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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빚을 먹는 금고 · 100화
PAYLUA ORIGINAL · 제100화

100화. 아무도 대신 갚지 않는 밤

빚을 먹는 금고 · 3,498자

오프라인 책장
서람시 곳곳의 전광판에서 숫자 00이 나타난 것은 정확히 밤 아홉 시였다. 차량 안내판, 병원 대기표, 오래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층 표시기까지 같은 숫자를 보였다. 일부는 잠깐 깜박이고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시민들이 찍은 영상에는 분명히 검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누구도 이것이 하나의 고장인지, 여러 장치에 침입한 동일한 신호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우빈은 복지관 계단에 앉아 팔목을 바라봤다. 붉은 잉크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통증은 가라앉았다. 그는 손목을 손으로 감쌌다. 길 건너편에서는 퇴근하는 사람들이 편의점 앞을 지나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자기 일정대로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네요.” 우빈이 말했다. 소라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건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에요. 오늘 누군가는 자기 물건을 처음으로 열었잖아요.” 우빈은 캔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호로 추정되는 남자는 자신의 의사로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 보관된 정해원의 증언을 들었다. 누군가의 삶을 지우는 기계와 달리 그 상자는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겼다. “그분은 이제 안전할까요?” “지금보다 더 안전하게 만들 절차가 남았겠죠. 오늘 밤 끝나는 일은 아니에요.” 말을 끝내자 소라의 전화가 울렸다. 나래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성인 나래는 동생에게 쓰던 편지를 보내기 전에 마지막 문장을 읽어도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너를 대신해 어떤 서류에도 이름을 적지 않을 거야. 대신 네가 원할 때 언제든 만나러 갈게.’ 소라는 그 문장을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 “좋은 편지네요.” 나래가 말했다. “답장을 받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보내고 싶어요.” 우빈은 옆에서 그 말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금고가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선택 같았다. 결과를 보장받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자유를 믿어야 했으니까. 다음 날 오전, 08번 상자와 정해원의 녹음은 보관인의 동의 범위 안에서 독립적으로 보존됐다. 1998년 구조 요청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여러 자료와의 대조가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2010년에 추가된 자동 채무 전환 조항과 옛 규정의 불일치가 한층 분명해졌다. 조사 기관은 관련 서버의 접근 내역과 협력사 계정의 실제 운영 주체에 대한 확인 절차를 진행했다. 일이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보호가 필요했고, 검은 영수증이 남긴 현실의 상처도 사라지지 않았다. 선제보증운영은 일부 거래를 중단했지만 다른 이름으로 비슷한 계약을 이어가려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금고의 규칙을 고친 것과 그 규칙으로 돈을 번 사람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정태수는 기록관리원에 자발적으로 찾아왔다. 아들을 부르지 않고 먼저 자신의 과거 진술을 확인했다. 1998년 그가 잠근 문, 이후 구조가 지연된 경위,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 그가 직접 본 사실과 남에게 들은 이야기가 구분되도록 한 줄씩 수정했다. 우빈은 대기실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다 끝났어요?” 정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야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됐지.” “아버지가 그날 문을 열었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한 잘못은 그것대로 남겨 두자. 네가 대신 짊어질 일은 아니다.” 우빈은 아버지 얼굴의 주름을 바라봤다.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부모의 과거까지 갚아야 가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늘 처음으로 아들에게 아무것도 갚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철물점에 들렀다. 망치 손잡이를 고정할 작은 쐐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인은 공구를 건네며 반갑게 웃었다. 정태수는 천천히 지갑을 꺼냈고, 우빈이 계산하려 하자 손을 막았다. “이건 내가 쓸 거다.” “제가 사 드려도 되는데요.” “네가 사 주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야. 내가 내 돈으로 사고 싶은 거지.” 우빈은 웃었다. 사소한 장면이었지만 금고가 자꾸 숨기려던 사실이 거기 있었다. 누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누구의 돈이었는지, 어느 이름으로 적을지. 작은 구분이 삶을 지킨다. 그날 저녁, 박현정은 보존실에서 원본 08의 자료 목록을 다시 검토했다. 상자를 열 때 녹음된 증언에는 1998년 구조 요청 번호가 있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테이프 구간의 발신 시각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 두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누락된 두 시간…” 그녀가 혼잣말했다. 정해원은 분명 문을 열라고 말했다. 그 뒤 누가 실제로 문을 열었는지, 그 사이 어떤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는지에 대한 자료는 아직 흩어져 있었다. 그 공백을 누군가 고의로 지웠다면 새로운 책임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현정이 화면을 닫으려는 순간, 보존실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가 없는 전화였다. “여보세요?” 스피커에서 낯선 남자가 말했다. “원본 08을 열었군요.” “누구십니까?” “그 테이프의 마지막 두 시간은 복원하지 마십시오.” “협박입니까?” 남자가 짧게 웃었다. “아니요. 경고입니다. 그 시간 동안 문 밖에 있던 사람이 누군지 알면, 당신들이 지금까지 막아온 모든 청구서가 돌아올 테니까.” 현정은 통화 시각을 기록했다. 상대는 곧 전화를 끊었다. 급하게 통화기록을 열자 발신번호 칸에는 숫자 대신 글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수익자.’ 그 시각 우빈은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어머니 이명숙이 무김치를 내오고, 아버지가 싱겁다고 투덜댔다. 우빈은 한 숟갈을 입에 넣다가 웃었다. 휴대전화는 한동안 조용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자 방 안의 작은 금고가 저 혼자 열렸다. 우빈이 가족의 빚 계약서를 처음 넣었던 바로 그 금고였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금속 문짝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원본 00 / 최초 구조 요청의 누락 시각 복원 완료] [실종된 두 시간의 최종 수익자: 확인됨] [이름: 정우빈] 우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종이를 바라봤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사건에 또 자기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전 같았다면 종이를 찢거나 대신 책임지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종이의 모서리를 보았다. 날짜, 필체, 발급번호. 모든 것을 확인할 때가 됐다. 누가 왜 자신의 이름을 그때 기록했는지 알아야 했다. 그 순간 금고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정우빈 씨. 이번에는 당신이 갚을 빚이 아닙니다.” 우빈은 숨을 멈췄다. “그럼 뭡니까?” 검은 어둠 속에서 아주 오래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당신이 이미 받았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금고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에는 돈도 계약서도 없었다. 작은 아기용 이름표 하나만 놓여 있었다. 이름표 뒷면에는 1998년 6월의 날짜와 함께 붉은 펜으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수령 사실 미확인.’ 우빈은 이름표를 집어 들지 않았다. 금고를 마주 본 채 천천히 물었다. “누가 나를 받았다고 적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 안의 불이 꺼지고, 벽 전체에 다음 기록이 떠올랐다. [2부 / 최초 수익자의 장부] [검증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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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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