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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92화
PAYLUA ORIGINAL · 제92화

92화. 바뀐 수령인의 필체

빚을 먹는 금고 · 2,788자

오프라인 책장
옛 새벽보호소는 구륜구 재개발 구역의 끝에 있었다. 유리창 몇 장이 깨진 이층 건물. 철제 대문에는 임시 펜스가 쳐져 있었고, 옆에는 공사 안내문이 비에 젖은 채 붙어 있었다. 누군가 ‘단독 면담’ 장소로 지목하기에는 지나치게 공개된 곳이었다. 사람을 불러내기 위한 표적 같았다. 우빈은 현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소라와 함께 도로 건너편의 주민센터를 찾았다. 건물의 소유와 출입 권한을 확인하고, 자료 보존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박현정은 기록관리원에서 관련 서류를 대조했다. 현장 조사에 동행한 장혜숙은 건물 앞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마당에 미끄럼틀이 있었어. 철봉은 저쪽이고. 민호는 계단을 뛰어 내려오지 못했지. 오른쪽 난간을 못 잡으니까.” 그 기억은 사라진 건물의 한구석을 잠깐 되살렸다. 하지만 장혜숙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보이는 벽이 전부 그때 벽이라는 뜻은 아니야. 몇 번 고쳤을 거야.” “오늘 누가 보냈다는 문자를 따라온 건 아니에요.” 소라가 말했다. “건물에 남아 있는 보존 자료가 있는지만 확인할 겁니다.” 한 시간 뒤, 구청 보존 담당자가 공사 업체와 협의하여 건물 밖에 적치된 문서 상자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안에는 식단표와 야간 근무 일지가 있었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있었고 대부분은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2003년 여름 한 주의 전달대장에는 같은 번호가 여러 번 나왔다. ‘08번 개인 물품. 수령인 재확인.’ 첫 번째 칸에는 D-07이라고 적혀 있었고, 두 번째 칸에는 지워진 이름이 있었다. 세 번째 칸에서 우빈은 손을 멈췄다. ‘정태수 / 대리 수령.’ “우리 아버지?” 가슴 안쪽이 쿵 내려앉았다. 아버지는 1998년 사고 당시 문을 잠갔던 일로 오랜 세월 자신을 탓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다섯 해 뒤 민호의 물건까지 가져갔다면, 지금까지 숨긴 사실이 또 하나 있다는 뜻일까. “잠깐만요.” 소라가 말했다. “여기에 찍힌 도장은 대리 수령 완료가 아니라 대리 수령 ‘신청’입니다. 옆 칸이 비었잖아요.” 우빈은 공란을 바라봤다. 한 줄만 건너뛰어 읽었어도 아버지를 도둑으로 확신할 뻔했다. 담당자가 접수번호를 확인했다. 기록 원본은 나중에 시립 기록관리원으로 이관됐고, 실제로 물품을 수령했다는 서명은 목록에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신청서와 접수 당시의 기록뿐이었다. 그날 저녁 우빈은 정태수에게 물었다. “2003년에 민호 수첩을 찾으러 가셨어요?” 아버지는 식탁 끝에 놓인 망치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명숙이 찻잔을 치우려다 멈췄다. “갔지.” 정태수의 대답은 예상보다 빨랐다. “왜요?” “아이를 직접 찾을 수 없었어. 내가 문을 잠갔던 일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 그런데 그 아이의 새 이름을 묻는 순간, 보호소 직원이 그러더구나.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남의 삶을 들여다볼 권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그래서 수첩은요?” “못 받았다. 신청서를 철회했어.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 우빈은 서류의 빈칸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왜 그때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는지는 아직 궁금했다. 그러나 받은 적 없다는 말은 적어도 접수 자료와 모순되지 않았다. 이명숙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지금 그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왜니?” “그 수첩과 연결된 번호로 누군가 저를 부르고 있어요. 진짜 민호 씨인지 모르겠어요.” 이명숙은 오래된 가족사진을 꺼냈다. 우빈이 초등학생이던 때, 정태수가 동네 운동장에서 망치를 든 채 자전거 바구니를 고쳐 주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잘못했다고 해서 그 뒤의 모든 행동이 잘못은 아니고, 한 번 좋은 일을 했다고 앞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야.” 아버지는 말없이 사진을 돌려놓았다. 다음 날, 소라는 2003년 신청서의 필체와 1998년 구조 일지의 필체를 별개로 보존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이 단번에 비슷하다고 말한 것과 실제 대조 결과는 달랐다. 신청서에는 정태수의 이름이 쓰여 있었지만 그 글씨를 본인이 직접 적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오후 세 시, 주민센터로 한 여성이 찾아왔다. 팔십 대 노인이었다. 당시 보호소에서 주방 일을 맡았다는 오금례였다. 장혜숙의 소개로 기록 보존 작업에 필요한 사실을 이야기하러 온 것이다. “민호는 오래전부터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다녔어요. 수첩하고는 달랐어요. 왜 그걸 안 열었냐고 물었더니 ‘이건 내가 받은 게 아니에요’라고 하더군요.” “상자에 번호가 있었나요?” 소라가 물었다. “옆면에 팔 자가 있었죠. 그런데 빨간 칠로 덧그어져 있었어요. 아이가 매일 그 칠을 문질렀어요. 자기 물건은 자기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우빈은 벽에 등을 기댔다. 금고가 수첩과 같은 숫자를 쓰고 있었다고 해서 수첩이 원본인 것은 아니었다. 그 숫자 뒤에는 다른 물건이 있었다. “그 나무 상자는 누가 가져갔나요?” 오금례가 고개를 저었다. “가져간 사람이 없어요. 버리라고 했는데 민호가 끝까지 안 놨죠. 그날 떠나면서 저한테 한 말은 기억나요.” 노인은 잠시 손바닥을 펴 보였다. “‘내가 수령했다고 쓰지 마세요. 아직 주인한테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 시각 우빈의 휴대전화가 켜지며 작은 알림이 떴다. [원본 08 / 수령 기한 초과 8,491일] [미반환 대상: 미확인] [대리 수령 후보 자동 선정 시작] 그 아래에 자신들의 이름이 한 줄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태수. 장혜숙. 오금례. 김소라. 우빈은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엎어 놓았다. “또 이름을 붙이고 있어요.” 소라가 서둘러 현정에게 연락했다. “그 이름을 기록한 이유가 뭔지 찾아야 해요. 누가 뭘 받았는지가 아니라, 누가 왜 못 돌려줬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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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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