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를 여는 사람은 우빈이 아니었다.
강민호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복지관의 독립된 상담 공간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현재 생활명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그 선택에 따라 서류에는 ‘보관인 본인’이라는 표기만 남았다. 장혜숙과 박현정은 물품 상태와 개봉 과정을 확인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켰다. 소라와 우빈은 그가 원할 때 질문하기로 했다.
“열어 볼게요.” 남자가 말했다.
왼손이 상자의 걸쇠를 천천히 밀었다. 나무가 오래 버틴 숨을 내쉬듯 삐걱거렸다. 안에는 작은 카세트테이프 한 개, 물에 젖은 종이봉투, 빨간 실로 묶인 세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금이나 현금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게 다였어요?” 우빈이 물었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작게 웃었다.
“저한텐 충분히 무거운 것들이었죠.”
현정은 개봉 시점의 사진을 촬영한 뒤 남자의 동의를 받아 물품을 하나씩 상태 기록에 적었다. 보관인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인계하겠다는 뜻도 아니라는 사실을 함께 남겼다.
첫 번째 편지에는 어른의 반듯한 글씨가 있었다.
‘이 물건은 사고 현장에서 구조 요청을 받은 사람들이 남긴 진술의 사본입니다. 누구의 채무도 아닙니다. 후일 본인이 원할 때만 진술을 다시 듣도록 해 주세요.’
아래에 적힌 이름은 정해원이었다.
두 번째 편지는 더 오래된 필체였다. ‘정해원’의 이름이 나왔지만 이번에는 구조 당시의 인원 수가 적혀 있었다. 문 안에 있던 아이 두 명, 복도에 남아 있던 성인 한 명. 그러나 이름 칸 중 하나는 물에 젖어 번져 있었다.
우빈은 손을 대지 않고 물었다.
“아이 두 명이라면 나래와 민호였겠죠?”
“그렇게 보이지만 아직 다른 기록과 맞춰야 합니다.” 현정이 말했다. “누구 하나를 지워 놓은 곳이 없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요.”
세 번째 편지에는 문장을 끝까지 적지 못한 흔적이 있었다.
‘만약 이 자료를 찾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찾느라…’
그 뒤는 먹물이 번져 읽을 수 없었다. 우빈은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금고가 만들어 내는 문장에는 언제나 분명한 결론과 청구 금액이 붙었다. 그런데 이 편지의 사람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 누군가 도중에 숨이 찼거나, 물이 들어왔거나,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그것이 진짜 사람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세 번째 편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제가 열지 않았던 건, 저 글씨 뒤에 제 이름이 적혀 있을까 봐였어요. 누가 저 때문에 죽었다고 쓰여 있을까 봐.”
“그렇게 적혀 있어도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을 겁니다.” 소라가 조용히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적혀 있지 않아요.”
우빈은 숨을 멈췄다. 지난번부터 반복해서 등장하던 이름. 그의 가족 관계에까지 억지로 끼워 넣으려 했던 이름이 이번에는 서류를 남긴 사람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 편지는 보호자를 지정하거나 돈을 빌렸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을 마음대로 빚으로 바꾸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정해원 씨가 직접 쓴 건가요?” 소라가 물었다.
“글씨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겠죠.” 남자가 말했다. “그분을 본 기억도 희미합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카세트 플레이어는 복지관에 없었다. 오금례가 옛날 시장에서 쓰던 녹음기를 가져왔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 모두가 곤란해했지만, 우빈은 가방에 있던 드라이버를 꺼내 배터리 접점을 닦았다. 정태수의 망치를 꺼낼까 하다가 한 번 웃었다. 오늘 필요한 것은 망치가 아니었다.
찰칵.
테이프가 돌아갔다. 잡음 속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여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름을 밝히겠습니다. 저는 정해원입니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남아 있습니다. 문이 잠겨 있고, 구조 인력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록이 남는다면 이것은 상환 요청이 아니라 긴급 보호 요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세요.’
여자는 한 번 기침했다.
‘밖에 있는 분이 누구든 아이들 이름을 대신 적지 마세요. 안전하게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녹음이 잠깐 끊겼다. 다음 부분에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그럼 책임자는 누가 됩니까?’
정해원이 답했다.
‘그건 나중에 사실을 조사해야 합니다. 지금은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빈의 손가락이 떨렸다. 아버지 정태수가 그 문을 잠갔다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그런데 정해원은 누가 갚을지 결정하기보다 먼저 문을 열라고 말했다. 사건이 끝나지 않은 때 남겨진 목소리였다.
녹음이 끝났을 때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이걸 안 열었는지 아세요?”
“무서워서요?” 우빈이 물었다.
“맞아요. 이 안에 누군가의 잘못이 들어 있을까 봐. 그리고 그 잘못이 제 것이 될까 봐.”
남자는 상자에 다시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이건 누군가의 잘못을 제게 넘긴 게 아니었네요. 제가 봤던 일을 제가 어떻게 기억하는지 결정할 수 있게 남겨 둔 거였어요.”
장혜숙이 손수건을 꺼냈다. 늙은 손이 잠깐 떨렸다.
그때 녹음기에서 원래 끝났어야 할 테이프가 다시 움직였다. 오금례가 놀라 전원을 껐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테이프 안쪽에서 누군가 한 글자씩 읽었다.
‘보관인 확인. 최초 수신자가 응답했습니다.’
테이블 위에 검은 영수증이 생겨났다.
[원본 08 / 봉인 해제]
[보관 대상: 미완료 구조 요청의 최초 진술]
[재청구 기능: 없음]
우빈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아래에 두 번째 문장이 떠올랐다.
[원본 07 / 무단 연계 회수 실행]
[증거 반출 감지 / 보관 기록 폐기 예정]
복지관 천장에서 종이가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각 종이에는 정해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모든 종이가 그녀의 서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누가 또 서명하라고 하는 거야?” 우빈이 외쳤다.
미결이 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명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위 장치가 증거 자체를 없애려 합니다.”
제9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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