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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89화
PAYLUA ORIGINAL · 제89화

89화. 처음 울린 경보

빚을 먹는 금고 · 2,926자

오프라인 책장
강민호의 이름을 본 순간, 우빈은 어린 나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민호는 어디 있어요?” 그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우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금고가 그의 이름을 오랫동안 다른 데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알게 됐을 뿐이었다. 문세희는 1998년의 사고 당시 자신이 어디 있었는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현장 구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외부 점검자로 서류를 확인하러 실험동에 들어간 것은 사고 다음 날이었다. 그러므로 생존자 명단의 진실을 자신이 직접 봤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제가 본 것은 기록이었어요. 처음 경보가 울린 시각, 누가 보호 요청을 접수했는지, 어느 문이 열리지 않았는지.” 정태수의 과거 진술과 맞는 부분도 있었고 다른 부분도 있었다. 사고 현장을 찍은 사진은 하나같이 흐릿했다. 당시의 작은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젖은 벽과 철문, 누군가 떨어뜨린 작은 장갑만 남아 있었다. 우빈은 그 장갑이 지금까지 자신들을 따라온 검은 장갑과 같은 것인지 물었다. “사진만으로는 모릅니다.” 문세희가 말했다. “우리가 같은 물건이라고 믿으면, 그다음부터 모든 사람을 하나로 보게 돼요.” 우빈은 사진을 다시 내려다봤다. 여러 사람이 오고 갔던 사고 현장을 단 한 사람의 악의로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문을 잠갔고, 다른 누군가는 원본을 보관했고, 훗날 또 다른 사람들이 서류를 고쳐 썼다. 각각의 행동을 확인해야 했다. 그는 정태수의 낡은 작업복 소매에 남은 기름 얼룩을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얼룩이었다. 자신이 익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 사람의 잘못을 지워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느 일을 실제로 했는지 말할 기회를 없애는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됐다. 그가 잠근 문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조사받아야 했다. 다만 사고 뒤에 누군가 ‘보호 미완료’를 ‘금전 미변제’로 바꾸었다는 점에는 서로 다른 기록이 일치했다. “왜 그렇게 바꿨을까요?” 우빈이 물었다. “보호를 완료하지 못한 이유를 찾는 것보다, 누가 비용을 내야 할지 정하는 게 더 쉬웠으니까요.” 문세희가 대답했다. “쉽다는 게 옳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소라는 나래에게 연락했다. 성인 나래는 복지관에서 기억 회복 상담을 마친 뒤였다. 아이 시절의 기억이 자신과 겹치는지 확인하는 일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우빈은 그녀에게 시스템이 ‘대체 보호 책임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그 요청에 응할 의무는 없다고 설명했다. “저는 민호의 누나이지 보호 계약의 보증인이 아니에요.” 나래가 말했다. “그 말부터 기록해 주세요.”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찾고는 싶어요. 살아 있다면 만나고 싶고, 아니라면 왜 그 이름이 이렇게 오랫동안 떠돌았는지 알고 싶어요.” 우빈은 이번에야말로 그 말을 누군가 대신 바꾸지 않기로 했다. 나래가 찾아야 하는 것은 동생이지, 1998년의 빚이 아니었다. 오후 늦게 정해원의 진술이 추가로 도착했다. 그녀는 여전히 건강 상태 때문에 대면 면담을 길게 할 수 없었지만, 공개에 동의한 일부 문장을 직접 확인한 기록이 있었다. ‘최초의 경보는 사고 예측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경보를 받았다는 이유로 비용을 부담할 사람을 찾으라는 지시는 내린 적 없다.’ 우빈은 문장을 읽고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원본 00이 내일을 보여 주는 줄 알았던 건 자신이 겁을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 겁을 이용해 사진을 만들고, 상품을 팔고, 남의 이름을 적었기 때문이다. 서강재가 자료 목록 마지막 항목을 발견했다. 정해원의 진술에서 언급된 첫 경보와 같은 접수번호였다. ‘긴급 지원 요청 00-000001.’ 수신자는 정태수와 이정민. 요청 대상은 강나래 외 1인. 완료 여부는 ‘미확인’이었다. 그러나 종이 아래에는 나중에 추가한 글씨가 있었다. ‘미확인 건은 일괄 채무로 전환.’ 우빈이 그 문장을 가리켰다. “보호하지 못한 일이 빚으로 바뀐 출발점이네요.” “그런데 서명 날짜가 사고보다 열두 해 뒤예요.” 소라가 말했다. 문세희가 손가락으로 가장자리의 작은 인쇄번호를 짚었다. 실제로 2010년에 발행된 용지였다. 1998년 기록을 덧씌운 문서가 원본처럼 쓰여 온 것이다. 박현정은 두 자료를 분리해 보존하고, 서명 시점과 실물 자료의 진위 확인을 요청했다. 원본 00의 화면에서도 새 문장이 떴다. [기초 경보 00-000001 / 채무 전환 승인 근거 불일치] [원본 복원 요청] 그날 밤 우빈은 아버지에게 서류를 보여 줬다. 정태수는 멀리서 안경을 찾아와 두 장을 읽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잠근 문 뒤에 두 아이가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 늦었다.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날 아이들을 구해 달라고 울린 경보에 돈을 매긴 건 내가 아니야.” 우빈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말도 그대로 남길게요. 아버지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같이.” 정태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해 다오.” 부엌에서 이명숙이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우빈은 문득 지난번 자신이 금고를 처음 열었던 날을 떠올렸다. 가족을 구하겠다며 덜컥 계약서를 넣은 일이 지금껏 자신을 따라왔다. 그 선택의 결과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동의까지 떠안아서는 안 됐다. 그날 자정, 원본 00의 사전 청구 기록이 한 차례 갱신됐다. [여섯 지역 통합 손실 / 기초 근거 재검증] [대표 귀속: 보류] [최초 보호 요청 / 재개방] 그런데 화면 아래에서 또 하나의 문장이 나타났다. [강민호 / 수신 회신 대기] 우빈은 주저하다가 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호의 회신이라네요.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까요?” “확인하기 전에는 알 수 없어요.” 우빈은 그 말을 듣고도 휴대전화를 오래 붙잡고 있었다. 때로는 확답보다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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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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