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를 처음 만진 사람은 정우빈이 아니었다.
중앙기록관리원 보존실의 담당자 박현정이 얇은 면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집어 올렸다. 1998년 사고 기록 상자에서 나온 봉투. 겉면에는 오늘 날짜의 우편 소인, 안에는 민호라는 이름이 적힌 사진과 서명 없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잘못 접힌 틈에서 튀어나온 물건 같았다.
“먼저 겉봉투와 종이를 분리해서 보관하겠습니다. 누가 언제 보았는지도 남기고요.”
현정의 말은 담담했다. 우빈은 그 말에 조금 안심했다. 처음 금고를 만난 날에는 서류를 넣기만 하면 끝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종이 한 장을 보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한지 알았다.
소라가 확대경 아래 봉투를 보았다.
“소인에 찍힌 날짜는 맞아요. 하지만 실제 우체국에서 처리됐다는 뜻은 아니죠. 도장을 복제해서 찍었을 수도 있어요.”
“발신인을 알 수 있습니까?”
“아직은요. 그런데 이 접힌 자리 좀 보세요.”
소라는 사진을 찍어 현정에게 넘겼다. 봉투 모서리에는 두 번 접었다 펼친 흔적이 있었고, 서로 다른 시기의 접착제가 말라붙은 것처럼 보였다. 1998년 상자에서 나왔다고 해서 안의 편지까지 그때 쓰였다는 보장은 없었다.
우빈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원본 08 / 정우빈과 단독 면담]
[장소: 구륜구 옛 새벽보호소]
[신원 확인 절차를 거부하면 접촉 종료]
그는 화면을 소라에게 돌려 보여 주었다.
“아까는 장소도 없었는데 이제 생겼어요.”
“거부하면 끝이라는 문장이 늘 수상하네요.”
“이번에도 안 갈까요?”
우빈은 대답을 기다리며 보존실 벽에 걸린 예전 사진을 보았다. 1970년대에 지어진 기록관리원 앞에서 직원들이 나란히 웃고 있었다. 지금은 공문을 한 장 열람하기도 어렵지만, 사진 속 사람들은 자료가 시간이 지나도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는 문득 처음 채무 계약서를 금고에 넣던 날을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자신에게 먼저 봉투의 발신인을 확인하라고 했다면 말을 들었을까.
현정이 책상 위에 작은 메모지를 놓았다. “이 물건을 보존 중에 누가 확인하고 접촉했는지 전부 기록해 놓았어요. 출입 기록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자에 봉인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봉인이 어느 때 붙었는지 검증해야 하니까요.”
“어렵네요. 그냥 누가 넣었는지 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쉬웠으면 자료관이 필요 없겠죠.” 현정이 미소 지었다. “바뀌지 않았다고 믿는 것도 확인이 필요한 일이에요.”
그녀는 두 장의 사진을 겹쳤다. 같은 봉투처럼 보였지만 유리 아래에서 소인 글씨의 모서리가 조금 달랐다. 우빈이 색이 진한 쪽을 가리켰다.
“이건 나중에 찍은 거겠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촬영 각도의 영향인지 인쇄 차이인지 모릅니다.”
우빈은 손을 거뒀다. 알고 싶다는 마음이 확신을 만들지는 못했다.
“‘혼자 오라’고 했을 때 못 가는 게 아니라, ‘누가 보냈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못 가는 거죠.”
소라는 나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인 강나래는 자신의 동생에 관한 민감한 정보를 불특정한 사람에게 공유하지 않겠다는 전제 아래, 연락 방식을 하나 정해 두었다. 장혜숙을 통해 본인이 먼저 연락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우빈이나 소라에게 동생의 현재 생활명을 알려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나래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호라는 사람이 정말 만나고 싶어 한다면, 제가 먼저 편지를 보내고 싶어요.”
“뭐라고 쓰시게요?”
“잘 지냈는지 묻고 싶어요. 이름이나 주소보다요.”
우빈은 화면에 떴던 ‘단독 면담’이라는 말을 다시 보았다. 금고는 늘 사람의 이름부터 원했다. 그런데 나래는 이름보다 먼저 안부를 묻고 싶어 했다.
오후 네 시, 장혜숙이 옛 보호소로부터 보관물 인수 확인서 한 장을 받아 왔다. 보호소는 수십 년 전에 문을 닫았지만, 마지막 관리자에게 넘겨진 물품 가운데 ‘D-07 개인 수첩’이라는 항목이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는 처음 보는 코드가 붙어 있었다.
[보관 분류: 08]
[개인 소유 / 임의 열람 금지]
“원본 08하고 같은 숫자네요.” 우빈이 말했다.
“그래서 같은 물건이라는 증거는 아니지.” 장혜숙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 애는 어릴 때도 자기 수첩을 남에게 보여 주기 싫어했어. 오른손이 없어서 왼손으로 한 글자씩 배운 거라 더 그랬지.”
장혜숙은 그때 아이가 수첩을 감추던 습관을 떠올렸다. 누군가 대신 적어 주겠다고 하면 민호는 도망치듯 뒤로 물러났다. 오른손이 없다는 이유로 늘 어른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말을 듣던 아이였다. 하지만 스스로 글씨를 쓰고 싶어 했고,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자기 말이 아니라고 우겼다.
“한 번은 열이 많이 났는데도 자기 이름은 자기가 쓰겠다고 했어. 그렇게 쓰기 어려운 글자인데.”
“강민호요?” 우빈이 물었다.
“그래. 그런데 그게 지금 사용하는 이름이라는 뜻은 아니야. 아마 지금은 어떤 이름으로 살지도 본인이 선택하고 싶겠지.”
그 말에 어린 나래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생을 부르고 싶은 마음과 동생이 불리고 싶은 이름이 다를 수 있었다. 우빈은 그것이 너무 늦게 깨달은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때 우빈은 사진 속 아이의 손을 다시 보았다. 사진은 아이가 왼손으로 작은 수첩을 쥔 모습이었다. 그는 그 손을 알아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보내온 메시지를 진짜라고 믿고 싶어졌다.
“확인할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장혜숙은 오래 망설였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림을 그렸다. 작은 노란 해바라기였다.
“숙제를 다 하면 내가 찍어 주던 도장이야. 민호는 그 도장 밑에 늘 자기만 아는 점 세 개를 찍었어. 별것 아닌 장난인데, 내가 이걸 기억할 줄은 몰랐겠지.”
우빈은 금고 화면을 바라봤다. 신원을 확인해 보겠다며 그 점의 위치를 바로 입력할 뻔했다. 그러나 누군가 흉내 낼 수 있는 정보를 금고에 제공하면 그 순간부터 비밀은 비밀이 아니었다.
“이건 우리끼리 보관하죠.” 그가 말했다.
현정은 작은 도안을 기록 봉투에 넣고 봉했다. 바로 그때 보존실 벽 너머에서 낡은 종소리가 울렸다. 창고 안에는 시계가 없었다. 안내 방송도 끝난 시각이었다.
우빈이 뒤돌아보자 유리창에 글자가 나타났다.
[원본 08 / 초대 거절 확인]
[보관인 보호 규칙 유지]
[단독 면담이 아니라면 대면을 요청하지 마십시오]
문장 아래에서 새로운 줄이 느리게 찍혔다.
[단, 강민호가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만은 다른 잉크였다. 붉고,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우빈은 유리창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누군가 금고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아니면 금고 안에서 서로 다른 누군가가 다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소라 씨.”
“네.”
“우리한테 연락한 게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어요.”
소라는 봉투를 내려다봤다.
“그럼 누가 ‘혼자 오라’고 했는지부터 찾아야겠네요.”
보존실 전등이 꺼졌다 켜졌다. 유리창의 붉은 글자는 없어졌지만, 바닥에는 아주 작은 물방울 자국 하나가 남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었다.
제9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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