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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97화
PAYLUA ORIGINAL · 제97화

97화. 죽지 않는 사원 번호

빚을 먹는 금고 · 3,152자

오프라인 책장
차윤서는 회사의 회의실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택한 장소는 시민법률지원센터의 작은 면담실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우빈과 소라는 그녀가 내민 증빙을 하나씩 확인했다. 출입증 반납 확인서, 계정 이용 중지 신청, 실제 접속 시각과 그녀의 위치가 달랐다는 자료. 아직 외부 서버 전체를 조사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자발적으로 제출한 사실은 구체적이었다. “누군가 제 권한으로 접근한 겁니다.” 차윤서가 말했다. “계정은 중지됐다고 들었는데 시스템에는 ‘대리 승계’가 남아 있었어요.” “누가 승계했죠?” “이름은 없습니다. 직책 번호만 있어요.” 그녀는 종이를 펼쳤다. [BJH-06 / 직무: 유실 자산 회수] [권한 유지 조건: 보관 종료 확인] [승계 담당자: 지정되지 않음] “지정되지 않았는데 권한이 살아 있는 건가요?” 우빈이 물었다. “예전 회사에서 사람을 뽑지 못하면 공석으로 남겨 뒀잖아요. 여긴 반대였어요. 공석인 동안에도 일이 계속되도록, 시스템이 누구에게나 직책을 빌려줬죠.” 소라는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직책을 빌려준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로그가 더 필요해요.” “네. 저도 설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그래서 자료를 보존 요청해 놓았습니다. 차윤서는 가방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자신의 내부 보고서였다. 접수 도장이 세 번 찍혀 있었다. 첫 번째 보고서는 ‘권한 승계 이상’이라는 이유로 반려됐고, 두 번째는 회신이 없었으며, 세 번째는 외부 담당자에게 전달됐다는 기록만 남아 있었다.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어서요.” 우빈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자신은 차윤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거래소의 대변인으로 여겼다. 지금은 그녀가 잘못된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전에 했던 선택까지 모두 옳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도 책임질 부분이 있어요.” 차윤서가 말했다. “처음에 이런 계정을 만들 때 제가 검토서를 썼거든요. 대리 승계가 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서명했어요.” “그걸 지금 말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소라가 말했다. “정확한 범위는 자료를 확인해야겠지만, 누구도 책임을 대신 뒤집어쓰지 않으려면 자신이 한 일은 분명히 해야 하니까요.” 차윤서는 마침내 어깨를 내렸다. 사과 한마디로 과거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던 부분부터 다시 적기 시작했다. ‘승계 계정은 직원 퇴사 후 72시간 이내 정지한다.’ 그녀가 옛 규정을 소리 내어 읽자 서강재가 놀라 물었다. “그런 조항이 있었어요?” “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보고서 양식에서 사라졌어요. 누가 지웠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우빈은 창밖을 보았다. 인도를 건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장갑을 낀 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보면 택배기사가 종이 상자를 안고 있을 뿐이었다.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누군가를 의심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엉켰다. 그날 오후 서강재가 오래된 회수 교육 문서를 찾아냈다. 교육 자료의 표지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담당자는 회사를 떠나도 처리 상태는 남아 있어야 한다.’ 정상적인 기록 보존 원칙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래쪽 작은 각주가 문제였다. ‘담당자가 없으면 보관인, 보관인이 없으면 수령인, 수령인이 없으면 현장 증인을 대신 지정한다.’ “한 사람이 없을 때마다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규칙이네요.” 우빈이 말했다. “누구든 빈자리에 끼울 수 있게 해 놓은 거죠.” 서강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엔 단순히 업무가 지연되지 않게 하는 자동화라고 생각했어요.” 박현정은 원본을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보존하는 한편, 계정 도용 여부에 관한 조사 요청을 접수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사기업 서버를 멋대로 열어볼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수집된 기록에 출처와 진위를 묻는 일은 가능했다. 저녁 무렵, 장혜숙에게서 편지 전달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성인 나래는 동생에게서 온 편지를 받아 읽었고, 답장을 쓰겠다고 했다. 누구도 그 편지의 내용을 묻지 않았다. 우빈은 복도에서 나래를 만났다. 그녀의 눈가가 붉었지만 표정은 이전보다 단단했다. “그 사람이 제가 기억하는 민호인지 아직 확정하지 않았어요.” “그럼 답장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냥 이렇게요. ‘나는 네가 내 동생이기를 바라지만, 네가 원하지 않으면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게.’” 어린 나래는 문 안에서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노란 해바라기 한 송이였다. 어른 나래는 아이를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나기로 해도 두 사람이 모두 원할 때 만나자고 쓸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 우빈의 휴대전화 화면이 검게 변했다. [원본 08 / 강나래 수취 가능성 감지] [대리 책임 이전 절차 준비] 그는 몸을 굳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래의 이름이 또 서류 속에 들어갈 것 같았다. “기다려 주세요.” 우빈이 말했다. 복도 끝의 소라가 다가왔다. “왜요?” “나래 씨가 답장하기만 해도 수령인으로 등록하려고 해요.” 소라는 화면을 확인한 뒤 곧바로 나래를 불렀다. 나래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가 편지를 받겠다는 것과 금고를 받겠다는 건 다른 일이에요. 둘을 섞지 마세요.” 우빈이 휴대전화에 그 문장을 읽어 주었다. 기계가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화면의 활자가 잠깐 멈췄다. [서신 수신 / 물품 수령 / 채무 인수: 상이한 행위] [자동 연계 근거 요청] 미결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최초의 보관 규정에 동일한 구분이 존재합니다.” “어디에요?” “원본 08을 만든 사람의 문서에 있습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상자 안에요.” 우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민호를 자처한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를 쫓는 사람이 아직 있다면 상자를 열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위험을 안길 수 있었다. 소라가 낮게 말했다. “물건을 가진 사람의 허락부터 구해야겠네요. 이번에는 우리가 기다리는 쪽이에요.” 그날 밤 남자로부터 짧은 메시지가 왔다. 장혜숙이 전달한 편지를 받은 뒤에 보낸 것이었다. ‘나래가 직접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상자를 열어볼 준비가 됐습니다. 다만 제 동의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신 쓰는 권한이 되지 않도록 해 주세요.’ 그리고 그가 정한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협박도 없고 단독 면담 조건도 없는, 평범한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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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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