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가 사람을 움직인 뒤에 남는 것은 발자국이었다.
서람중앙역에서는 통행 경로가 달라졌고, 복지관에서는 상담 일정을 조정했다. 병원은 늦게 도착하는 환자를 위한 안내를 늘렸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는 평소보다 전화가 많이 걸려 왔다. 그곳에서 실제로 무슨 조치가 있었는지는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원본 00은 모두 같은 이름의 장부로 묶어 버렸다.
‘사전 대응에 따른 비용.’
한지연은 공개된 상품 설명서를 펼쳐 보였다. 여섯 지역의 손실이 한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금액은 이상하게도 서로를 보증하고 있었다.
“지역 A에서 손실이 확인되지 않으면 지역 B의 추정치를 참고하고, B가 불분명하면 C를 가져오는 구조예요.” 지연이 설명했다. “처음부터 실제로 무엇을 잃었는지 확인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그럼 아무 일도 없어도 숫자는 남겠네요.” 서강재가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숫자가 남는다고 누가 돈을 빌렸다는 건 아니죠.”
우빈은 여섯 번째 항목에서 손을 멈췄다.
한편 서람중앙역의 민원 창구에는 자신이 손해를 봤다는 사람이 실제로 찾아왔다. 전날 통로가 혼잡해 면접 시간에 늦었다는 청년이었다. 조은채는 그 이야기를 업무 일지에 남기고 관련 절차를 안내했다. 청년이 분노하는 것도, 일정을 놓쳐 아쉬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왜 제 이름으로 다른 사람한테 청구하죠?” 청년은 우빈이 보여 준 의문의 서류를 보고 말했다. “저는 제가 겪은 일을 말하고 싶을 뿐이지, 누가 돈을 대신 갚으라는 말을 한 적은 없어요.”
우빈은 그제야 금고가 가장 많이 지우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목소리였다. 남의 이름에 금액을 쓰는 대신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절차가 있어야 했다. 청년은 자신이 접수한 민원 번호를 간직하고 돌아갔다. 그는 투자 상품의 기초 자산이 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구륜구 임시보호소’. 그곳은 강민호가 마지막으로 목격됐다는 기록이 남은 곳이었다. 수십 년 동안 찾지 못한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이제 또 새로운 가격이 붙고 있었다.
그들은 보호소의 현직 담당자를 통해 기록 열람 절차를 문의했다. 담당자는 서류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미성년자였던 사람들의 보호 기록에는 공개할 수 없는 개인정보가 많았다. 우빈은 이번만큼은 그 지연이 고마웠다. 누군가 찾아왔다고 해서 사람들의 이름을 함부로 열어 줘서는 안 됐다.
대신 담당자는 과거 자료에 별도의 공적 조사 요청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발신 기관은 선제보증운영이었다.
“그 회사가 보호 기록을 왜 요구했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구체적인 사유가 불명확해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향후 안전 손실의 대표 수익자 확인’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우빈이 한숨을 쉬었다. 미래의 손실이라는 말로 과거의 아동 기록까지 빼내려는 것이다.
그날 저녁 지연에게서 더 나쁜 소식이 왔다. 선제보증운영이 서로 다른 지역의 미확정 손실을 하나의 대규모 계약으로 묶어 외부 투자자들에게 설명회를 열 계획이었다. 개최 시각은 다음 날 오전 열 시. 문서에는 ‘선제 예방이 확인된 우량 자산’이라는 말까지 붙어 있었다.
우빈이 소라를 돌아봤다.
“사고가 없으면 오히려 더 비싸지는군요.”
“이미 돈을 빌린 사람에게 받는 게 아니니까요. 무슨 일을 하든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는 기대를 파는 겁니다.”
소라는 잠깐 손을 멈췄다. 이 사건 전 그녀도 금융사기 피해자였다. 자기 이름이 계약서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돈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실제로 속인 사람이 누구인지보다 속은 사람이 왜 서명했는지 더 큰 목소리로 묻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가 여섯 지역을 전부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할 수 있는 건 각 지역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통로를 마련하는 겁니다.”
박현정은 조은채의 일지와 역사 운영기관의 공식 회신을 보존했고, 문세희의 발언은 독립적인 진술로 받았다. 지연은 상품 설명서의 문구가 원본과 동일한지 대조했다. 서강재는 자신이 부주의하게 처리했던 옛 문서가 새 계약에 인용되었는지를 확인했다.
우빈이 맡은 일은 달랐다. 피해자 지원 연락처를 한 군데로 묶어 공개하지 않는 것. 누구나 원본 00의 메시지를 보여 주며 개인 정보를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호소와 복지관에 정식 문의 방법만 전달했다.
늦은 밤, 차윤서가 다시 연락했다.
“투자 설명회에 가겠다고 하지 마세요. 참석자 명단에 이름이 오르면 위험 대응자로 등록될 수 있어요.”
“그럼 그냥 두라는 말입니까?”
“아니요. 바깥에서 질문할 수 있어요. 누구의 손실을 누구에게 팔고 있는지 서면으로 물으세요. 그 답변을 남길 수 있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윤서가 덧붙였다.
“제가 거래소 운영자라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필요하면 공식 진술을 내겠습니다.”
“그 일로 전부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소라가 말했다.
“알아요. 처음부터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밤 열한 시, 예고 장부의 금액이 새로 고쳐졌다.
[여섯 지역 통합 예상 손실: 48억 원]
[대표 원인 제공자: 정우빈]
[승계 가능 권리: 위험 경고를 받은 사실]
우빈은 마지막 줄을 세 번 읽었다. 빚을 갚으라는 말보다 더 섬뜩했다. 자신이 경고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 눈감고 귀 막고 있으라는 거네요.”
소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들었다는 사실과 동의했다는 사실은 다르잖아요. 그 차이를 끝까지 남기면 돼요.”
우빈의 가방 속 망치가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작게 부딪쳤다. 쇠가 부딪친 소리는 작았지만, 전자 장부에서 나는 경고음보다 훨씬 분명하게 들렸다.
제8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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