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99화
PAYLUA ORIGINAL · 제99화

99화. 태우지 않은 증언

빚을 먹는 금고 · 2,910자

오프라인 책장
천장에서 떨어지는 종이들은 불이 붙지 않았는데도 타는 냄새를 냈다. 정우빈은 어깨 위로 날아든 한 장을 잡으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지난번부터 금고가 가장 잘하던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종이를 쥐여 주고, 쥐었다는 이유로 수령인이라 적는 것. 이번에도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녹음기부터 끄면 됩니까?” 복지관 직원이 물었다. “우선 사람들을 다른 방으로 이동시켜 주세요.” 소라가 답했다. “실제 화재인지도 확인하고요.” 직원이 화재 경보를 살폈다. 불꽃은 보이지 않았고 전기 설비의 이상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비상 동선을 따라 이동했다. 한 아이가 뒤돌아보려 하자 남자가 먼저 말했다. “괜찮아. 여기 보지 않아도 돼.” 그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단단했다. 오랫동안 이름을 숨겨 살아온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있었다. 현정은 테이프를 보관함에 넣고 봉인했다. 원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황급히 숨기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물품 상태를 적고 본인의 승낙을 확인했다. 복지관 담당자가 촬영한 영상에는 상자 개봉 전후의 상황이 남아 있었다. 증거가 한 군데에만 있지 않도록 검증 가능한 사본 보존도 절차대로 준비했다. 그때 검은 종이들이 한꺼번에 바닥에서 일어났다. 셀 수 없이 많은 영수증이 서로 겹쳐 사람 형상을 만들었다. 목이 없고 긴 팔만 있는 괴물. 한쪽 어깨에는 ‘수령 완료’, 다른 쪽에는 ‘서명 누락’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증거가 미반환 상태로 남아 있으면 손실이 발생합니다.” 괴물이 입도 없이 말했다. 우빈은 목이 마른 채 대답했다. “손실을 입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회수 계정.” “그럼 실제 손실을 증명해. 이 테이프가 없어졌다고 누가 돈을 빌린 건 아니잖아.” 괴물이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종이 끝이 팔목을 스치자 뜨거운 잉크 자국이 남았다. 우빈은 비명을 참으며 뒤로 물러섰다. 소라가 달려오자 괴물은 다른 팔로 그녀를 막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밀쳐 피하다 의자를 넘어뜨렸다. “망치요!” 서강재가 문밖에서 외쳤다. 우빈은 가방을 열었다. 정태수가 손잡이를 고쳐 준 망치가 있었다. 마침내 그것을 사용할 때인가. 금고의 쇠판을 부수면 일단 이 형상이 멈출지도 몰랐다. 하지만 괴물의 가슴에는 작은 글씨가 보였다. [증거 훼손 발생 시 / 현장 책임자 자동 등록] 우빈은 망치를 내려놓았다. 팔목의 잉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날 만큼 아팠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쉽게 사람을 공격해 놓고도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려는 장치가 분해서였다. “서강재 씨!” “네!” “밖에서 로그 남겨 주세요. 이 형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부!” 소라가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현정은 봉인한 테이프를 캐비닛 안쪽에 두고 담당자에게 열쇠를 맡겼다. 장혜숙은 남자를 복도 반대편으로 데려갔다. 어린 나래와 성인 나래는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누구의 상처를 보여 주기 위해 불러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미결이 영수증 괴물 앞에 섰다. 종이 사람과 종이 괴물은 한눈에 봐도 닮았다. 둘 다 원래는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을 찾아다니던 시스템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보관 중인 증거를 채무로 전환하는 근거가 없습니다.” 미결이 말했다. “기한 경과.” 괴물이 대답했다. “기한은 어떤 계약에 근거합니까?” “직책 승인.” “승인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괴물은 소리를 내지 못했다. 대신 온몸의 종이가 거칠게 뒤집혔다. 빈 이름 칸이 수천 개 나타났다. 미결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것은 계약이 아니라 보관 규칙입니다. 원본 08의 서신과 물품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때 벽에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기초 규정 복원] [보관 / 회신 / 인수는 각각 별도의 동의가 필요] [기한 경과만으로 채무 발생 불가] 괴물의 팔이 흔들렸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종이들이 다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마지막 한 장이 우빈의 팔목에 붙었다. [정우빈 / 현장 훼손 책임자 후보] 우빈이 소리쳤다. “난 찢지 않았어!” “팔목에 표식이 있습니다.” 괴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붙였잖아!” 소라가 달려와 우빈의 팔목을 살폈다. “표식이 있다고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야. 누가 붙였는지 사람들이 봤어요.” 서강재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그가 보관 중인 영상에는 괴물이 먼저 팔을 뻗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기록의 진위 검증은 필요하지만 적어도 우빈 혼자 남은 상황은 아니었다. 우빈은 팔목에 붙은 종이를 뜯지 않았다. 천천히 손바닥을 펼친 채 말했다. “내가 겪은 일은 내가 증언할게. 하지만 네가 나를 채무자로 만드는 건 거부해.” 검은 표식이 잿빛으로 식었다. 종이 괴물은 더 이상 사람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의 작은 영수증 더미로 주저앉았다. 잠시 뒤 복도에서 남자가 돌아왔다. 그는 우빈의 팔목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저 때문에…” “그 말까지 하지 마세요.” 우빈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당신이 상자를 안 열었기 때문에 생긴 빚이 아니라, 누군가 그걸 빚으로 만들려 해서 생긴 일이에요.”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가방 안에 넣고 다니던 두 번째 편지를 꺼냈다. “이건 정해원 씨 편지의 마지막 장입니다. 내용이 무서워서 지금까지 못 읽었어요.” 종이에는 몇 글자밖에 없었다. ‘내가 남긴 구조 요청의 최종 수신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아래에 손으로 그린 작은 네모가 있었다. 손잡이 없는 금고의 그림. ‘진짜 수신자는 이 말을 아직 듣고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우빈은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 말을 듣는다는 이유로 모두가 채무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누군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누가 책임을 뒤집어쓸지부터 찾지 말라는 말. 그때 복지관 바깥의 모든 전광판이 동시에 꺼졌다. 꺼진 화면에 숫자 하나가 떠올랐다. [00]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99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9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