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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93화
PAYLUA ORIGINAL · 제93화

93화. 빚이 아닌 보관증

빚을 먹는 금고 · 3,113자

오프라인 책장
미결은 우빈의 얼굴을 보고도 인사하지 않았다. 기록관리원 별관 지하의 본원금고. 오래된 종이로 접힌 형상은 투명한 보관함 앞에 서서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여섯 장, 일곱 장, 여덟 장. 마지막 장에 이르면 처음으로 돌아갔다. “원본 08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우빈이 물었다. 미결은 잠시 종이의 가장자리를 접었다. “등록되지 않은 보관 증표입니다.” “그것도 금고입니까?” “원본군의 일련번호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지급이나 징수의 권한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럼 왜 사람 이름을 가져가려 하죠?” “보관인이 확인되지 않았을 때 자동 수령인을 지정하는 기능은 원본 07에서 불러온 규칙입니다. 08의 최초 명령에 포함됐는지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우빈은 그 말을 소라에게 받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미결은 여전히 괴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모르는 일을 모른다고 말했다. “08의 원래 목적을 복원하면 이름을 안 가져갈 수 있어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복원에는 최초 기록이 필요합니다.” 미결은 투명한 장부를 한 장 더 펼쳤다. 겉에는 00부터 07까지의 번호가 나란히 적혔고 그 아래 작은 붉은 선이 각 번호를 연결했다. 선이 닿는 곳마다 ‘대리 수령’, ‘기한 경과’, ‘채무 전환’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이것이 연결 규칙입니다.” “왜 보관하라는 명령과 돈을 받으라는 명령이 붙어 있죠?” 소라가 물었다. “행정상 미결 건을 최소화한다는 목적이 기재됐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위해 어떤 권리가 제한됐는지는 따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게 누군가 갚아야 한다는 뜻이 아닌데.” 우빈이 말했다. 미결은 잠시 멈췄다. 그가 들고 있던 종이의 잉크가 희미하게 번졌다. “당신은 제가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때는 그 오류를 고치겠다고 사람을 대신 내놓으려 했어요.” “그럴 위험이 있었습니다.” 미결의 대답이 이상할 만큼 인간적이어서 우빈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이 아니어도 잘못된 규칙을 반복할 수 있고, 사람이더라도 고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서강재는 원본 07의 보존 로그를 살폈다. 08이라는 코드가 처음 나타난 시각은 2002년이 아니라 2010년으로 표시돼 있었다. 강민호가 어린 시절 나무 상자에 칠해 두었다는 팔 자와는 시간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 개인 보관 번호를 회사의 관리 코드로 나중에 편입했을 수 있겠네요.” 서강재가 말했다. “아직은 가설이에요.” 소라가 선을 그었다. “같은 번호가 우연히 겹쳤을 수도 있어요.” 그들은 종이 장부에서 관련 페이지를 찾아냈다. 표지에는 ‘보관 규정 개선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험동 사고 이후 물품 수령인을 확인하지 못할 때 보관 상태를 유지하자는 취지였다. 바로 옆에는 붉은 펜으로 수정된 조항이 붙어 있었다. ‘보관 기한이 경과할 경우 회수 가능한 채권으로 자동 전환.’ 우빈은 수정 조항의 서명란을 봤다. 백재헌을 뜻하는 약자가 있었지만 원래 문장 아래의 날짜와 달랐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적은 아주 작은 주석이 있었다. ‘서명자의 생사 불명. 권한 대체 등록.’ “사람이 없어져도 직책이 대신 서명하게 만든 겁니까?” “그런 구조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결이 말했다. “규칙을 호출하는 자는 있으나 실제 동의자가 없는 경우가 다수입니다.” 박현정은 두 장의 원본 보존번호를 따로 발급했다. 수정 조항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그것이 실제로 사용된 경로와 피해 기록까지 사라져 버리면 누구도 피해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우빈은 미결에게 물었다. “그 종이를 없애지 않고 사용을 멈출 수 있어요?” “원본 검증 전에는 대리 수령을 보류하도록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상위 원본군에서 이를 받아들일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요청해 주세요.” 화면에는 잠시 [대리 수령 후보 산정 보류 요청]이라는 글자가 떴다. 그 아래의 답장은 예상보다 빨랐다. [원본 08 / 외부 보관인 권한 거부] [개인적 물품에 대한 기관의 개입을 거절함] 이번에는 붉은 글자가 아니었다. 빛이 옅은 푸른색이었다. “거절하는 사람이 누구죠?” 우빈이 물었다. 미결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독 면담을 요구한 신호와 이 응답은 발행 경로가 다릅니다.” “그럼 둘이 싸우는 걸까요?” “같은 증표를 서로 다른 목적으로 호출하고 있습니다.” 그때 복도의 끝에서 어린 나래가 걸어왔다. 아이는 성인 나래와 함께 있었고, 허락받은 상담 시간에 잠시 방문한 것이었다. 아이는 보관함 앞에 멈춰 서더니 망설이며 물었다. “민호는 옛날부터 남의 물건을 잘 안 만졌어요. 운동장에서 주운 연필도 주인 나올 때까지 들고 있었어요. 그게 잘못이었어요?” “아니.” 우빈이 답했다. “잘못이 아니야.” “그럼 왜 그렇게 기다린 사람이 빚을 지는 거예요?” 금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린 나래는 가방에서 해바라기 모양의 스티커를 꺼냈다. 장혜숙이 옛날 숙제장에 찍어 주던 도장과 비슷한 것이었다. “민호는 스티커 뒤에 점 세 개 찍었는데.” 성인 나래가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게 어디 있는지는 말하지 말자. 누군가 듣고 따라 할 수 있으니까.” 두 나래는 서로를 보았다. 자신들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의 기억을 누군가 이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선택은 같았다. 우빈이 돌아서려는데 미결이 손을 들어 그들을 세웠다. “새로운 기록이 도착했습니다.” 화면에 흑백 영상이 열렸다. 2002년의 보호소 복도. 작은 나무 상자를 안은 소년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멈춰 왼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지켜 달라고 했지, 갚겠다고 하지 않았다.’ “민호야.” 어린 나래가 속삭였다. 영상 속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래는 글자를 읽듯 천천히 말했다. “누나, 오지 마.” 영상의 마지막 프레임에서 복도 끝에 검은 장갑 낀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소년을 쫓아가는 대신 벽에 붙은 경고문을 떼어 냈다. 경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보관품 소유자는 위험을 고지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 문장만 영상 속에서 검게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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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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