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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94화
PAYLUA ORIGINAL · 제94화

94화. 돌아오지 말라는 말

빚을 먹는 금고 · 2,528자

오프라인 책장
성인 나래는 영상을 세 번 보았다. 첫 번째에는 소년의 얼굴만 봤다. 두 번째에는 입 모양을 봤다. 세 번째에는 복도에 걸린 달력과 신발장 옆의 물통까지 살폈다. 같은 장소가 확실한지, 영상의 시점이 언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제가 기억하는 민호는 말을 저렇게 느리게 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에 어린 나래가 눈을 크게 떴다. “아파서 그랬을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어. 그렇지만 우리가 바라는 답을 먼저 정하고 보면 안 돼.” 어린 나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어른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른 나래라는 것도 알았다. 박현정은 영상 자료의 출처를 따로 확인했다. 미결이 보여 준 것은 출처가 검증된 원본 영상이 아니라, 저장매체에 남은 데이터를 재생한 화면이었다. 날짜는 2002년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촬영 장치와 파일의 생성 시점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일단 ‘민호로 추정되는 소년’이라고 적겠습니다.” 나래는 그 표현을 받아들였다. 동생을 눈앞에서 보고도 곧장 이름을 확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괴로웠지만, 다른 사람을 민호라고 단정하는 일은 더 두려웠다. 오후에는 장혜숙이 보호소 운영 당시의 야간 근무 표를 가져왔다. 영상 속 배경이 실제 복도와 닮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자료였다. 그녀는 영상의 장면을 보다가 갑자기 재생을 멈추게 했다. “저 물통은 2003년에 들여왔어. 내가 주문했거든.” “그럼 2002년이라고 적힌 날짜가 틀렸네요.” 소라가 말했다. “적어도 저 물통이 보이는 장면은 그래. 내가 기억하는 시점부터 확인해 봐야 해.” 우빈은 그날 내내 잘못된 날짜가 나오는 이유를 생각했다. 금고가 기억을 뒤섞는다는 설명은 편했다. 그러나 영상을 잘라 붙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선택이기도 했다. 퇴근 시각 무렵, 오금례에게서 전화가 왔다. 노인은 누군가 자기 집 현관에 편지 하나를 두고 갔다고 했다. ‘옛 물품의 반환에 협조하면 가족에게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낯선 번호와 함께 빨간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제가 그 애 상자를 만졌다고 해서 우리 딸에게 빚이 가요?” 오금례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빈이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잡았다가 소라에게 넘겼다. 또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말할 뻔했다. “이런 통지에는 바로 응하지 마세요.” 소라가 말했다. “상대가 요구하는 개인정보를 주지 않고, 원본을 보존해 두세요. 협박성 내용이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요. 저희는 확인 가능한 절차부터 함께 찾겠습니다.” 노인은 오래 침묵하다가 말했다. “나는 그 애한테 끝까지 상자를 안 열어 본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열어야 하나 싶어서.” “그 약속은 노인께서 대신 다른 사람의 빚을 진다는 뜻이 아니에요.” 전화를 끊은 뒤 소라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직접 피해를 겪은 사람을 만나면서 무언가를 바꾸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편지가 한 장 오면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우빈 씨. 우리도 무서운 말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과거를 끄집어내 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우빈은 소라가 어머니를 찾던 일을 떠올렸다. 이정민의 기록을 공개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그러나 소라에게 중요한 것은 찾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어머니가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였다. “그러니까 그만두고 싶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어야죠.” “맞아요.” 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찾는다는 이유로 또 하나의 강요를 만들면 안 되니까.” 다음 날 아침, 원본 영상의 마지막 장면을 확대하던 담당자는 검은 장갑 뒤의 경고문에서 새로운 글씨를 찾아냈다. 영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위험을 고지받을 권리’라는 문장뿐 아니었다.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가 있었다. ‘대신 수령할 수 없습니다. 보관을 원하는 사람만 서명할 수 있습니다.’ 문세희가 이것이 오래된 보호 규정의 초안에 쓰인 문장과 일치한다고 확인했다. 적어도 그때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금고에 넣지 말라고 요구했었다. 오후 두 시 십칠 분, 우빈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표시되는 번호는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말했다. “제가 민호인지 확인하고 싶어 하신다면서요.” 우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나기 전에 부탁이 있어요. 그때 영상을 아무한테도 더 보여 주지 마세요. 제가 살아 있는 증거로 돌아다니는 건 싫습니다.” “당신이 정말 강민호 씨입니까?” “그 질문엔 직접 만나서 답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지금 말할 수 있어요.” 전화기에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누나에게 ‘오지 마’라고 한 건, 누나가 싫어서가 아니었어요. 누나가 제 이름 대신 붙잡힐까 봐 그랬습니다.” 통화가 끝난 뒤 우빈은 화면을 오래 보았다. 그 말이 진짜 민호의 것이면 너무 늦게 도착한 사과였고, 가짜의 것이면 가장 잔인한 미끼였다. 이번에는 둘 중 어느 쪽인지 확인할 길이 있었다. 누군가를 불러내는 단독 면담이 아니라, 서로 선택할 수 있는 대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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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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