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람중앙역의 안내판에는 다시 평범한 문장이 떠 있었다.
‘다음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정우빈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며칠 전에는 이곳의 모든 안내문이 사고 예고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달랐다. 이곳에서 실제로 위험을 확인하고 조치했던 사람들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고를 상품으로 팔아 보려던 사람들이 분명히 구분됐다.
시립 기록관리원에서는 여섯 지역의 자료를 각각 정리하고 있었다. 선제보증운영은 관련 기관이 질의한 사항 일부에 답변했지만, 대표 책임자를 선정할 법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거래 설명서의 신규 모집은 보류됐고 일부 피해자에 대한 허위 독촉 중단 요구가 접수됐다. 피해 구제와 조사 절차는 이제부터였다.
“모든 계약이 사라진 건 아니죠?” 우빈이 물었다.
박현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우리가 확인한 건 일부 계약의 근거가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피해가 있었다면 그건 별개로 처리해야 해요. 하지만 그걸 핑계로 아무나 채무자로 삼을 수는 없죠.”
차윤서도 정식 조사 절차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문서로 제출했다. 그녀는 자신이 관리했던 거래의 범위를 설명했고, 소라는 그 진술을 무조건 믿기보다 독립적인 원본과 대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빈은 그 방식을 지지했다. 뒤늦게 잘못을 말한 사람에게도 사실을 확인할 기회는 있어야 했지만, 그 말이 다른 사람의 피해를 지우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조은채는 역 안전 담당자로 돌아갔다. 그녀는 새로 작성한 안전 일지 맨 앞에 짧은 문장을 붙였다.
‘위험을 알린 사람의 이름은 책임 귀속의 근거가 아니다.’
우빈이 그 문장을 읽고 웃었다.
“이걸 붙여 놓으면 금고가 화내지 않을까요?”
“화내라고 붙인 거 아니에요. 사람이 읽으라고 붙였죠.”
은채의 대답은 명쾌했다. 금고에 할 말을 생각하느라 사람에게 해야 할 말을 잊었던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그날 오후, 소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성인 나래가 보내 온 짧은 동의서였다. 본인의 보호 기록 중 강민호의 행방을 확인하는 데 직접 관련된 부분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대조하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디까지 공개할지, 누가 검토할지에 대한 한계도 적혀 있었다.
“예전 같으면 시스템이 대신 결정했을 겁니다.” 소라가 말했다.
“이번에는 나래 씨가 결정했네요.”
“그게 가장 큰 차이예요.”
우빈은 서람중앙역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명숙은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뒤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어머니 가방을 들어 주려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먼저 가방을 건넸다.
“이제 들어 줘. 오늘은 좀 무겁다.”
우빈은 웃으며 가방을 받았다.
“그동안 왜 맨날 괜찮다고 하셨어요?”
“도움받을 일을 남이 정하는 건 싫은 거지. 내가 필요할 때 부탁하면 되잖아.”
그들은 역 앞 작은 식당에 들러 따뜻한 국수를 먹었다. 이명숙은 병원에서 만난 할머니의 이야기를 했고, 우빈은 손으로 면을 감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어머니가 잔소리를 했다. 두 사람은 평소처럼 웃었다. 금고의 알림은 오지 않았다.
저녁 여덟 시, 시립 기록관리원의 자료 대조 회의에서 새 사실이 확인됐다. 문세희가 보관한 당시 접수번호 목록과 정해원의 진술, 정태수의 현장 기록이 같은 첫 경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원본 전체를 복원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그 경보는 돈을 빌려 달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아이 두 명을 보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원본 00 / 최초 명령 부분 복원]
[보호 요청 00-000001]
[수신자 확인: 보류]
[채무 전환 근거: 확인되지 않음]
검은 글자들이 천천히 회색으로 바뀌었다. 미결의 형상이 열람실 끝에 나타났다. 종이로 된 사람은 예전보다 작았다. 그는 우빈에게 장부를 건네려다가 멈췄다.
“수신자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보관해.” 우빈이 말했다. “이름 모르는 사람에게 대신 주지 말고.”
“보관에는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 비용부터 누가 실제로 부담하기로 했는지 확인해. 사람한테 청구서를 만들기 전에.”
미결의 몸 안에서 종이가 천천히 접혔다.
“명령이 수정되었습니다.”
[미수령 상태 유지]
[대체 채무자 지정 금지]
우빈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금고 하나의 규칙이 바뀌었다고 모든 세상의 규칙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들이 막은 것은 적어도 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쓰는 일이었다.
그때 박현정의 전화가 울렸다. 자료관의 보관실에서 이상한 봉투를 발견했다는 연락이었다. 오늘까지 봉인돼 있던 1998년 자료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인데, 겉면에는 2026년 오늘 날짜의 우편 소인이 찍혀 있었다.
“누가 넣었는지 확인했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상자가 열렸다는 기록은 없어요. 그래서 임의로 개봉하지 않고 담당자 입회 아래 보존 중입니다.”
우빈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늘 날짜가 찍힌 편지가 1998년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시스템이 뒤늦게 날짜를 인쇄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 기존 보관 기록을 조작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확인할 이유는 충분했다.
이튿날 오전, 정식 개봉 절차가 진행됐다. 봉투에는 편지 한 장과 작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은 1998년 사고 현장에서 찍힌 것처럼 보였다. 어린 나래가 울고 있었고, 그 옆에 얼굴을 반쯤 돌린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옷자락에는 ‘민호’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편지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그날 나를 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을 찾아낸 사람들이 모두 살아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서명은 없었다. 대신 하단에 접수번호가 찍혀 있었다.
[00-000001 / 수신 회신]
“이걸 누가 보낸 거죠?” 우빈이 물었다.
박현정은 답하지 않았다.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편지와 사진을 대조하는 과정에서 소라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진 속 남자아이의 손에 든 작은 수첩이었다. 거기에는 원본 00과 같은 표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금고는 일곱 개가 아니다.’
우빈이 눈을 좁혔다.
“그럼 몇 개라는 거야?”
그 순간 그의 휴대전화에 새 알림이 떴다.
[미등록 원본 감지]
[원본 08 / 최초 보관인: 강민호]
[보관 위치: 비공개]
[요청: 정우빈과 단독 면담]
우빈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자신이 직접 본 것이 강민호의 요청인지, 금고가 그의 이름을 다시 빌려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새로 등장한 08번 원본이 지금까지 확인한 일곱 개 장치와 다른 번호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소라가 그의 옆에 섰다.
“이번에도 혼자 가실 건 아니죠?”
우빈은 휴대전화를 껐다.
“아뇨. 먼저 민호 씨가 진짜 보낸 요청인지부터 확인해야죠.”
그는 봉인된 편지의 접수번호를 다시 적었다. 빚을 없애 주던 금고를 처음 본 날에는 숫자 하나가 삶을 바꿔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그는 그 숫자 뒤에 실제로 누가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의 기록함이 닫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오래 기다리던 문을 안쪽에서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제9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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