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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96화
PAYLUA ORIGINAL · 제96화

96화. 주소를 먹는 괴물

빚을 먹는 금고 · 3,072자

오프라인 책장
밤 열한 시, 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정우빈은 신발 한 짝만 신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소라가 통화 중인 그의 휴대전화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상담실 유리창에 종이가 붙어 있어요. 주소가 적혀 있어요. 떼어 내려고 했는데 다시 생겨납니다.” 우빈은 발을 멈췄다. 바로 달려가 종이를 찢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금고가 ‘원본 훼손’이라는 이유를 내밀어 누군가를 또 빚으로 묶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안전합니까?” “방문자는 모두 내보냈어요. 직원들은 안쪽에 있어요.” “출입 통제부터 부탁드립니다. 신고도 해 주세요. 저희도 갑니다.” 현장에는 검은 종이 한 장이 유리창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뻗어 있었다. 종이에 적힌 주소는 글자라기보다 상처처럼 보였다. 한 획씩 늘어날 때마다 오래된 우편봉투 냄새가 났다. 복지관 맞은편 편의점 전광판도 잠깐 같은 글자를 보여 주었다. “주소가 옮겨 붙고 있어요.” 서강재가 중얼거렸다. 길을 지나던 사람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그의 화면에 주소가 복사되더니 지도 앱의 검색창에 스스로 들어갔다. 남자는 당황해 휴대전화를 껐다. 검색창은 꺼진 화면 위에서도 흐릿하게 빛났다. 미결의 종이 그림자가 건물 외벽에 비쳤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움직였다. “대상 식별 정보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원본 08의 권한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하고 있어?” “원본 07의 미회수 기록과 외부 거래소의 위치 확인 기능이 연결됐습니다.” “그 위치를 수집한 계정은요?” 소라가 물었다. 편의점 주인이 밖으로 나와 전광판을 가리켰다. 그는 자신이 화면을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연거푸 했다. 우빈은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 이상 현상에 대해 책임자를 찾기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억울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영업을 멈춰야 하나요?” 주인이 물었다. “화면에 개인 주소가 노출되고 있으니 일단 표시를 중단하고 관계 기관에 연락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소라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상을 남기고요. 손님 얼굴과 개인정보는 가급적 불필요하게 퍼지지 않게 해 주세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로 돌아갔다. 몇 분 뒤 전광판은 꺼졌지만, 옆집 약국 모니터가 검게 변했다. 마치 누군가 열린 문을 찾아 거리를 걷는 것 같았다. 우빈은 그제야 종이가 붙은 자리를 다시 보았다. “이걸 멈춰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네요.” “한 곳을 닫아도 이미 퍼진 정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소라가 말했다. “그래서 처음 새어 나간 경로가 중요해요.” 우빈은 처음에는 금고를 부수면 가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번에는 가게의 전원을 내려도 누군가의 삶이 지켜질 것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 피해를 줄이는 일은 훨씬 더 길고 번거로웠다. [회수 연계 계정: BJH-06] [실행 지시 발행: 선제보증운영 협력 서버] 그 이름을 본 우빈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이 멈춘 줄 알았던 거래소의 손길이 보관인 개인에게 닿았다. 허위 청구서를 모으면 채권이 되던 괴물이 이번에는 주소를 먹고 있었다. 복지관 직원 한 명이 창문을 가리켰다. 종이가 불룩 부풀더니 팔처럼 길어졌다. 우빈은 뒤에 있던 아이를 안쪽으로 보냈다. 아이는 울지도 않았다. 검은 종이 팔이 바닥으로 떨어져 꾸불꾸불 기어오는 장면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다. “이게 사람을 해칠 수 있어요?” 직원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가지 마세요.” 우빈은 대답하며 뒷걸음질했다. 종이 팔이 그를 쫓는 줄 알았지만, 곧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복지관 우편함. 종이는 그 안의 편지들을 빨아들여 하나씩 펼쳐 보았다. 이름과 주소를 훑을 때마다 몸집이 두꺼워졌다. “우편물부터 지켜야 해요.” 소라가 외쳤다. 그들은 종이를 때리거나 찢지 않았다. 건물 담당자가 전원을 내리고 우편함을 이동식 가림판으로 가렸다. 경찰이 현장 통제를 돕는 동안 직원들이 주민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를 잠금 캐비닛으로 옮겼다. 검은 팔은 우편함 안에서 더 이상 얻을 게 없자 벽을 긁었다. 그러나 벽은 곧 다시 글자로 채워졌다. ‘보관인이 확인되면 보관 책임도 확인된다.’ 우빈은 그 문장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종이 괴물은 사람을 알아본 적이 없었다. 우편물에 적힌 주소를 따라갔을 뿐이었다.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도, 실제 그곳에 사는지도 모르는 채. “정확한 주소가 아닌데도 왜 이렇게 따라붙죠?” “소유자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소라가 말했다. “누군가 그 주소를 믿게 만드는 게 목적일 수도 있어요.” 그때 소라의 휴대전화에 임시 보호 요청의 접수 확인이 왔다. 복지관은 유출된 개인의 안전을 위해 관계 기관과 조치를 협의하고, 관련 계정과 게시물 보존 및 삭제를 요청하기로 했다. 남자의 주소가 실제인지도 먼저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어디 사는지 소문을 퍼뜨려 검증하는 것은 위험했다. 현정이 보존해 둔 원본 영상의 접근 기록을 보내 왔다. 유출 직전 마지막으로 조회한 계정은 외부 서버였고, 그 계정의 별칭이 눈에 띄었다. [BJH-06 / 임시 대리자: 차윤서] “차윤서 씨?” 우빈이 소리쳤다. 소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계정에 이름이 붙었다고 그 사람이 직접 썼다는 뜻은 아니에요. 차윤서 씨도 진술하러 왔던 사람이에요. 확인해 봅시다.” 새벽 한 시, 종이 괴물은 우편함에서 마지막 작은 봉투까지 빨아들이고도 커지지 못했다. 복지관의 이름과 관계없는 주소들은 서로 충돌했고, 형상은 빈 종잇장처럼 찢어져 흩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에는 한 문장만 남았다. ‘수령인이 정해지지 않으면 책임자를 정할 수 없다.’ 우빈은 찢어진 종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출된 주소가 저절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사진을 찍은 사람과 저장된 기록이 있었다. 괴물이 사라져도 사람의 안전은 따로 지켜야 했다. 현장을 벗어나려는 순간 그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차윤서였다. “제 계정이 움직였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있는 곳에선 접속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감사 담당자를 만나러 온 별관입니다. 제 출입증은 어제 반납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빈 씨, 제가 사용하던 이름이 아직 회사 안에서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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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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