아붙일 순 없잖아요."
서아가 영병원에 관한 질문은 뒤로 미루자고 했다. 어머니가 그 병원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면 관련 기억을 억지로 만들어 내게 할 위험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 역시 어린 시절 일을 회상할 때 누군가의 질문에 따라 기억이 달라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학교 운동장에서 넘어진 일이었는데, 한 친구가 '선생님이 밀었지?'라고 묻자 내가 정말 그런 장면을 본 것 같았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는 친구가 장난스럽게 등을 쳤던 일이었다.
나는 기록장에 '질문은 사실을 찾아가야지, 사실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서아가 보고 웃었다.
"그거 네가 스스로 제일 많이 어겼던 규칙 아니야?"
"앞으로 안 어기겠다는 뜻이지."
점심 무렵 어머니와의 영상 통화가 연결됐다. 어머니는 화면에 얼굴을 비추길 꺼렸지만 목소리는 들려주겠다고 했다.
"엄마, 제가 지금 확인하려는 건 형이 실제로 있었는지예요."
"우리 집에는 아들이 하나야."
"그럼 이 학생증은요?"
통화 상대가 숨을 삼켰다. 잠시 뒤 어머니가 말했다.
"그걸 아직 가지고 있었니."
기혁의 얼굴이 굳었다.
"형을 아세요?"
"알지. 아니, 몰라. 나는 그 애가 우리 애라고 말한 적이 없어."
대답이 이상했다. 어머니는 마치 서로 다른 두 질문에 번갈아 답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화면 너머로도 느껴졌다.
서아가 내게 작은 쪽지를 밀었다.
'기억이 불확실한 사람에게 정답을 강요하지 마.'
나는 남 형사에게 눈짓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엄마, 오늘 통화는 여기까지 할게요. 건강하세요."
"기혁아."
종료 버튼을 누르기 직전 어머니가 불렀다.
"그날 도윤이가 버스에 타지 않은 건 맞아. 그렇다고 처음부터 없었던 아이는 아니야."
"어디로 갔는데요?"
"우리 집 현관에 종이가 붙었어. '돌아오면 안 된다'고. 나는 그게 누가 붙인 건지도 몰라."
통화가 끊겼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뒤 남 형사의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왔다. 발신 번호는 승차권 뒷면에 적힌 오래된 번호와 같았다. 국내에서 현재 사용 중인지도 확인되지 않은 번호였다.
[당신의 형은 여섯 시 전에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문자를 받은 뒤 남 형사가 즉시 전화를 걸어 보려 했지만 서아가 먼저 화면을 가리켰다. 발신 번호는 실제 연락처처럼 표시돼 있었으나 통신 기록에는 단순히 '미확인 발신'이라고 나와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숫자가 곧 보낸 사람의 전화기라는 뜻은 아니었다.
"당장 답장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유나가 물었다.
"누가 받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답장하지 않을 겁니다." 남 형사가 말했다.
그는 별도 담당자에게 원본 메시지 보존 방법을 문의하고 기기 화면에 보이는 내용을 촬영했다. 나는 이 장면이 낯설었다. 긴장된 순간인데도 아무도 추격을 시작하지 않았다. 정체 모를 번호를 향해 소리치지도 않았다. 다만 확인하지 못한 경로에 더 많은 정보를 건네지 않기로 했다.
나는 문득 아버지가 오래된 부품을 고칠 때 쓰던 말을 떠올렸다. '고장 난 걸 빨리 열면 더 망가지기도 해.' 그 말은 위험한 시스템에도, 조심스러운 사람의 기억에도 적용될 것 같았다.
그 아래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오래된 버스 창에 두 소년이 비쳤다. 하나는 남기혁이었다. 다른 하나의 얼굴은 빛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유나가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다 멈칫했다.
"뒤쪽 창문에도 누가 있어."
유리에는 세 번째 사람의 손만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창문 안쪽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유리 위에 대고 있는 손이었다.
버스는 주행 중이었고, 사진 아래 시각은 18:00:00이었다.
제10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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