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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95화
PAYLUA ORIGINAL · 제95화

95화. 한 사람의 두 가지 주소

빚을 먹는 금고 · 3,296자

오프라인 책장
강민호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스무 분 늦게 왔다. 도심의 작은 복지관 1층 상담실. 가로로 긴 창문 바깥에 아이들이 공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소라와 우빈은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장혜숙은 남자의 연락을 받자 기다리는 동안 물을 한 컵 따라 놓았다. 성인 나래는 오늘은 같은 건물의 다른 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처음 만남을 누구의 눈물로 증명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을 연 남자는 마흔을 앞둔 사람처럼 보였다. 오른쪽 소매가 짧게 접혀 있었고 손목 아래가 비어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문손잡이를 놓고, 불안한 듯 구두 끝을 내려다봤다. “제 이름은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첫마디였다. 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엔 ‘강민호가 돌아왔다’고 쓰여 있더군요. 아직 제가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았는데요.” 소라가 자세를 바로 했다. 자료관에서 나온 영상 일부가 외부로 새어 나갔다는 소식은 조금 전 들었다. 출처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남자의 얼굴이 기사에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이미 누군가 흔적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저희가 공개한 건 아닙니다. 유출 경위를 확인하고 있어요.” 상담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남자는 우빈을 보는 대신 출입문을 여러 번 확인했다. 상담원은 누구도 허락 없이 면담 공간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알리고, 필요하면 만남을 중단해도 된다고 다시 말했다. “저 사람들은 제 이름을 찾아내면, 제가 그때 어떤 아이였는지부터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제게는 그 뒤에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요. 제가 다닌 학교도 있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 제 과거를 설명할지는 제가 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소라가 대답했다. “저희가 진실을 찾는다는 말을 너무 크게 했네요. 오늘 이곳에서 한 말씀을 어디까지 남길지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남자는 창밖을 바라봤다. 복지관 담장 위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그는 고양이가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누나를 오래 기다렸어요. 하지만 다시 만난다고 해서 어제까지의 제 삶을 모두 돌려주는 건 아니에요.” 우빈은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자기가 알고 싶은 사실을 상대가 말해야 할 의무로 착각하는 순간, 자신 역시 금고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남자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믿고 싶습니다.” 장혜숙은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남자가 눈을 들었다. “선생님, 그때 해바라기 도장은 왜 늘 노란색이었어요?” “네가 주황색 잉크는 싫어했잖니. 손이 아프다고.” 남자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기억이 일치한다는 이유로 모든 의심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혜숙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걸 꺼내러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가 말했다. 그는 낡은 천 주머니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뚜껑은 안쪽으로 휘어 있었고 옆면에는 붉은 칠로 지운 숫자 8이 보였다. 종이 금고처럼 번쩍이지도, 이상한 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손으로 쓸어 만든 모서리에는 오래된 흠집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누군가 저한테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 전부터요. 버리라고도 했고, 팔라고도 했죠.” “열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아뇨. 제 물건이 아니니까요.” “그럼 어떻게 보관하셨죠?” “누군가 맡겼으니까요. 그때 제가 무서워서 못 열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안 열었다는 사실만은 제가 결정한 일이었어요.” 우빈은 그 상자를 쳐다봤다. 다른 금고와 달리 물건을 넣으면 빚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금고의 알림은 그 물건을 훔치려는 사람에게까지 돈을 청구하고 있었다. “혹시 누가 맡겼는지 기억하십니까?” 남자는 멀리 창밖을 봤다. “한 사람이요. 사고 난 뒤에요. 이름은 확실하지 않아요. 그런데 목소리는 기억합니다. 여자였어요. 저보다 훨씬 큰 사람이 제 손에 상자를 쥐여 주고 말했죠. ‘받았다고 적으면 너도 같은 일을 하게 돼.’” 그는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꼭 안았다. “그 말이 뭔지 이해 못 했어요. 다만 제가 상자를 돌려주고 싶다고 했을 때, 아무도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복지관 상담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자가 미리 요청한 사람이었다. 그는 면담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원하면 언제든 중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자는 상담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할게요. 그런데 누나에게는 편지를 보내고 싶어요.” 우빈은 순간 상자를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눈앞에 진짜 원본이 있는데,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남자가 작게 웃었다. “상자를 찾으러 오신 거죠?”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지금은요?” 우빈은 서둘러 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걸 들고 있어서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빼앗을 이유는 없어요.” 남자는 한동안 우빈을 보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별도 봉투를 꺼냈다. “제가 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건 이 편지 하나예요. 누구한테 주는지도 제가 정했습니다.” 봉투 겉에는 ‘강나래에게’라는 글자만 있었다. 주소도 새 이름도 없었다. 장혜숙이 중간에서 전달하겠다고 하자 남자는 그제야 어깨를 폈다. 모두가 나간 뒤 우빈은 상담실에 남았다. 의자에 남자의 체온이 남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손에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처음으로 이긴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인생을 빼앗지 않고 돌아왔으니까. 그때 소라의 전화가 울렸다. 박현정이었다. “우빈 씨, 문제가 생겼어요. 온라인에 유출된 영상을 추적했는데, 유포 계정이 하나가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복지관에서 촬영된 사진까지 벌써 돌아다녀요.” “누가 찍었습니까?” “아직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진 아래에 붙은 주소가 두 개예요. 하나는 방금 만난 사람의 현재 주소로 보이고, 다른 하나는 금고의 ‘보관인 이전 주소’입니다.” 우빈이 창밖을 바라봤다. 공을 차던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빈 운동장만 남아 있었다. 휴대전화에 새 알림이 나타났다. [원본 08 / 보관인 접촉 완료] [현재 생활지 확인] [보관 물품 자발적 반납 여부: 미확인] [예정 처분: 보관인 주소 공개] 알림이 사라지기 전, 그 밑에 작은 문장이 하나 더 찍혔다. [보관을 끝내려면 채무자 한 명을 지정하세요.] 우빈은 마침내 알아차렸다. 원본 08이 사람을 만나자고 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보관인을 찾아내기 위해 그 말을 빌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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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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