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88화
PAYLUA ORIGINAL · 제88화

88화. 제로 원의 계약서

빚을 먹는 금고 · 2,698자

오프라인 책장
설명회가 시작되는 시각, 정우빈은 행사장 앞에 가지 않았다. 대신 시립 기록관리원의 공개 열람실에 앉아 있었다. 소라와 조은채, 문세희, 박현정이 각자의 자료를 펼쳤다. 누군가가 대신 서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확인한 내용만 모으면 됐다. “어제 서람중앙역에서 인명 피해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은 역 운영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은채가 말했다. “다만 이동이 불편했던 사람도 있고, 실제 손실을 주장할 사람이 있다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따로 확인해야죠.” “그걸 없었다고 하면 안 되겠네요.” 우빈이 답했다. “맞아요. 사고가 없었다는 말이 모든 불편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문세희는 오래된 수첩에서 원본 00의 기초 규정을 읽었다. 회의실에서 가장 늦게 입을 연 사람은 서강재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 자신이 보내 왔던 독촉장의 양식을 테이블에 놓았다. 한 장에는 고지 시각, 다른 장에는 수령인의 이름이 적혔다. 일단 보내 놓고 답변이 없으면 '묵시적 확인'이라고 표기하는 오래된 내부 관행을 스스로 설명했다. “답이 없으면 동의한 걸로 처리해도 된다는 건 없었어요. 저는 그런 내용을 당연한 것처럼 적어 왔죠.” “그럼 그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현정이 물었다. “제가 보낸 내역을 찾아 각각 확인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지만 우빈은 오히려 믿을 만하다고 느꼈다. 근거도 확인하지 않은 채 오늘 안에 모두 해결하겠다는 사람보다, 어디서부터 살펴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위험을 경고받았다는 이유로 피해자 또는 지원자가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빨간 줄이 그어진 문장이었다. “이 줄이 삭제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다른 문서가 뒤에 붙었을 뿐이죠. 저는 그 뒤에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보존 목록을 가져왔어요.” 보존 목록은 한 장짜리가 아니었다. 당시 실험동의 서류는 시설 관리자, 의료 담당자, 외부 검토자, 회계 담당자 등 여러 사람에게 나눠 보관됐다. 문세희가 가진 것은 그중 목록 표지였다. 실제 자료의 일부는 아직 행방을 몰랐다. “그럼 우리가 찾은 서류만으로 원본이 복원된다는 얘기는 아니군요.” 소라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다만 누가 어떤 부분을 나중에 추가했는지 비교할 시작점은 됩니다.” 그 시각 선제보증운영의 행사장 화면에는 화려한 숫자가 올라가고 있었다. [손실 보장 예상액 48억 원] [선제 경고 확보율 100%] [현장 대응자 확인율 83%] 누군가의 휴대전화로 중계 화면이 퍼졌고, 그중 일부가 열람실로 전달됐다. 우빈이 영상을 보려 하자 소라가 화면을 가렸다. “광고 문구 말고 계약서부터요. 숫자가 크게 보인다고 실제로 존재하는 돈이 되는 건 아니에요.” 현정은 행사 주최 측과 관계 기관에 문서번호를 지정한 질의서를 보냈다. 선제 경고 자체를 손실 자산으로 산정할 수 있다는 근거, 실재 피해에 대한 독립 검증 절차, 조은채의 동의 여부를 분명히 물었다. 회신 시각과 수신 확인은 차례로 기록됐다. 잠시 뒤 우빈의 화면에 검은 직사각형 하나가 떠올랐다. 평소의 금고와 비슷했지만 손잡이가 없었다. 단지 작은 투입구 하나만 있었다. [대표 부과 금액: 48억 원] [정우빈 / 즉시 동의 시 타 지역 청구 중지] “또 나 하나를 고르래요.” 우빈이 말했다. 은채가 다가왔다. 그녀는 그 글자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우빈의 표정과 손이 떨리는 건 볼 수 있었다. “우빈 씨가 대신 돈을 갚겠다고 하면 진짜 다른 사람들이 안전해집니까?” “그렇다고 쓰여 있어요.” “거기에 쓰여 있다는 것 말고는요?” 우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자신이 듣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그렇게 하면 엄마가 안전해진다’는 말 앞에서 그는 너무 쉽게 굴복할 뻔했다. “그럼 다른 걸 하죠.” 은채가 말했다. “제가 본 일은 제가 말하겠습니다. 다른 지역의 일은 그곳에서 확인할 사람들이 말할 거예요. 우빈 씨 혼자 모두를 구할 필요는 없어요.” 화면의 검은 상자가 입을 벌렸다. 안에서는 아홉 개의 얇은 영수증이 흘러나왔다. 각 영수증에는 숫자 대신 문구가 있었다. ‘보호한 대가.’ ‘알린 대가.’ ‘먼저 도착한 대가.’ ‘늦게 도착한 대가.’ 우빈은 영수증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 종이를 손에 쥐면 자신이 뭔가 받았다는 기록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대신 사진을 남기고 소라에게 그가 볼 수 있는 문구를 읽어 줬다. “다 합쳐도 빚이 되는 근거는 없어요.” 소라가 말했다. “사건이 일어났는지, 누가 피해를 입었는지, 누가 동의했는지. 그게 빠졌어요.” 잠시 후 행사장 중계 화면이 멈췄다. 주최 측이 질의서를 받았다는 표시와 함께 상품 설명서 일부가 ‘검증 중’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법적인 최종 결론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 당장 모든 지역의 이름을 팔아넘기는 계획에는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원본 00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대표 책임 인수 실패] [개별 수익자 원본 대조 실행] [최초 보호 대상: 강나래 외 1인] 문세희가 얼굴을 굳혔다. “처음 자료까지 끌어오고 있어요.” 검은 화면에서 낡은 종이 냄새가 났다. 우빈은 무엇보다 그 냄새가 실제 같아서 두려웠다. 문세희가 가져온 문서 표지와 같은 잉크 자국이 화면에 번졌다. 그리고 가장 아래, 오래된 이름 하나가 나타났다. [원본 00 / 최초 미완료 보호 대상: 강민호] [대체 보호 책임자를 찾습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88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8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